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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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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FTA 너머 세계

사기업이 정부 제소할 특권 준 ‘기업 FTA’ 넘어 북한까지 포괄하는 다자주의로 나가야…
대립하는 미국과 중국, 양손에 잡으려는 ‘동시다발적 FTA론’ 성립 불가능해
등록 2012-12-07 13:01 수정 2020-05-02 19:27

노무현·이명박 정부의 자유무역협정(FTA)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그 배경에는 미국이 있다. 미국은 아시아로의 귀환을 선언하더니 아시아 경제블록을 놓고 중국과 격렬하게 부딪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 토론에서 아시아에서 중국을 뺀 나머지 나라들과 경제통합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중국이 국제 기준에 맞게 행동해야겠다는 더 큰 압력을 느끼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가 말한 구체적 장치가 미국이 추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다. 그 전략적 목적은 경제 영역에서도 중국을 아시아의 주변으로 밀어내고 봉쇄하는 것이다. 벌써 14차 협상 회의가 12월 뉴질랜드에서 열린다. 그사이 아무도 중국을 초대하지 않았다.

한중일 FTA 협상 개시 선언을 위한 3국 통상장관회의가 20일(현지시간) 오후 캄보디아 페놈펜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박태호 한국통상교섭본부장과 천더밍 중국 상무부장, 에다노 유키오 일본 경제산업대신이 회의를 하고 있다.

한중일 FTA 협상 개시 선언을 위한 3국 통상장관회의가 20일(현지시간) 오후 캄보디아 페놈펜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박태호 한국통상교섭본부장과 천더밍 중국 상무부장, 에다노 유키오 일본 경제산업대신이 회의를 하고 있다.

본질이 차별 구조인 FTA

이에 맞선 중국은 어떠한가? 중국이 아시아에서 경제적으로 고립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중국은 11월 인도와 함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추진을 출범시켰다. 만약 중국 주도의 이 블록이 탄생하면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아우르게 된다. 여기에는 한국도 포함된다. 그러나 이 블록은 미국을 배제한다. 과연 미국이 연 7.4%의 경제성장을 이루는 아시아(일본 제외, 2000~2009년)에서 자신이 빠진 경제블록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만 있을까?

그동안 아시아는 적어도 경제협력 면에서는 평화로웠다. 그러나 이곳에서 경제블록을 놓고 벌이는 미국과 중국의 치열한 대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노무현·이명박 정부의 이른바 ‘선진통상국가론’ 또는 ‘동시다발적 FTA론’의 모순이 드러난다. 긴박한 현실에서 긴급하게 우리의 통상전략을 바로잡아야 한다.

FTA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하더라도 차별 구조다. 즉, 그 안에 속한 자와 배제된 자를 차별한다. 이것이 본질이다. 차별이 없으면 FTA가 아니다. 그런데 FTA의 태생적 문제는 그곳에서 배제된 자에 대한 어떠한 배려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차별을 정당화할 특별한 상황을 인정받지 못하면 대립과 갈등을 증폭하는 구조다.

경제블록의 출발인 유럽연합(EU)은 어떠한가? 거기에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손에 피를 묻힌 유럽이라는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 1950년 프랑스 외무부 장관 로베르 쉬망이 유럽의 석탄과 철강 산업을 통합하는 공동체를 만들자고 제안한 것은 석탄과 철강이 전쟁 무기를 만드는 필수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세계는 평화를 위해 EU라는 경제블록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1994년 발효된 미국·캐나다·멕시코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은 성격이 다르다. FTA의 차별 구조를 대외적으로 정당화할 공감이 없었다. 이를 추동한 힘이 미국 기업의 이익이라 ‘기업 FTA’라 할 수 있다. 이때 처음으로 사기업에 각 나라의 정부를 국제 중재에 제소할 특권(ISD)이 경제협정에 들어갔다.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사기업주의를 국제화한 것이다.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사기업주의

국가의 정책 영역을 철저히 압박하고, 미국 기업의 이익을 관철하는 FTA가 등장했다. 그리고 미국은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라는 다자주의를 출범시키며, EU와 손잡고 EU와 NAFTA라는 경제블록을 기득권으로 인정받았다. 이는 국제통상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오류 중 하나다. WTO의 기본 원칙이 바로 157개 회원국을 차별 없이 대우한다는 것이다(흔히 이를 최혜국대우라고 한다). 이 다자주의 원칙이 훼손되었다.

특히 미국이 하는 FTA는 미국 의회의 비준을 받지 못하면 무효가 된다. 이 공간에서 미국 기업의 로비가 협상의 처음부터 끝까지 작용한다. 한국이 한-미 FTA 타결을 선언한 뒤에도, 그리고 협정문에 서명을 마친 뒤에도 두 차례나 미국의 요구에 따라 재협상을 한 것은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 기업은 농업·지식재산권·건강보험 등 자신의 이익이 관철되도록 로비를 해서 FTA에 집어넣었다. 기업의 이익이 FTA를 좌우하게 되었다. 자동차 수출을 더 많이 하려면 한-미 FTA를 해야 한다고 접근하는 것이 바로 기업 FTA의 속성을 보여준다.

다시 미국과 중국의 대립을 보자. 중국 배제의 TPP와 미국 배제의 RCEP는 목적과 성격이 서로 다르다. 전자는 한-미 FTA와 같은 기업 FTA다. ‘WTO 플러스’라는 예외가 없는 단일한 체제를 지향한다. 그러나 후자는 ‘샐러드 그릇’(Salad Bowl)이라는 표현이 있듯 그 내부 구성원의 정체성과 다양한 상호관계를 허용한다. 게다가 만일 한국이 두 곳에 다 가입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예를 들어 쌀을 보자. 한국이 오른손으로는 TPP에 가입해서 가맹국 미국산 쌀에는 관세 감면 혜택을 주면서 비가맹국인 중국산 쌀을 차별하는 동시에 왼손으로는 RCEP에 가입해서 가맹국 중국산 쌀에는 관세 혜택을 주고 비가맹국인 미국산 쌀을 차별하는 것은 가능할까? 만일 한국이 미국산과 중국산 쌀에 똑같은 혜택을 준다면 그것은 더 이상 경제블록이 아니다.

지금 아시아에 필요한 것은 TPP도 RCEP도 아니다. 이미 아시아는 NAFTA보다 더 경제적으로 통합된 상태다. 2008년의 역내 수출비율 47%는 NAFTA의 39%보다 더 높다. 아시아에서 성립한 분업 체제 결과 중국과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은 한국의 1·2위 수출시장이 되었다. 아시아는 사실상 경제적으로 통합된 상태다. 지금 아시아에 필요한 것은 경제블록이 아니라 열린 다자주의다.

아시아와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한국에 절실한 것은 기업 FTA나 경제블록이 아니라 다자주의다. 다자주의 틀 안에서 북한을 WTO에 가입시키는 것, 그리고 서독이 1951년에 그랬던 것처럼, 남북 경제 교류를 WTO에서 민족 내부 간 거래로 승인받는 것이 한국의 통상 전략이어야 한다. 이는 기업 FTA나 TPP, RCEP 같은 배타적 경제블록을 통해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한-미 FTA는 명시적으로 북한 지역을 적용에서 제외했다.

이제 노무현·이명박 정부의 FTA 미몽에서 깨어나야 한다. 한반도 평화 관리와 남북 경제협력의 국제규범화라는 본질적 도전을 응시해야 한다. 이 역사적 과제를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송기호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외교통상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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