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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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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축 시대의 종말

고용불안·임금상승 둔화로 가계 여윳돈 주는데 이자율은 쥐꼬리… 경기부양 정신 팔린 정부는 저축 의욕 꺾는 투기 조장책만 남발
등록 2013-05-24 21:35 수정 2020-05-03 04:27

1%대 예금 금리가 처음 등장했다. NH농협은행은 지난 5월14일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를 연 2.2%에서 연 1.95%로 떨어뜨렸다. 물가상승률(1분기 1.4%)과 이자소득세(이자의 15.4%)를 감안하면 금리가 사실상 제로에 가까운 수준이다. 다른 은행들도 정기예금 금리를 2%대 초반으로 조만간 낮출 계획이다. 한때 고금리를 자랑했던 저축은행까지 금리를 3%대로 내리고 있다. 앞선 5월9일 한국은행이 경기부양을 위해 기준금리를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수준인 2.5%로 인하한 후폭풍이다.

962호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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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축률 15년 새 18.2%포인트 곤두박질

저금리 시대의 개막은 ‘저축 시대의 종말’을 앞당기고 있다. 가계의 저축이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상태에서 마지막 남은 저축 의지마저 꺾어버릴 가능성이 높은 탓이다. 실제 가계저축률(개인순저축률·세금과 사회보험료 등을 제외한 가처분소득에서 소비를 하고 남은 돈의 비율)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21.6%에서 지난해 3.4%까지 떨어졌다. 가계 수입에서 지출을 빼고 나면 저축할 여력이 거의 없었다는 뜻이다. 2011년 가계저축률(3.1%)로 비교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인 5.3%의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그나마 예·적금, 보험, 주식, 펀드 등 가계가 여윳돈을 굴릴 수 있는 모든 금융자산을 저축으로 보았기에 이 정도 수치가 나온 것이다.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는 투자 상품을 제외하고 은행 예·적금 등 전통적 의미의 저축만 따로 생각하면, 저축률은 더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가계가 주로 이용하는 국내 은행의 정기예금 잔액은 지난 4월 말 기준 611조3천억원으로 올 들어서만 4조2천억원이 감소했다. 반면 증권사에서 주로 판매하는 종합자산관리계좌(CMA) 잔액은 같은 기간 1조9천억원 늘어났다. 가계의 돈이 은행을 떠나 단기 상품에 머물며 투자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허문종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글로벌 경제 회복이 지연되고 내수 부진 등으로 저성장 국면이 지속되면 적어도 2~3년간은 저금리 기조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저축률도 당분간 낮게 유지될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저금리가 저축을 약화시킨 기폭제이긴 해도 근본 원인은 다른 데 있다. 정보기술(IT) 거품 붕괴로 저금리 기조가 시작된 2001년 이전에도 가계저축률은 이미 하락하고 있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임시·일용직 비중 증가로 고용불안이 심화된데다 경제성장을 통해 기업에서 창출된 소득이 가계로 원활하게 유입되지 못해서 가처분소득 증가 속도가 둔화된 게 저축의 종말이 시작된 기원이다. 여기에 세금과 국민연금·의료보험 등 사회부담금이 증가한 것도 가처분소득을 줄이는 요인이 됐다.

[%%IMAGE3%%]기업은 버는데 국민은 가난

실제 한국금융연구원의 분석을 보면, 가처분소득 연평균 증가율은 1980년대 16.7%에서 1990년대에는 12.7%로 줄어들더니 2000년 이후에는 5.7%로 하락했다. 정부의 저축률(총저축률·순저축률에 감가상각비 등 고정자본 소모분을 반영한 비율)이 외환위기 직전부터 지난해까지 소폭 줄어들고 기업저축률은 오히려 늘어나는 사이, 가계저축률만 유난히 급격하게 하락한 데는 가계의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임진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업이 벌어들이는 소득 중에서 고용 창출, 임금 상승 등을 통해 가계로 배분되는 소득 증가율이 악화됐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벌어들인 돈에서 새나가는 지출 규모는 무섭게 커졌다. 집값과 전세금은 천정부지로 뛰었고 교육비·생활비도 계속 오르기만 했다. 어떻게든 생활을 꾸려가려고 얻은 빚은 금세 가계를 짓눌렀다. 저축으로 목돈을 모아 소비를 하는 자연스러운 가계 운영이 무너지고 빚으로 소비를 감당하다 저축은커녕 빚만 불리는 악순환이 가계에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금융회사에서 일하는 강성철(42·가명)씨의 사례를 보자. 그는 지난 10년간 저축을 잊고 지냈다. 홑벌이로 한 달 600만원을 벌지만 소득공제 한도에 맞춰 연간 400만원의 연금저축을 붓는 게 유일한 저축이다. 그래도 처음 6년 정도는 서울 구로구에 마련한 아파트의 대출금을 저축이려니 하고 지냈다. 그러나 4년 전 두 자녀를 위해 무리하게 목동으로 이사를 하면서 생활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2억원이 조금 넘던 아파트 전세금이 4억원으로 뛰어 빚을 내 감당했다. 자녀 교육비로 한 달 300만원이 들어갔다. 그는 “10년 만에 저축은행의 연 4%대 적금에 가입하려고 알아보고 있다. 적금을 탈 때쯤 또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할 테니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상태로는 노후가 너무 불안하고 희망이 없다”고 했다.

저축 무용 시대, 지르거나 혹은 즐기거나

은행에 돈을 맡길 여유도, 유인도 없는 시대를 가계가 버티는 두 가지 방식은 서로 극단적이다. 인생 역전이나 종잣돈 마련을 꿈꾸는 이들은 주식·펀드·해외채권 등 수익률이 높은 재테크 수단으로 옮겨가곤 한다. 대기업에 다니는 황성환(46·가명)씨에겐 주식 투자가 빚을 갚고 노후를 준비하는 수단이다. 월수입 600만원 중 주택담보대출금과 교육비, 생활비 등을 제외하고 남은 30만원 정도를 적금에 붓고는 있지만 최소한의 안전장치일 뿐이다. 성과급과 용돈을 털어 주식으로 굴리는 1300만원의 투자금이 그에겐 진짜 저축이다. 국내 블루칩(우량주) 중에서 저평가된 종목을 찾아내 장기로 투자하는 것이 연 40% 정도의 수익을 올리는 그만의 비결이다. “웬만해선 은행에 돈을 넣지 않는다. 앉아서 돈을 까먹는 일이다. 남들은 휴대전화 살 때보다 주식을 살 때 공부를 안 해서 손실을 보는 것이다. 공부를 하면 주식으로 돈을 모아도 불안하지 않다.”

962호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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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축 줄면 투자·성장률도 감소

반대로 저축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저축으로는 자산을 불릴 가능성이 없다는 비관적인 생각에 오로지 소비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실제 한국은행이 지난 1월 성인 1068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우리나라의 금융이해력 측정 결과’를 보면, 저축의 필요성에 대한 응답자의 인식이 매우 낮았다. 비슷한 조사를 한 영국·독일·노르웨이 등 15개 국가 중 뒤에서 세 번째 수준이었다. 응답자 대부분은 ‘저축보다 소비에 더 만족감을 느낀다’고 했고, ‘오늘을 위해 살고 미래는 걱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병원 직원으로 일하는 고영희(31·가명)씨가 그렇다. 그는 한 달에 280만원 정도를 받으면 한 푼도 남김없이 써버린다. 월세·공과금·생활비로 100만원 정도를 지출하고 나머지 돈으로는 쇼핑과 문화생활을 즐긴다. 1년에 2번 정도는 친구들과 해외로 나간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을 재산이 있는 건 아니다. 금리도 낮다는데 은행에 두긴 싫고, 그렇다고 남들처럼 재테크를 하자니 아깝게 잃을 것만 같다. 차라리 나를 위해 다 써버리는 게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가계저축률 하락은 고성장 국면을 지난 선진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한국은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에 따르면 한국에서 가계저축률이 1995~2012년 총 15.7%포인트 감소하는 동안 일본(10.3%포인트), 미국(1.5%포인트), 독일(1.1%포인트) 등은 그 감소폭이 훨씬 작았다. 김천구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저축률 하락의 부작용을 이렇게 설명했다. “가계저축률이 1%포인트 감소할 때 투자는 0.25%포인트, 경제성장률은 0.19%포인트씩 하락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가계가 저축을 하지 않으면 가계부채 해결이 지연되고 개인의 노후소득 보장에도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도 정부의 각종 경제정책은 가계의 저축 능력과 의지를 빼앗는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있다. 제윤경 에듀머니 대표의 지적이다. “가계의 자산 형성과 가장 밀접한 부동산 정책을 보자. 현재 예금금리는 매우 낮은 데 반해 부동산의 자산가치는 가계의 구매력 수준을 훨씬 웃돌아 불균형이 생기고 있다. 이럴 땐 주택 가격을 하향 안정화해나가야 가계가 빚도 덜 지고 저축도 할 수 있다. 지금처럼 부동산 가치를 떠받치는 쪽으로 가면 가계는 계속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저축의 시대가 끝나간다. 저축의 종말 뒤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세금 몇 푼 깎는다고 양은그릇 놋그릇 되나
실효성 의심되는 저축장려책
가계저축률을 끌어올릴 완벽한 해법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가계의 저축 여력과 의지는 고용·노동·저성장·가계부채·부동산·소비풍조 등 여러 구조적인 문제와 민감하게 맞물려 있는 탓이다. 그러나 정부는 엉킨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가는 대신 손쉬운 방편으로 금융상품에 대한 세제 지원을 저축 촉진 대책이라며 내세우고 있다. 그렇다면 정부는 얼마나 적극적으로 서민·중산층 가계의 저축을 지원하고 있을까.
이 홍종학 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기획재정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정부가 올해 13개 금융상품의 세제 지원에 투입하는 예산은 2조1천억원 정도다. 금융상품 만기 때 가계가 내야 하는 이자·배당소득세를 인하·면제해주거나, 금융상품에 저축하는 돈은 세금 부과의 기준이 되는 소득액에서 공제해주는 방식을 통해서다. 정부가 가장 신경 쓰는 건 개인의 노후생활 보장을 위한 연금저축 상품이다. 연금저축에 대해 연간 400만원 한도 내에서 소득공제를 해주고, 연금 수령 때 연금소득세를 깎아주는 데 7442억원이 투입된다. 농·신협(단위조합), 새마을금고 등의 조합원이 낸 출자금 배당소득에 비과세 혜택을 주는 데도 6312억원을 쓴다. 노인·장애인 등이 붓는 생계형 저축과 농어민이 가입하는 농어가목돈마련저축에 비과세 혜택을 주는 데도 재정이 투입된다.
[%%IMAGE4%%]그러나 특정 계층이나 조직에 속하지 않은 일반 서민·중산층이 저축을 하도록 유도하는 상품은 지난 3월부터 판매되는 근로자재산형성저축(재형저축·예산 1천억원 추정) 정도가 유일하다. 기존의 대표적 서민 상품이던 장기주택마련저축(장마저축)은 올해 신규 가입자부터 비과세·소득공제 지원이 모두 폐지됐다. 그러나 장마저축을 대체하는 재형저축은 소득공제 혜택이 없고 7년 이상 유지해야 이자소득세 14%를 면제해준다. 가입도 일정 소득 이하로 제한된다.
서민·중산층의 저축과 거리가 먼 세제 지원도 더러 있다. 해외자원개발투자나 선박투자회사의 주주에 대해 배당소득세를 줄여주거나 면제해주는 상품들이다. 관련 산업의 자금 조달을 돕기 위한 조처다. 김천구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지금 같은 저금리 상황에선 저축 여력이 있는 가계라도 저축을 할 만한 상품이 부족하다. 서민들을 위해 비과세·고금리의 상품을 개발해 저축 유인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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