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페란자는 스페인어로 ‘희망’을 뜻한다. 그린피스 웹사이트를 방문한 누리꾼들이 직접 정한 이름이다. 희망을 꿈꾸는 이들의 염원이 담겨 있는 셈이다. 그린피스는 현재 에스페란자호 외에 레인보워리어·아크틱선라이즈호 등 3대의 조사탐사선을 운영하고 있다. 길이가 72m인 에스페란자호가 세 선박 중 가장 크고 빠르다. 2002년부터 항해를 시작했다고 하니, 올해로 활동 10년을 맞았다.
팔라우라는 낯선 땅에서 에스페란자호를 만난 것은 출항 하루 전인 11월3일이었다. 멀리서도 ‘그린피스’라고 쓰인 초록색 영어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선상 생활의 시작은 ‘멀미’였다. 바람도 별로 불지 않는 것 같은데 배가 흔들렸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도, 잠을 잘 때도, 식사를 할 때도 언제나 흔들흔들. 활동가들이 들려준, ‘멀미로 2박3일간 누워 있다 돌아간 뒤 추가 취재해 결국은 기사를 쓰더라’는 어느 대만 기자의 일화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죽으란 법은 없다. 식당인 ‘메스룸’ 한켠에 뱃멀미약 박스가 다소곳이 보관돼 있었다. 8시간마다 멀미약 반 알을 삼켰다. 도통 끊을 수가 없었다. 10년 이상 배를 탄 선원들은 이 정도의 파도는 우습다는 눈치였다. 배 위의 모든 물건을 흔들어놓을 만큼 거세디거센 파도를 겪은 이들이었다.
마침내 바다로 향하던 11월4일, 처음 에스페란자호에 오른 이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선상 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칙, 화재시 대피 방법을 일러주는 자리였다. 샤워는 되도록 2분 안에 끝내달라고 했다. 사용할 수 있는 물이 제한된 까닭이다. 한 엔지니어가 한국산 물티슈를 손으로 흔들며 화장실 변기에 아무거나 넣지 말 것을 당부했다. 기자가 일주일간 머물 선실은 부엌 옆 348호 선실이었다. 선실 안에는 2층 침대 2개와 세면대, 물품보관함 등이 있었다. 2개의 동그란 창문을 내다보니 짙푸른 바다가 보였다. 타이에서 온 다이버 교관 톱시 롱롱무앙(37), 한국인 자원봉사자 김가림(32), 그린피스 필리핀 사무소 웹담당자 크리스티나 니타판(27)이 같은 선실을 썼다. 가로 1m, 세로 2m의 작은 침대 위에는 깨끗한 베개와 이불이 놓여 있었다. 이곳을 떠날 때는 쓰던 베개와 이불을 세탁실에 가져다두고, 새로 승선할 누군가를 위해 세탁한 베개와 이불을 가져다놓아야 한다.
배는 크게 4개 구역으로 구분된다. 맨 아래쪽에는 엔진 및 오수정화 설비가 있다. 무선설비 담당자 닐 브루스터(48)는 가장 멀미가 나지 않는 장소가 엔진이 있는 곳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도 땀이 샘솟을 만큼 무덥고 시끄러운 장소다. 그 위 메인덱에는 쓰레기를 분리수거해 보관할 수 있는 박스가 있다. 기자가 잠을 청한 선실과 부엌, 식당 등도 이곳에 위치한다. 메인덱 위는 보트가 보관된 보트덱이다. 선원들이 맥주와 소다수를 마시며 수다를 떨거나 영화를 감상하는 라운지도 눈에 띈다. 맥주와 소다수는 1천원가량의 돈을 내고 사야 하는데 이 돈은 다시 에스페란자호 운영비에 보태진다. 보트덱 끝에는 헬기가 놓여 있다. 밤에는 배가 운항을 멈추고 바다 위에 떠 있다. 배의 흔들림이 덜할 때 헬기 뒤편에 설치된 그물에 누워 적도 근처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을 감상하기도 했다. 배의 가장 윗부분은 선장과 일등항해사가 일하는 조정실이다. 에스페란자호에는 1평 크기의 작은 도서관이 있었는데, 누군가 놔두고 떠난 세계 각국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배 안에서 인터넷이나 전화 사용도 가능하다.
선원 오빠는 ‘강남스타일’선원들의 일상은 아침 8시에 시작된다. 다 함께 품앗이 청소를 한다. 요일별로 식당·복도 등 각 공간의 청소 담당이 있는데 자원해서 맡는 방식이다. 눈치를 보던 기자도 식당이나 복도 청소를 맡겠다고 자원했다. 이른 아침 헬리콥터 탑승 등으로 청소를 하지 못하면 다른 이들이 알아서 청소를 해주었다. 하루 일과가 끝나는 시간은 오후 5시다. 그즈음 바다 위로 뉘엿뉘엿 해가 저문다. 요리사가 점심(12시)·저녁(6시) 하루 두 번 5~6가지 음식을 만들어낸다. 주로 채소·두부와 고기로 만든 음식이다. 해양 보호 활동을 하는 만큼 해산물 요리는 나오지 않았다. 부엌일을 1명의 요리사가 다 감당하기는 힘겨워 보였다. 같은 방을 썼던 이들은 짬이 나는 대로 주방 보조를 자청했다. 에스페란자호에서 만난 요리사는 필리핀 국적의 윌리 페러(37)였다. 냉장 보관 때문에 싱싱하지 않은 채소를 다루는 일이 가장 어렵다고 했다. 요리사를 비롯한 선원들은 3개월가량 배를 타고 그만큼 휴식을 취한다.
때로는 지루하고 때로는 힘든 배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은 끈끈해 보였다. 그들과 금세 정이 들었다. 캠페인을 할 때마다 승선자들이 출연하고 직접 제작하는 ‘웃긴’ 비디오를 만드는 게 전통이란다. 이 비디오는 그린피스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는다. 인도양을 항해 중인 레인보워리어호 승선자들은 최근 말춤을 췄다. 그들이 만든 비디오의 배경음악이 이었기 때문이다. 11월9일 밤, 다른 이들과 함께 레인보워리어호에서 만든 비디오를 보며 박장대소했다.
에스페란자호에서는 환경을 보호하려고 고심한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일단 배 자체가 ‘재활용품’이다. 1984년에 건조된 에스페란자호는 애초 러시아 해군 소방선으로 사용됐다. 30살 가까운 나이 탓인지 엔지니어들은 늘 무엇인가 수리하기에 바빠 보였다. 선장인 스페인 국적의 바디아 바르발은 “이 배는 철로 만들어져 알루미늄 등으로 만든 배보다 자주 녹이 슨다. 또 바닷물이 강하기 때문에 자주 페인트칠을 해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배에 있는 냉장고 냉매제로 오존층을 파괴하는 프레온가스 대신 암모니아를 사용한다. 암모니아를 관리하는 일은 까다롭다. 친환경 엔진도 새로 설치됐다. 이 엔진이 내는 열로 물을 데우고 난방을 해결한다. 지난해 에스페란자호에 탔던 그린피스 한국사무소 송중권 선임 액션캠페이너는 “원래 설치된 엔진은 너무 크고 연료가 많이 들어가서 작고 에너지 효율이 높은 엔진 2개를 추가로 설치했다”며 “평소엔 작은 엔진을 사용하다 불법 어선을 쫓느라 최대 속도를 내야 할 때는 그린피스 본부의 허락을 받아 원래 엔진을 활용한다”고 말했다.
땅에 내리니 비로소 꿈같아화장실 등에서 나온 오수는 자체적으로 정화해 바다로 내보낸다. 배에서 사용하는 식자재·생필품 등 각종 보급품도 함부로 들이지 않는다. 친환경적·윤리적인 제품 리스트를 파악하는 것이 그린피스 각 지역 사무소의 일이기도 하다. 남은 음식물은 통에 모아 일정한 양이 되면 선장에게 보고한 뒤 바다로 던진다. 국제법에 따른 것이다. 선원들은 이를 ‘물고기 밥 준다’고 표현했다. 극지방에서는 바다에 음식물을 버릴 수 없어 꽁꽁 얼려 보관한다.
배에 오른 지 일주일 만인 11월10일 팔라우 땅을 다시 밟았다. 배에서의 생활이 꿈같았다고 느낄 무렵 땅이 흔들린다. 지진인가? 이번엔 ‘땅멀미’라고 했다. 에스페란자호 생활의 끝도 ‘멀미’였다.
팔라우=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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