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르타·베카시(인도네시아)=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어린 선원인 푸트라(14)가 지난 5월27일 자바해에서 그물을 끌어올리고 있다. 3년 전 학교를 그만둔 소년은 아직 글을 읽지 못한다. 세계경제 규모 16위인 인도네시아에선 최대 800만 명의 아동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고된 노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굿네이버스 제공
망고나무에서 내려온 카밀(13)이 아버지와 수확한 망고 열매를 비닐포대에 담고 있다. 사진 굿네이버스 제공
9살 때부터 타기 시작한 망고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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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밀(13)은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푸르고 말간 하늘은 아니었다. 시퍼런 망고나무 잎사귀가 소년의 하늘이었다. 그 작은 하늘에서 소년의 눈은 주먹만 한 아버지를 쫓고 있었다. 아버지가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푸르스름한 망고 열매를 긴 뜰채로 건져내 바닥으로 던지면 소년은 두 팔 사이에 낀 비닐포대로 받아 안았다. 어느새 비가 후드득 내렸다. 굵은 빗방울이 하늘을 뚫고 소년의 얼굴로도 떨어졌다. 소년은 고개를 숙이지도, 눈은 껌뻑이지도 않은 채 하늘만 쳐다봤다. 그새 옷은 흠뻑 젖었고, 맨발은 진흙투성이가 됐다.
소낙비가 그치자 소년도 10m가 훌쩍 넘는 망고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제 키보다 높은 나뭇가지를 두 팔로 잡더니 다리를 휘감아올려 금세 나뭇가지에 앉았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아찔한 높이까지 올랐다. 야윈 소년의 몸무게에도 얇은 나뭇가지는 출렁거렸다. 그래도 나뭇가지가 춤출 때마다 망고 열매가 땅으로 뚜둑뚜둑 떨어졌다. 30여 분 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내려와 바닥에 널린 망고 열매를 비닐포대에 주워 담았다. 아침 7시부터 4시간을 꼬박 일해 딴 망고 열매는 90kg. 평소 150kg에 비하면 수확이 나빴다. 아쉬워하는 아버지와 달리, 오전 일을 마친 소년의 표정은 환했다. “배 고파요. 우리 집에 함께 가요.”
인도네시아 베카시의 가난한 마을 무아라겜봉에 사는 카밀의 가족은 대대로 ‘망고 소작인’으로 살았다. 이웃의 망고 열매를 따서 값을 치른 뒤 시장에 되팔아 생계를 꾸렸다. 할아버지·아버지·삼촌들은 수십 년간 부지런히 망고를 땄지만 소작의 사다리는 끊기지 않았다. 카밀네 월수입은 아무리 많아야 50만루피(약 5만7천원) 정도로 자카르타의 최저임금 200만루피(약 22만8천원)의 ‘반의 반’ 수준에 머물렀다. 결국 카밀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9살 때부터 자기 키의 스무 배 높이에 가까운 망고나무를 탔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지난해에는 학교까지 그만두고 지금은 오로지 망고 따는 일만 하고 있다. 요즘같은 망고 시즌(3~8월)에는 휴일도 없이 매일 아침 7시부터 3시까지 6~8시간 망고나무를 오르내린다. 아버지에게 일이 없을 때면 일당 4만~4만5천루피(약 4560~5130원)를 받고 이웃의 망고·잠부·바나나 나무를 오르기도 한다. “안전장치가 없어도 무섭지 않아요. 익숙해졌거든요.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어요.”
카밀이 두려워하는 일은 따로 있다. 학교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카밀은 숨이 막힌다. 학급 인원 70명 중에서 2~3등을 했을 정도로 공부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에서 나만 중학교에 가지 못했어요. 아버지에게 보내달라고 해도 ‘상황이 좋지 않아서 어렵다’고만 하세요. 아침에 망고나무에 올라 멀리 학교 가는 친구들을 보면 정말 부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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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뱃일을 하겠다는 열네 살 소년
영락없는 뱃사람이었다. 푸트라(14)가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인 뒤 한참 만에 까만 허공으로 내뿜었다. 자작자작 담배가 타들어갈 때마다 매서운 푸트라의 표정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담배 한 대로 잠시 휴식을 취한 소년이 동료 선원들 사이로 돌아가 그물을 힘차게 걷어 올렸다. 거친 뱃일로 다져진 소년의 까만 근육이 전구 불빛에 부서졌다. 근육이 움찔댈 때마다 황톳빛 자바해에서 끔붕과 자이 같은 고기들이 딸려 올려왔다. 소년은 능숙하게 그물에서 고기를 떼어내 배 바닥에 던졌다. 작은 물고기나 나뭇가지·기저귀 따위의 쓰레기는 다시 바다에 버렸다. 그물을 올리는 속도가 조금 떨어지기라도 하면 소년은 “빨리 끌어올려!”라며 소리를 질렀다. 고기가 많이 딸려올 때마다 휘파람을 불며 흥을 돋우는 것도 소년이었다. 그렇게 6시간 만에 고된 노동이 끝나자 소년은 완전히 녹초가 됐다. 바닷물로 얼굴과 몸의 땀을 씻어낸 뒤 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마지막 담배를 물었다.
푸트라는 일주일에 네댓 번 오후 5시부터 자정까지 배를 탄다. 8살 때부터 뱃일을 시작해 벌써 7년째다. 베카시의 가난한 어촌마을 벤타이 머카르에서 뱃일을 하는 아이들은 종종 있지만 푸트라처럼 일찍 배에 오른 경우는 드물다. 학교는 일찌감치 11살에 그만뒀다. 지금도 푸트라는 글을 읽고 쓰지 못한다. “내가 원해서 뱃일을 시작했어요. 아직 덩치가 작아서 수십∼수백kg의 그물을 재빠르게 당겨올릴 때 힘이 들어요. 그래도 학교엔 미련이 전혀 없어요.”
거칠어 보이는 푸트라에게도 뱃일은 매일 생존을 건 전쟁이었다. 4년 전에는 높은 파도에 휘청대 쓰러지면서 배 난간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그리고 피를 쏟으며 바다로 떨어졌다. 동료 선원이 곧바로 바다에 뛰어들지 않았더라면 푸트라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큰 사고였다. 그러나 푸트라는 다음날 다시 바다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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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억척스러운 바다 노동자로 만든 것은 가족에 대한 강한 책임감이었다. 어부인 두 형은 3년 전 돈을 벌기 위해 대만으로 떠났고, 기계수리공인 아버지는 일하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푸트라가 한 달에 벌어들이는 240만루피(약 27만3600원)는 대부분 부모와 두 동생을 위해 쓰인다. “돈을 벌어다주면 부모님이 정말 자랑스러워해요. 나는 도시로 떠나고 싶지도 않고, 다른 일을 하고 싶지도 않아요. 이 마을에서 평생 뱃일을 할 거예요. 가족을 지켜야 하니까요.”
야시장에서 오빠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니아(12)가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다. 사진 굿네이버스 제공
노래하고 구걸하고… 야시장의 남매들
자카르타의 빈민촌인 라와바닥 인근 야시장에 낡은 오토바이가 멈춰섰다. 아버지는 어린 남매만 남겨두고 다시 떠났다. 마이크를 든 오빠가 노점과 포장마차들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어른들이 좋아하는 당둣(인도네시아 대중음악)을 부르기 시작했다. 여동생 니아(12)는 오빠를 뒤따르며 노점 주인과 손님에게 작은 비닐봉투를 내밀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소녀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소녀에겐 한쪽 눈과 한쪽 귓바퀴가 없었다. 동정심이 생긴 사람들이 소녀의 봉투에 500루피(약 57원), 1천루피(약 114원)짜리 동전과 지폐를 넣어주었다. 소녀는 감사의 인사도 없이 무표정하게 돌아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티닥 아다”(없어), “클루아르”(저리 가)라며 냉정하게 거절해도 무덤덤한 소녀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아픈 소녀에게 현란한 야시장은 위험투성이였다. 수많은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차로 끝을 아슬아슬하게 걷는 소녀에게 경적을 울려댔고, 술에 취한 남자들이 소녀를 보며 낄낄댔다. 노래에 빠진 오빠도 동생을 뒤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소녀는 놀라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기계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 봉투를 내밀 뿐이었다. 오빠가 목이 아파 잠시 쉴 때면 니아가 대신 당둣을 불렀다. 그렇게 남매가 3시간 넘게 1km의 야시장을 몇 번씩 오간 뒤에야 아버지의 오토바이가 다시 나타났다.
니아는 언제부터 거리로 나섰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머니가 “네가 갓난아이였을 때부터 내가 업고 노래를 부르러 다녔다”고 말해줄 뿐이다. 그러나 니아는 거리로 나서게 된 것이 자신의 외모가 남들과 다르기 때문인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니아는 한쪽 눈과 한쪽 귓바퀴가 없는 것 외에도 다지증과 구순구개열(일명 언청이) 장애가 있다. 어찌 시작된 일이든, 니아는 자신이 거리로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오토바이 택시를 하는 아버지는 하루 2만루피(약 2280원)도 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구걸을 하면 하루 3만~5만루피(약 3420~5700원)는 집으로 가져올 수 있다. 한 후원자가 2년 전부터 니아에게 매달 조금씩 후원금을 보내주고 있어도 아직 소녀가 노동을 끊을 수 없는 이유다. “엄마에겐 빚이 아주 많아요. 도와드리고 싶어요. 그래서 일이 부끄럽거나 힘들지는 않아요. 가족은 원래 서로 사랑하고 도와줘야 하니까요.”
어른스러운 말과 달리 일을 마친 소녀는 매우 지쳐 보였다. 그나마 지금은 방학이지만, 오는 7월 중학교에 입학하면 밤거리를 누비고도 다음날 아침 6시에 일어나 학교에 가야 한다. 그래도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어 소녀는 기쁘다고 했다. “대학에 가고 싶지만 형편이 안 좋으니 고등학교라도 마치고 싶어요. 그러고 나서는 가수가 될 거예요. 노래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줄 수 있으니까요. 언젠가는 거리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싶어요.” 소녀는 거리를 벗어나는 꿈을 언제쯤 이룰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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