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다시 바빠졌다. 이번엔 키프로스다. 키프로스 정부는 지난 6월25일 성명을 내어 “오늘 유로존 회원국들에 금융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했다”고 밝혔다. 그리스·아일랜드·포르투갈·스페인에 이어 유로존 17개 회원국 가운데 다섯 번째로 구제금융을 요청한 게다.
키프로스 정부는 이날 지원받을 자금의 규모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현지 언론에선 ‘60억유로 규모’란 추정치가 나왔지만, 외신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로이터통신>은 이튿날인 6월26일 현지발 기사에서 “많게는 100억유로가 수혈돼야 할 상황”이라고 전했다. 키프로스의 국내총생산(GDP)이 약 173억유로임을 고려하면, 상황의 엄중함을 어렵잖게 가늠할 수 있다.
유로존 5분의 1, 구제대상 전락
유로존 경제 규모의 0.2%에 불과한 키프로스 경제는 이웃나라인 그리스와 긴밀히 연계돼 있다. 키프로스 금융권이 나락으로 떨어진 가장 큰 원인도 그리스 금융권과 연계된 채권의 급속한 부실화다. 그리스어와 터키어를 공용어로 쓰는 키프로스 인구 10명 가운데 8명이 그리스계다. 키프로스를 포함한 ‘구제금융 5개국’의 경제 규모를 합하면, 유로존 회원국 전체 총생산의 18.2%를 점한다. 유로존 5분의 1이 ‘구제 대상’으로 전락한 게다. 어쩌다 유럽이 이 지경까지 몰렸을까?
2009년 12월10일 그리스 정부는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필리포스 사치니디스 당시 그리스 재무차관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그리스 정부의 부채가 ‘근대 역사상 최대 규모’인 3천억유로를 넘어섰다”고 밝혔다. 그해 그리스의 GDP는 약 2150억유로를 기록했다. 한 해 벌어들인 돈보다 빚이 더 많았다는 얘기다.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이 일제히 그리스 정부와 금융기관의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한 것은 당연했다. 금융시장도 격하게 반응했다.
그저 시작이었다. 유럽연합(EU)의 통계청 격인 유로스태트(EuroStat)는 한 달여 뒤인 2010년 1월13일 자료를 내어 “그리스 정부의 회계 처리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스 정부는 2009년 재정 적자가 GDP의 3.7%라고 밝혔지만, GDP의 12.7%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게다. 유로존 회원국은 채무는 GDP의 60%, 재정 적자는 GDP의 3%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가입 조건을 따라야 한다. 이미 채무가 ‘GDP의 약 113%’란 점이 드러난 터다. 재정 적자마저 기준치를 4배 이상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설’이 나오기 시작한 이유다.
이 무렵 유럽 금융시장에선 생경한 ‘신조어’가 떠돌았다. 이른바 ‘피그스’(PIGS)다. 막대한 채무를 진 포르투갈·아일랜드·그리스·스페인의 약자를 딴 조어다. ‘유럽 최대 부채국가’로 꼽혀온 이탈리아를 포함해 ‘피그스’(PIIGS)로 쓰는 이도 있었다. ‘위기감’이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금융시장이 침체의 늪으로 빨려들던 그해 4월22일, 유로스태트가 다시 나섰다. “그리스 정부의 재정 적자 규모가 (기존 발표와 달리) GDP의 12.7%가 아니라 13.6%에 이른다”는 내용의 조사보고서를 냈다. 국채 이자율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EU와 국제통화기금(IMF)이 그리스에 1100억유로 규모의 첫 번째 구제금융을 지원하기로 합의한 것은 그로부터 불과 열흘 만인 5월22일의 일이다.
유로화는 폭락했다. 경기 위축은 갈수록 심해졌다. 위기가 급속도로 번졌다. 한때 ‘셀틱 호랑이’로 불리며 호황을 구가하던 아일랜드가 그해 11월28일 850억유로의 구제금융을 지원받는 처지가 됐다.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까지 나서 부인했지만, ‘다음은 포르투갈 차례’란 전망이 시장을 짓눌렀다. 실제 그로부터 약 6개월 뒤인 2011년 5월, EU와 IMF는 780억유로 규모의 긴급 구제금융을 포르투갈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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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실체 응축한 스페인 모델
‘피그스’의 남은 두 나라에 대한 우려가 갈수록 커져, 스페인·이탈리아의 국채 이자율도 갈수록 높아졌다. 2011년 8월7일 유럽중앙은행(ECB)이 직접 나서 두 나라의 채권을 매수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시장의 불신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두 나라의 10년 만기물 국채 이자율이 그리스·아일랜드·포르투갈이 구제금융 지원을 받던 시점의 국채 이자율(7%)에 다가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3~4월 약 1천억유로의 자금이 스페인 금융권에서 빠져나갔다. 스페인 GDP의 10%에 육박하는 액수다. 금융권에서 빠져나간 돈을 메우는 건 정부의 몫이었지만, 국고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로이터통신>은 지난 6월22일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유로존 재무장관 회담에 참석한 루이스 데 귄도스 스페인 재무장관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은행권 자본 확충을 위해,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서한을 6월25일 (EU 쪽에) 공식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스페인의 구제금융 신청이 갖는 무게감을 앞선 세 나라와 견줄 수 없다. 유로존 총생산에서 그리스(2.65%)·아일랜드(1.82%)·포르투갈(1.83%)이 각각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키프로스(0.2%)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스페인은 유로존 총생산의 11.7%를 떠맡은 제4위의 경제대국이다. 구제금융의 규모 역시 비교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오는 2014년 말까지 스페인에 지원해야 하는 구제금융의 규모는 총 3500억유로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경제전문 인터넷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는 지난 5월30일 투자은행 JP모건이 내놓은 자료 내용을 따 이렇게 전했다. 유럽 각국의 재정위기 해결을 내걸고 7월 출범하는 유럽재정안정기구(ESM)가 확보해놓은 자금은 5천억유로 규모다. 스페인의 빚더미를 떠안고 나면 남는 것이 많지 않을 듯싶다.
스페인이 안고 있는 ‘쓰레기’의 정체는, 앞서 구제금융을 받은 다른 유로존 국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엘파이스> 등 현지 언론의 보도를 종합하면, 스페인 금융권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부실채권 가운데 부동산 담보대출 채권만 2700억유로로 추정된다. 스페인이 필요로 하는 구제금융 추정치와 비교하면, 위기의 뿌리는 쉽게 찾아진다.
1999년 1월 유로화 출범의 전제는 정부 부채 축소와 물가상승률 억제, 금리 인하였다. 이후 스페인 경제는 값싼 이자율에 기댄 대출 열풍이 주도해갔다. 개인과 기업이 앞다퉈 돈을 빌려다 부동산에 투자했다. 전통적으로 결혼 전까지 부모 집에서 기거하던 20대 청년층까지, 일자리를 구하자마자 ‘내 집 마련’ 대열에 합류했다.
주택 수요가 급증하자 건설 경기도 흥청이기 시작했다. 건설업체는 앞다퉈 비숙련 노동자 고용에 나섰다. 스페인 노동시장으로 이민자 유입이 급증했다. 2000~2008년 스페인 인구가 4천만 명에서 4500만 명으로 급증하는 ‘이상 현상’의 배경이다. 1999~2007년 유로존 전체 신규 일자리 창출의 3분의 1을 스페인이 떠맡았을 정도다.
이민자가 늘자 주택 수요 증가세가 더욱 가속화했다. 이는 다시 주택 가격 상승으로 연결돼 부동산 거품을 키웠다. 그럴수록 더 많은 이들이 부동산 시장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건설업체는 계속 집을 지었고, 은행은 끝없이 대출을 해줬다. 아니, 끝이 없을 수는 없었다. 거품을 키우면 언젠가는 터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부동산 급락하자 뱅크런 이어져
이제 내리막 차례다. 스페인 건설 경기 호황세는 2007년이 되자 그 정점을 찍었다. 신규 주택 수요가 주춤한데다, 공급은 최고조에 이른 시점이다. 이 무렵 스페인 전체 고용에서 건설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13%까지 치솟은 상태였다. 같은 시기 미국발 금융위기의 그림자마저 짙어지자, 주택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격이 떨어지자 수요도 줄었다. 건설 경기가 급속히 둔화돼 삽시간에 실업률이 10%까지 높아졌다. 실업이 늘어나는 속도와 비례해 실업수당 등 복지 지출이 급증했다. 늘어나는 실업자와 주저앉은 부동산 경기는 급격한 세수 축소로 이어지며 정부를 압박했다. 재정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스페인 금융권의 실핏줄은 서민층이 주로 찾는 저축은행인 ‘카하’다. 부동산 거품이 한창일 때, 스페인 전역에서 운영된 카하 지점만도 2만4천여 곳에 이른단다. ‘스페인 인구 1900명에 1개꼴로 카하 지점이 있다’는 말이 괜한 소리는 아니었다. 은행 등 제1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지 못한 이들도 카하를 통해 손쉽게 대출을 받아 부동산 투자에 나섰다. 느슨한 정부 규제는 충분한 담보를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차별적으로 대출을 늘리는 관행을 부채질했다.
지구촌이 금융위기의 한가운데로 내몰린 2009년부터 스페인 부동산 시장은 완연한 폭락세로 접어들었다. 건설업체는 줄도산했고, 악성 채권이 갈수록 쌓였다. 카하는 사실상 마비됐다. 2010년 중반 스페인 중앙은행은 카하를 통해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든 부실채권 규모가 약 1800억유로에 이를 것이란 추정치를 내놨다. 2008~2012년 스페인 부동산 가격은 평균 25%가량 폭락했다.
카하의 부실화는 스페인 금융권 전체의 신용에 타격을 입혔다. 2009년 3월 스페인 정부가 저축은행권에 첫 구제금융을 지원한 이후 금융시장의 불안감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10년 1분기에만 줄잡아 216억유로 규모의 자금이 스페인 금융권에서 빠져나갔다. ‘뱅크런’이다. 결국 2010년 12월 스페인 정부는 카하 마드리드, 방카하 등 7개 주요 저축은행을 합병하는 조처를 단행했다. 이렇게 탄생한 게 스페인 제4위 금융기관인 ‘방키아’다.
1200만여 고객을 거느린 방키아는 스페인 금융권 전체 수신고의 10%를 차지할 정도로 몸집이 커졌다. 이 업체의 부실채권을 메우려고 스페인 정부는 지난 5월 초 45억유로의 공적자금을 제공했지만, 업체 쪽은 불과 20여 일 만에 다시 190억유로의 추가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문제는 스페인 정부의 금고도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구제금융은 없다’고 큰소리치던 스페인 정부가 EU 쪽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게 된 이유다.
유로스태트가 지난 6월 초 내놓은 자료를 보면, 4월 말 현재 스페인의 공식 실업률은 24.3%에 이른다. 청년층 실업률은 50%를 오르내리고 있다. 같은 기간 EU 평균 실업률은 11%다.
“40여 년 경제성장, 부채에 기반한 것”
일본과 미국도 휘청거리고 있다. 지난 6월26일 일본 노다 요시히코 총리는 소비세율을 5%에서 10%로 올리는 소비세 법안을 의회 중의원에서 통과시켰다. 세금의 급격한 인상은 정권에는 사실상 ‘자살골’이다. 세금을 올리는 걸 달가워하는 국민은 없다. 이를 ‘돌파’해야 하는 일본 정계는 그만큼 속내가 복잡하다. 지난해 기준 일본의 정부 부채는 GDP의 239%였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나마 내놓은 세금 인상안도 사실은 ‘언 발에 오줌 누기’에 가깝다. 이번 소비세 인상으로 늘어나는 세수는 연간 신규 국채 발행액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세금을 늘려도 해마다 새로 늘어나는 빚의 반의 반만 갚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일본이 빠져든 빚의 늪은 깊다.
미국 재무부는 지난 6월12일(현지시각), 지난해 10월 시작된 2012 회계연도의 첫 8개월간 총 8445억달러(약 1천조원)의 적자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올해에도 연방정부의 적자는 1조달러를 넘어서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렇게 되면 미국 연방정부 적자는 4년 연속 1조달러를 넘게 된다. 미국 의회예산국은 미국의 재정 적자가 올해 GDP의 70%로 늘어나고, 25년 뒤에는 GDP의 2배에 이르리라는 전망을 6월 초에 내놓았다. 미국 쪽의 전망도 암울하기는 마찬가지다.
전세계 주요 경제권에서 방울방울 맺힌 거품이 터지면, 그 거품에 기대온 삶도 망가질 수밖에 없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돌아보면, 역사가 길다.
“후생(복지)을 높이려면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을 해야 한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다. 하지만 유럽과 북미 등 서구에서 실질적인 경제성장을 경험한 것은 2차 대전 이후 20여 년에 불과하다. 유럽과 북미 등 서구사회가 자랑해온 지난 40여 년의 경제성장은 부채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이제 ‘부채자본주의’는 막을 내려야 할 시점이 됐다.”
스위스 국제관계안보네트워크(ISN)는 지난 1월25일 내놓은 ‘부채자본주의 시대의 종말’이란 제목의 자료에서 볼프강 스트리에크 독일 쾰른대 교수(사회학)의 말을 따 이렇게 지적했다. 스트리에크 교수는 ‘부채자본주의’의 역사를 크게 3단계로 구분한다. 2차 대전 이후 고도성장을 거듭하던 서구 경제에 제동이 걸린 것은 1970년대 초반 ‘오일쇼크’ 이후다. ‘1단계’ 해법은 쉽게 찾아졌다. 부족한 만큼 더 많은 돈을 찍어낸 게다. 당연히 물가가 뛰었다. 겉보기엔 급여도 많아졌다. 복지 혜택도 늘어났다. 경제가 계속 성장하는 것으로 보였다. 오래갈 순 없었다.
1980년대 들어 물가 인상은 해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각국 정부는 새로운 처방을 구했다. ‘2단계’ 해법은 공공부채를 통해 정부 지출을 늘리는 쪽으로 모아졌다. 스트리에크 교수는 “겉으론 ‘작은 정부’를 외쳤지만, 로널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이 이 해법의 대표주자 격”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부 부채 확대가 ‘지속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며, 부채자본주의도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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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에 적응하며 평등 확대해야”
‘3단계’의 해법은 민간부채였다. 금융시장은 급속도로 ‘자유’를 얻었다. 싼값에 돈을 빌린 이들은 다시 흥청거렸다. 침체됐던 경제도 기지개를 켜는 듯했다. 허구에 찬 신화가 막을 내리자, 민간부채의 구멍을 메우려고 다시 정부가 나섰다. 3단계에서 2단계로, 부채자본주의의 역진 현상이 벌어진 게다. 하지만 개별 국가의 정부가 떠맡을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구촌 차원에서 ‘성장의 신화’가 막다른 길로 접어든 탓이다. 스트리에크 교수는 이렇게 강조했다.
“과거 40여 년을 지탱해온 경제정책은 이번 위기 국면에서 도움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가 시민들에게 경제적 후생을 지속적으로 제공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지면, 서구 사회의 미래는 예측이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기대치를 낮춰야 한다. 저성장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리고 경제적 평등을 확대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 늘어만 가는 소득 격차를 줄이지 않는다면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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