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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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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가 경의를 표할 이름은

전두환은 환영하지만 쿠데타 저항한 선배는 외면하는 육사…
강영훈·이한림·정병주·안종훈을 기억하는가
등록 2012-06-22 02:19 수정 2020-05-02 19:26
쿠데타에 맞섰던 군인들이 있다. 육사는 그 선배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육사 교장을 지낸 강영훈 전 국무총리, 이한림 전 1군사령관,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전 특전사령관(왼쪽부터). 한겨레 자료

쿠데타에 맞섰던 군인들이 있다. 육사는 그 선배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육사 교장을 지낸 강영훈 전 국무총리, 이한림 전 1군사령관,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전 특전사령관(왼쪽부터). 한겨레 자료

육군사관학교 교훈. 지(智), 인(仁). 용(勇). ‘지’는 사리를 판단하고 분별하는 능력으로 군인의 사명을 인식하고 무력 관리라는 부여된 기능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덕목. ‘용’은 굳센 행동으로 어떤 위험에서도 옳은 일을 실천함으로써 책임을 다하는 덕목.

군형법 5조 ‘반란죄’.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 1. 수괴: 사형.’

12·12 쿠데타 맞선 정병주 특전사령관

군인에게 명령불복종은 엄청난 범죄다. ‘명령에 죽고 산다’는 말은 군대에서 흔히 회자된다. 무력을 다루는 집단인 탓이다. 육사의 교훈과 군형법에서 군인의 사명을 강조한 이유도 거기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지난 6월8일 육군사관학교 연병장에 섰다. 다른 육사 졸업생도 있었지만 그가 유독 눈에 띄었다. 생도들이 최고의 경의인 ‘우로봐’ 경례를 했다. 다른 참석자들이 박수칠 때 전두환은 자신의 특별석 자리에서 일어나 거수경례를 했다. 육사는 전두환의 특별석에 대해 ‘고령자 예우’로 문제없다고 해명했다. 보도를 보면, 전두환은 2006년에도 생도 행사에 참석했다.

반란 수괴가 미래의 군 장교를 사열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격렬하다. 보수주의자들은 ‘별것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내심 쿠데타에 대한 호감도 감추지 않는다. 쿠데타란 무력으로 권력을 접수하는 행위다. 자연스레 군부가 민간 부문을 지배·통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군 내부의 시각에서 볼 때, 한국의 쿠데타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한국의 쿠데타는 하극상의 역사였다. 육사 후배가 육사 선배와 동기에게 총을 들이대고 그들을 감옥에 보내는 행위가 반복됐다. 쿠데타에 맞서 군인의 사명을 다했던 육사 선배들은 쉬 잊혀진다. 육사는 전두환의 방문을 환영하지만, 쿠데타에 저항했던 선배는 좀체 기리지 않는다.

전두환은 1931년생이다. 육사 11기로 1955년 졸업했다. 노태우·정호용 등 쿠데타 주역들이 육사 11기였다. 1979년 12·12 쿠데타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쿠데타에 맞섰다. 그는 1927년생으로 육사 9기다. 전두환의 육사 선배이며, 전두환이 특전사에서 근무했을 때 상관이었다. 한국전쟁 때 참전해 부상을 입었다. 1979년 12월13일 새벽 1시, 그는 쿠데타에 가담한 육사 후배 13기 최세창 준장의 공격을 받았다. 정 전 사령관은 거실 문을 걸어잠근 채 권총을 쏘며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총에 맞아 숨졌다. 김 전 소령은 육사 25기다. 정 전 사령관은 M16소총에 왼팔을 맞았다. 수술 뒤 목숨을 건진 정 전 사령관은 쿠데타를 저지른 후배들의 공직 제안을 마다했다. 야당의 정치 입문 제안도 거절했다. 그는 천생 군인이었다. 대신 술과 벗했다. 1989년 3월 행방불명된 지 130여 일 만에 주검으로 발견됐다. “하루 세끼 밥 먹고 하늘을 쳐다보다가 땅이 있으니 걷고 그리고는 잠자고… 제가 걷기를 무척 좋아해요. 울화가 치밀 때는 술병을 들고 구파발 서오릉 주변을 온종일 혼자서 터벅터벅 걷다가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자곤 했어요. 그러다가 서울 북쪽의 검문소 앞을 지날 때는 ‘노태우씨가 저곳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하는 생각이 나고….”(1987년 언론 인터뷰)



한국의 쿠데타는 하극상의 역사였다. 육사 후배가 육사 선배와 동기에게 총을 들이대고 그들을 감옥에 보내는 행위가 반복됐다. 쿠데타에 맞서 군인의 사명을 다했던 육사 선배들은 쉬 잊혀진다.

자신의 방식대로 후배에게 당한 JP

전두환에 의해 연행된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 및 계엄사령관은 1929년생으로 육사 5기였다. 기수로 차이가 많이 나지만 전두환과 나이는 2살 차이다. 육사 1기부터 10기까지는 교육 기간이 짧다. 육사 11기는 최초의 4년제 기수였다. 한국 사회의 엘리트라는 그릇된 자부심이 군인 본연의 충성심과 사명감을 지워버렸다. 정 전 총장은 신군부 쪽 군사법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을 방조한 혐의로 구속 기소돼, 군사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정 전 총장은 1997년 서울지법에서 벌어진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정 전 총장은 2002년 6월 숨졌다. 안종훈 당시 육군군수참모부장은 정승화 참모총장 연행을 반란이라고 비판했다. 안 전 참모부장도 육사 9기로 전두환의 육사 선배였다. 그는 쿠데타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뒤 경남 진해 육군대학 총장으로 좌천됐다. 육군종합학교를 나온 장태완 당시 수도경비사령관도 쿠데타에 맞섰다가 강제 예편당했다.

전두환의 하극상은 선배는 물론 스승에게도 향했다. 전두환은 1961년 5·16 쿠데타 당시 육사교관이었다. 쿠데타 지지 시위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영훈 전 국무총리가 당시 육사교장이었다. 강 전 총리는 1922년생으로 중국에서 대학을 나와, 1958년 미국 육군참모대학을 수료했다. 그는 군의 정치 개입에 반대했다. 육사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를 반대했으나 결국 막지 못했다. 강영훈 전 총리는 쿠데타 뒤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 1962년 2월 미국 뉴멕시코로 쫓겨났다.

육사 11기의 하극상은 전례를 따른 것이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1926년생으로 육사 8기다. 1961년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35살이었다. 5·16 쿠데타의 주역인 육사 5기와 육사 8기(김종필)도 육사·육군 선배들을 숙청하고 수감했다. 1980년엔 자신이 육사 후배에게 당했다. 김종필 전 총리는 1980년 5월17일 밤 육사 11기 후배들인 신군부에 의해 보안사 서빙고분실에 연행됐다. 그는 7월3일 밤에 겨우 풀려났다. 216억원의 재산도 빼앗겼다. 김 전 총리는 훗날 신군부를 ‘살모사’(殺母蛇)라고 불렀다.

5·16 반대해 쫓겨난 이한림 1군사령관

민망하게도, 5·16 쿠데타 주역들 자신이 살모사였다. 이한림 전 1군사령관은 1961년 5·16 쿠데타를 진압하려 했다. 그는 1921년생으로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나와 해방 뒤 육사의 전신인 육군영어학교 1기생으로 졸업했다. 한국전쟁 때 군을 이끌었다. 쿠데타를 진압하려 했지만 장면 당시 민주당 정권과 미국의 태도가 모호했다. 30여 시간의 고민 끝에 그는 내전을 우려해 쿠데타 진압을 포기했다. 그는 1940년 2월 만주군관학교에서 박정희와 처음 만났다. 조선인 학생은 많지 않았다. 금방 술친구가 됐다. 둘 다 공부를 잘해 함께 일본 육사에 진학했다. 그러나 이한림 전 사령관은 의회민주주의자였다. 진압을 포기한 뒤인 1961년 5월18일, 20여 년 지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연행된 뒤 마포교도소에 갇혔다. 이한림 전 사령관은 1961년 8월15일 풀려나 미국 소도시 샌타바버라로 쫓겨나 유학생 노릇을 했다. 1961년 11월 쿠데타 뒤 처음으로 이 전 사령관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야, 이 새끼야 나를 이 꼴로 만들어놓고 속이 시원하지?”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몇 년 뒤 박 전 대통령의 대사직 제안을 받아들여 주로 외국을 떠돌았다. 말년에 건설부 장관도 했다. 그는 지난 4월29일 숨졌다. 신문은 부음 단신으로 조용히 그의 죽음을 전했다. 어디에도 그의 죽음은 기록되지 않았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참고 문헌 (김충식·동아일보사), (까치), (팔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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