강원도 횡성군 청일면 유동1리 마을 주민들이 지난 10월9일 낮 마을에 세워진 765kV 송전탑 옆을 지나가고 있다. 이 마을에는 수도권으로 전기를 나르기 위한 송전탑 3기가 세워져 있다.
코스모스길 밑이 시퍼렇다. 골짜기를 타고 횡성호까지 이어지는 ‘계천’을 넘자 강원도 횡성군 청일면 유동1리 버들골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을 뒤에는 굽이굽이 산자락이 흐른다. 병풍처럼 마을을 감싼 주봉산에는 굵은 울타리도 있다. 산자락에 붉은색· 흰색 페인트를 엇갈려 칠한 송전철탑이 듬성듬성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곳, 버들골은 한때 ‘밀양’이었다. 송전탑 공사로 진통을 겪고 있는 지금의 경남 밀양시 말이다. 1995년 한국전력은 경북 울진군 북면에 있는 울진 핵발전소(현 한울원자력발전소)의 전기를 수도권으로 옮기기 위해 765kV 송전선로 사업을 시작했다. 밀양에 들어선다는 송전선로와 같은 전압이다. 발전소에서 나와 강원도 태백시 원동 신태백변전소로 흘러간 전기를 다시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신가평변전소까지 쏴주는 ‘길목’ 역할을 하는 송전선로다. 한전이 정한 울진~신태백~신가평 155km 구간의 송전선로 계획안에는 유동1리도 포함돼 있었다.
“사람만 안 죽었지, 밀양하고 똑 같았다”“에휴, 사람만 안 죽었지, 뭐 다 똑같았죠. 그래서 밀양 뉴스만 보면 아파요. 맘이 너무 아파.” 지난 10월9일 오전 마을에서 만난 유동1리 주민 김종필(47)씨는 마을에 송전탑이 들어설 때를 기억한다. 김씨의 집은 높이 80m가 넘는 송전탑을 마주하고 있다. 집과 송전탑 사이의 거리는 약 60m. 송전탑에서 건너편 산자락으로 이어지는 765kV 송전선은 정확하게 그의 집 옆 돼지축사 지붕 위를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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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사서 이사왔더니 집 근처에 빨간 깃발이 꽂혀 있더라고요.” 경기도 수원시에서 일을 하다가 1996년 귀농한 김씨는 이사를 온 뒤에야 송전탑이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송전탑을 지척에 두고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송전선로 사업을 진행하면, 송전철탑을 세우는 땅은 한전이 사들이고 송전선이 지나는 구간에는 공시지가의 28% 수준의 보상금을 지급한다. 그러나 김씨가 사는 곳처럼 송전선로가 지나는 땅(선하지)에서 폭이 34m 이상 떨어져 있는 경우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 “집을 보러 와도 송전탑이 서 있는 걸 보고 다들 그냥 돌아가니, 원.” 김씨 가족은 마을의 집을 비워둔 채, 면사무소 근처에 집을 얻어 살고 있다. ‘송전탑 아래 빈집’은 개 3마리가 지키고 있다.
17년 전 버들골 마을은 온통 전쟁터였다. 한전은 1995년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송전선로 사업에 대한 설명회를 열었다. 주민들은 한전의 토지 사용 승낙서에 동의를 해줬다. 당시 송전선로 사업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시작됐다. 1998년 여름, 한전과 시공사인 동부건설이 송전탑을 세우려고 주봉산 곳곳을 파헤져놓자, 폭우를 못 견딘 산이 와르르 무너졌다. 마을이 엉망진창이 됐지만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67가구가 모여 살던 유동1리 주민들은 ‘송전탑 철폐 대책위원회’(대책위)를 꾸렸다. 마을 주민들은 송전탑의 위험성에 대한 공부도 했다. 주민들은 마을에 들어서는 송전탑 공사장으로 들어오는 인부들과 중장비를 막아섰다. 백발의 마을 어르신들은 머리를 깎았다. 기자들은 그들의 싸움을 지켜봤다. 2013년 10월, 밀양의 모습이 겹쳐지는 이유다.
지난 10월9일 오전 유동1리 마을 주민들이 송전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성환 기자, 김영식(45), 김영하(68), 홍성만(54)씨의 모습(위쪽). 이 마을 한 집의 문을 통해 주봉산에 설치된 송전탑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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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머리가 지끈거려요.” 이날 마을에서 만난 홍성만(54)씨는 17년 전 이곳을 찾았던 기자의 이름 석 자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1999년 5월6일 제256호 르포 ‘산림파괴 마을파괴 송전철탑 반대’ 참조). 버들골 마을이 고향인 홍씨는 당시 대책위를 이끌었다. 그가 누런 봉투에서 꺼낸 빛바랜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대법원 판결문이었다. “결국 징역 10개월에 집유(집행유예) 2년 받았죠.” 1998년 10월 그와 마을 주민 6명은 송전탑 공사를 막아섰다는 이유로 업무방해 혐의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대법원까지 가며 3년 넘게 재판이 이어졌지만, 법은 주민들 편이 아니었다. 판결문에 적힌 피고인들의 직업은 하나같이 ‘농업’이라고 적혀 있었다. “잘 살고 있는 일개 마을에 들어와서 돈 몇 푼 쥐어준 다음에 땅까지 못 쓰게 만들고…. 아예 마을 주민들까지 범죄자로 만들고 간 거죠.”
주봉산 자락을 넘어 강원도 홍천군으로 이어지는 아득한 송전선로처럼, 마을 주민들의 상처도 깊다. 당시 유동1리에 세워진 송전탑은 208번, 209번, 210번 이렇게 3개였다. 당시 주민들은 정부가 송전선로 사업을 해야 한다면, 정부가 직접 나서서 마을 주민들을 이주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법적 근거가 되는 ‘고압송전선 인근 지역법’을 만들자고 정부에 제안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리는 (송전탑을) 세우지 말라는 소리는 안 했습니다. 국가는 뒤에 서 있고, 일꾼(시공사)만 앞세워 싸움을 붙여 공사를 밀어붙이지 말라는 거였어요. 우리는 국민 아닙니까? 국책사업이라고 하니, 국가가 나서서 우리도 살 수 있게 법으로 해결해줘야죠.”(홍성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주민 이주법안송전탑 건설 과정에서는 비현실적인 보상 문제가 자주 불거졌다. 정부는 최근 이를 보완하겠다며 새로운 지원제도를 내놓았다. 밀양 송전탑 공사 재개를 위해 정홍원 국무총리가 내놓은 보상안의 법적 근거가 되는 ‘송·변전설비 주변 지역 보상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송주법)이다. 송주법은 송·변전설비 주변 지역에 지원 사업을 하고, 송·변전설비가 들어서면서 자신의 땅이나 주택이 보상 범위에 속하게 되면 사업자에게 재산적 보상 및 주택 매수를 청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안은 지난 10월7일 여야 합의로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를 통과하고 본회의 상정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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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환경·에너지 관련 시민단체는 송주법에 대해 거센 비판을 숨기지 않는다. 법안에서 정한 송전선로 등의 보상 지역 기준이 송전탑의 영향에 대한 객관적인 조사 없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또 유동1리처럼 이미 건설이 끝난 지역에는 적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위헌 소지가 있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보상 등의 객관적 기준을 정하려면 송전탑의 안전성 등에 대한 조사부터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정부는 오히려 송전탑의 영향력에 대한 조사 내용을 숨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지난 10월8일 환경보건시민센터가 공개한 산업통상자원부(옛 지식경제부)의 ‘전국 고압송전선로 주변 지역 주민 암 관련 건강영향조사 최종보고서’를 보면 그렇다. 보고서에는 154·345kV 송전선이 지나는 67개 지역 주민의 암 발병 위험도가 다른 지역에 견줘 남성의 경우 35곳, 여성은 27곳에서 증가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서울대 의대가 주관기관으로 참여해 지난 8월 완성한 이 보고서는 환경보건시민센터를 통해 이날 처음 공개됐다.
고압전류 소음은 들리기라도 하지만…이처럼 정부가 송전탑의 안전성 문제는 뒤로한 채 사업 추진을 강행하는 탓에 송전탑이 들어서는 마을 주민들의 불안감은 커져만 간다. 유동1리 주민 김영식(45)씨도 일상적으로 송전탑의 소음을 신경 쓰며 살고 있다. “한겨울이나 여름 장마철에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엄청나요. 가끔 희한한 소리도 나고요. 집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으면 소리가 더 심하게 느껴지고요.” 유동1리 이장을 맡고 있는 김영하(68)씨는 “소음은 들리기라도 하지만, 전자파 영향력은 수십 년을 두고 봐야 알 수 있는 거라 사실 더 불안하다. 나중에 한전이 전자파 문제가 있다고 인정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요즘 버들골 마을 주민들이 불안해하는 건, 바로 ‘또 다른’ 765kV 송전탑이다. 마을 주민을 괴롭혔던 울진~신태백~신가평 구간의 765kV 송전선로와 별도로, 한전이 또 다른 765kV 송전선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6차 전력수급계획’에도 들어 있는 신울진~강원~신경기(230km) 구간으로 신울진핵발전소 1~4호기의 전기를 수도권으로 옮기기 위해 송전선로를 만들려 하고 있는 것이다. 2019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이 송전선로 사업에는 강원도 정선군, 삼척시, 횡성군, 홍천군 등이 예정지로 포함돼 있다. 유동1리와 직선거리로 10km 떨어진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진조리에 송전선로의 중간 기착지인 ‘강원개폐소’가 세워지면서, 주민들은 행여나 또 다른 송전탑이 세워지는 게 아닌지 불안해하고 있다. 현재 한전과 횡성군청 관계자, 군의회의장, 이장협의회장 등은 송전탑 입지선정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기존에 송전탑이) 있는 곳으로 지나가는 게 한전도 더 쉽다고 생각할지 모르잖아요. 다른 지역으로 지나간대도, 이런 일을 처음 겪는 마을 사람들이 보상 전문가인 한전 사람들을 이겨낼 재주가 없어요.”(김종필) “전기를 횡성군만 쓰는 게 아닌데 왜 (송전선로가) 2개 노선이나 이곳을 지나가야 합니까. (송전탑이) 다시 우리 마을에 들어선다고 하면 똑같이 막을 겁니다. 예전처럼요.” ‘오래전 밀양’이었던 이 동네는 지금 송전탑을 이고 사는 것도 모자라 새 송전탑 걱정을 해야 하는 ‘또 다른 밀양’이 됐다. 버들골의 가을이 가혹하다.
횡성=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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