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2일 지방자치단체들의 눈이 제주로 쏠렸다. 각 분야의 최고인 프로듀서(PD) 김종학, 작가 송지나, 배우 배용준이 손을 잡아 ‘드라마계의 로또’라 불렸던 의 촬영지가 제주로 공식 결정됐기 때문이다. 제작사 청암엔터테인먼트의 대표 김종학 PD가 이날 제주도와의 협약식에서 내놓은 계획은 화려했다. 제주에 대형 세트장은 물론 콘도와 박물관 등을 지어 영상테마파크를 조성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투자 규모가 500억원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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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환 당시 제주도지사는 전폭적인 지원 약속으로 화답했다. 즉각 태스크포스(TF)팀이 꾸려졌다. 곧 제작사가 세트장 인근의 관광지구 개발사업의 공동사업자로 선정됐다. 개발사업자로서 거쳐야 하는 통합영향평가 등의 절차는 사실상 생략됐다. 재정 지원도 이뤄졌다. 공시지가로 1m²당 1만6900원이던 군유지 20만8천m²가 1만1천원에 제작사에 매각됐다. “영상테마파크가 조성되면 매년 200만 명의 국내외 관광객이 제주를 찾을 것”이라는 제작사의 전망을 제주도가 철석같이 믿은 결과였다.
지난 10월4일 제주의 세트장을 찾았다. 아시아 영상산업의 메카를 향한 제주의 원대한 꿈을 담았던 세트장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철거업체 직원 10여 명이 굴착기를 동원해 부수고 나르고를 반복했다. 궁궐과 성곽 등 가건물이 워낙 많아 지난 9월17일 시작된 철거 작업은 두 달 넘게 걸린다는 게 철거업체 쪽 예상이었다. 100억여원을 들인 세트장이 6년 만에 허무하게 철거되는 원인을, 도민들은 제작사 쪽의 ‘먹튀’ 탓이라고 표현했다. 제주도는 여러 특혜를 제공받은 제작사가 세트장을 제외하곤 다른 투자를 전혀 하지 않자, 결국 지난 2월 개발사업 시행 승인을 취소했다. 그러나 도민들은 제작사에 놀아나 도민에게 손해를 끼친 제주도에 대한 원망이 더 컸다. 실제 제주도는 생태계보전 협력금과 산지 복구비 등 지방세 2억7천만원도 떼인 상태다. 직접적인 피해를 본 도민들도 있다. 제주도의 보증만 믿고 세트장 내 상가에 입주했던 상인들이다. “2008년 농사짓던 밭을 팔아 1억원의 보증금을 주고 스낵 코너에 들어갔다. 도청에서도 여러 번 성공을 장담했다. 처음 1년은 그럭저럭 운영되더니 나중에는 관광객이 줄어 하루 매출이 1만~2만원 밖에 안 될 때도 많았다. 보증금을 돌려달라고 소송까지 해서 이겼는데 제작사는 아직도 버티고만 있다.” 김아무개(72)씨의 하소연이다.
한때 열렬했던 지자체들의 ‘드라마 사랑’이 비수가 돼 지자체에 꽂히고 있다. 2000년대 중반 경쟁적으로 드라마 세트장 유치에 나섰던 지자체들이 이젠 뒤처리에 허덕이고 있다. 수억~수십억원의 예산과 행정력을 동원해 지원했던 드라마의 인기가 빠르게 사그라들어 세트장이 관리비만 축내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탓이다. 새누리당의 조해진 의원실이 방송통신위원회한테서 제출받은 ‘전국 드라마 세트장 현황’ 자료를 보면, 지자체에 세워진 27개 세트장 중 8개가 이미 폐쇄됐다. 나머지 상당수의 세트장들도 적자를 감수하며 근근이 버티고 있다. 그나마 여기엔 건설비 20억원 미만의 중소 규모 세트장은 대부분 포함되지 않았다. 이들까지 고려하면 골칫거리 세트장 하나 없는 지자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미래 영상산업 환영에 수십·수백억 투자
제주처럼 세트장 철거만은 막아보려는 지자체들은 민간에 세트장을 매각하려고 애쓰고 있다. 지자체에 세트장 철거는 완전한 행정 실패를 인정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인천시 옹진군청은 2005년 방영된 MBC 의 세트장과 토지에 대한 매각 절차를 진행 중이다. 지난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한국자산관리공사의 전자자산처분시스템을 통해 11억4600만원에 입찰을 받았지만 참가자가 없어 모두 유찰됐다. 옹진군청 관계자는 “8억8천만원의 예산을 들였는데, 2008년까지 입장료 등으로 거둬들인 수익은 1억5천만원에 불과하다”며 “그 뒤엔 방문객이 전혀 없어 폐허처럼 방치돼왔다. 계속 관리비가 들어가는 상황을 감당할 수 없어 매각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지자체들이 드라마 촬영에 임시로 쓰이는 가건축물에 불과한 세트장에 홀린 건 2000년 KBS 을 찍은 경북 문경시가 대박을 터트린 뒤부터다. 많아야 연간 50만 명의 관광객이 찾던 문경은 세트장 특수 등에 힘입어 2001년 관광객 300만 명 시대를 열었다. 문경의 성공 사례를 본 지자체들은 드라마 세트장이 관광객을 끌어들일 매력적인 문화 콘텐츠라고 판단했다. 이때부터 지자체들은 세트장을 끌어들이려고 방송사와 제작사에 각종 인센티브를 내걸었다. 주민 예산으로 세트장을 지어주고, 촬영에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세트장 유치는 지자체장의 큰 치적으로 포장됐다. 전남 완도의 (예산 37억원·2004년), 전남 순천의 (63억원·2005년), 전북 익산의 (17억원·2005년)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한발 더 나아간 지자체도 있었다. 드라마 세트장에 교육과 체험, 오락시설 등을 결합한 드라마 테마파크 조성으로 눈을 높인 것이다. 투입해야 하는 예산이 몇 배로 더 늘어났지만 ‘미래 먹거리’ 발굴이란 그럴싸한 명목이 붙었다. 1·2차 산업으로는 성장 한계에 부딪힌 만큼 관광사업이나 영상산업 같은 3차 부가가치 산업에서 성장 동력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전남 나주의 영상테마파크(2006년)에 123억원, 전북 부안의 영상테마파크(2005년)에 50억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방송사와 제작사들은 지자체의 극성스런 투자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들도 한류와 사극 열풍으로 대형 드라마의 제작에 열을 올리던 때라 제작비 부담을 나눌 파트너가 절실했다. 윤호진 한국콘텐츠진흥권 산업정책팀장은 당시 드라마 세트장 조성 붐을 이렇게 설명했다. “선발 지자체들의 일부 성공을 지켜본 후발주자들은 지역 홍보와 관광객 유치 명목으로 장기적 안목 없이 예산부터 지원했다. 이는 지역의 넓은 세트장에서 사극을 촬영하려는 제작자들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졌다. 때로는 제작사들의 과도한 요구가 지자체들의 예산 투입을 부추기기도 했다. ”
예산 투입한 세트장, 민간업체가 입장료 챙겨문제는 방송사와 제작사는 물론 지자체도 주민 돈이 들어가는 세트장의 활용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는 데 있었다. 애초에 세트장으로 어떻게 꾸준히 수익을 낼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예산 지원을 결정한 지자체는 드물었다. 기껏해야 입장료나 주차비 명목으로 2천~3천원을 받는 정도였다. 세트장에 대한 저작권은 방송사나 제작사가 가지고 있는 탓에 지자체가 이와 관련한 기념품을 제작해 판매하는 것도 어려웠다. 변변한 수익사업이 없다 보니 세트장은 늘 적자에 허덕이다가 방문객의 발길이 뜸해지면 금세 생명력을 잃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해 내놓은 ‘방송영상콘텐츠 제작시설 실태와 운영개선 방안’을 보면, 드라마 세트장 붐이 절정이던 2006년에도 지자체 예산이 투입된 29곳 가운데 5곳만 소폭 흑자를 냈다. 그렇다고 지자체가 기대하는 대로 지역 홍보 효과가 대단히 큰 것도 아니다. 지자체들이 세트장 건립을 지원한 대가로 받는 공식적인 보상은 드라마 앞뒤에 잠깐 노출되는 홍보 자막이 거의 전부다. 덤으로 이따금씩 지역의 명소가 드라마 배경으로 쓰이거나, 방송사·제작사가 떠나며 촬영 소품들을 남기고 가는 정도다. 이처럼 투자비 대비 효과는 불투명한 사업을 하면서도 ‘드라마 제작 지원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세트장의 파급효과를 추정한다든가,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진지하게 수렴하는 등의 노력을 하는 지자체는 찾아보기 힘들다.
현재 촬영 중이거나 준비 중인 대다수 드라마 세트장도 지금까지의 관행대로 만들어지고, 운영될 듯하다. 그중에서도 지난 9월2일부터 방영 중인 KBS 세트장이 가장 전형적이다. 경북도와 경주시는 이 세트장을 경주시내 역사체험 테마파크인 ‘신라밀레니엄파크’로 유치한 대가로 40억원을 지원하고 있다. 올해 경주시의 평생교육 사업예산에 맞먹는 돈이다. 덕분에 KBS는 30억원으로 세트장을 짓고, 남은 돈은 제작비에 보탤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정작 세금을 낸 주민들이 보는 이득은 거의 없다. 세트장의 소유권이 이미 민간 건설업체 삼부토건이 운영하는 신라밀레니엄파크로 이전된 탓이다. 입장료 등 수익은 모두 신라밀레니엄파크의 몫이다. 주민 돈으로 방송사와 건설사에 좋은 일만 한 셈이다. 경주시청 관계자는 “지역 홍보로 관광객 유입 등의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구체적인 파급효과는 용역 줄 예산이 없어 따져보지 못했다”며 “세트장을 신라밀레니엄파크 안에 지어주는 대신 그쪽은 향후 세트장의 유지·보수 등 사후 관리를 맡게 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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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사 지원을 위해 ‘꼼수’까지 동원하는 지자체들도 있다. 예산 대신 각종 가욋돈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일반 예산을 사용하려면 의회 동의를 거쳐야 해서 번거롭지만, 부수입으로 들어오는 돈은 제약을 덜 받기 때문이다. 가장 애용되는 게 한국수력원자력에서 발전소 주변 지역 주민들의 교육·문화·복지 향상을 위해 쓰라며 지원해주는 돈이다.
울산 울주군은 2010년 방영된 MBC 세트장을 군내 간절곶공원에 유치했다. 세트장을 지어주는 데 30억원이 들어갔다. 울주군은 한수원에서 매년 지원하는 지역협력사업비 67억원 중 절반을 뚝 떼어내 사용했다. “지역 홍보가 잘되면 관광객 유입으로 주민들의 소득이 늘어나 전반적인 주민 복지도 좋아진다”는 논리가 따라붙었다. 그러나 건물 한 채만 덜렁 있는 것을 보겠다고 세트장을 찾아오는 관광객은 드물었다. 선택의 여지 없이 세트장은 무료로 개방됐다. 결국 울주군은 투자비를 조금이라도 회수하려고 지난 7월 레스토랑 등을 운영하는 민간 업체에 세트장을 빌려줬다. 연간 1억2천만원의 임대료를 받고 3년간 빌려주는 조건이다. 그런데 세를 놓는 데 필요한 리모델링에 예산 11억원이 추가로 들었다.
지난 7월 부산시 기장군도 내년 방송 예정인 MBC (가제) 세트장 유치에 들어가는 60억원 중 일부를 한수원이 주는 돈에서 꺼내 쓰려다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고리1호기 재가동과 관련해 한수원이 주민합의금 명목으로 지원하는 돈은 이미 박물관 체육시설 등으로 사용처가 정해져 있었는데도, 드라마 세트장 건립비로 전용하려 한 것이다. 기장군은 논란이 불거지자 부산시와 기장군이 예산을 나눠 충당하는 방식으로 지원 방향을 틀었다.
방송사와 제작사들은 “제작 지원은 지자체의 선택”이라며 세트장 난립의 공동책임론에 대해 선을 긋는다. 드라마가 흥행하면 세트장이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되니 지자체가 유치에 적극적일 뿐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지자체들이 영향력 있는 방송사·제작사의 달콤한 제안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한 제작사의 PD는 “세트장 후보지에 가서 공무원들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다른 성공 사례 등 좋은 점을 부각하게 된다”며 “아직까지는 방송사나 제작사가 ‘갑’이어서 대부분 성의라도 보이려고 한다”고 말했다. 왜곡된 드라마 제작 구조 때문에 방송사·제작사가 현실적으로 지자체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있다. “드라마 제작비에서 많게는 70~80%가 스타 작가나 배우에게 돌아간다. 늘 제작비가 부족해 세트장 같은 촬영 인프라에 쓸 돈이 없다.”(15년차 방송사 PD)
애초 목적이 어떻든 대부분의 방송사와 제작사들은 이젠 지자체의 지원을 당연하게 여긴다. 게다가 요구 수준은 계속 높아진다. 전북 김제시는 지난 4월 SBS 세트장 제작에 35억원 규모의 제작 지원 약속을 철회했다. 방송사가 드라마 제작 계획을 돌연 바꿔버린 탓이다. 방영 횟수는 50부작에서 35부작으로, 총제작비는 250억원에서 165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김제시는 그만큼 지역 홍보 효과가 줄어들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제작사는 당초 계획대로 35억원의 지원을 요구했다. 김제시청 담당자의 당시 느낌이다. “대작으로 제작한다고 했다가 막판에 일반적인 드라마 제작으로 바꾸곤 돈은 그대로 달라고 했다. 기만당한 것 같았다. 제작사의 제안이 상당히 부풀려져 있다는 걸 깨닫고 사업을 취소시켰다.”
방통위 “가이드라인 만들 계획 없다”드라마 세트장 난개발을 정부가 법적으로 규제할 수단은 아직 없다. 드라마 세트장은 지자체와 제작사 쌍방 간의 자율 협약에 의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정부가 이 과정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려 한다면 지자체의 예산 편성·집행 등에 관한 고유 권한을 침해한다는 논란이 생길 수도 있다. 방송통신위원회에서도 이런 이유로 “세트장 건립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현재로선 “한국관광공사가 촬영 이후의 활용 방안을 포함한 적절한 세트장 건설 방법에 대해 지자체에 컨설팅을 해줘야 한다”는 조해진 의원의 주장 정도가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주민들 주머니를 털어 세트장을 짓는 ‘해괴한 현상’을 멈출 수 있는 주체는 현재로선 애초 공모자인 지자체와 방송사·제작사뿐이라는 얘기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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