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7월2일 월요일. 전국 13개 대학 재학생 504명이 당시 럭키금성그룹 사옥으로 모여들었다. 국내 기업 최초로 실시되는 ‘인턴’ 지원자들이었다. 당시까지 한국에서 인턴이라는 용어는 ‘병원 수련의’로 통했는데, 서구와 같은 기업 인턴십(internship)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나흘 동안 기업 소개를 받고 공장 견학 등을 한 뒤 출신 지역별로 본사·공장·연구소에 배치됐다. 한 달 동안 중견 사원들로부터 업무 지도를 받으며 실무 경험을 쌓았다고 하지만, 하는 업무는 기존 ‘대학생 아르바이트’와 거의 동일했다고 한다. 다른 점은 당사자가 졸업 뒤 취업을 원할 경우 인턴사원 근무 성적과 적성 등을 따져 우선 채용하고 인턴 기간만큼 수습 기간을 줄여줬다는 것이다. 당시 럭키금성그룹은 한 달짜리 인턴사원에게 월급 20만원을 지급했다. 점심과 숙소는 무료로 제공됐다.
인턴 경력 발판 삼아 다른 인턴 구하는
2011년 박인수(29·가명)씨는 1년간 외국계 회사 재경팀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회사였는데 인턴 제안이 들어왔다. 회사 쪽은 ‘정규직 전환 보장은 못해준다’고 했지만 박씨는 승낙했다. “정규직으로 전환될 거라는 희망을 조금은 품을 수밖에 없었다.” 외국계 회사 인턴 경험이 다른 회사 취업을 위한 ‘스펙’에 한 줄이라도 도움이 될 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인턴이 됐지만 하는 일은 아르바이트할 때와 같았다. 서류 스캐닝과 엑셀·파워포인트를 활용해 문서를 작성하는 단순하고 기계적인 일이 주어졌다. 반면 근무시간 등 노동강도는 정규직보다 덜하지 않았다. 월급으로 110만원을 받았다. 강씨는 현재 다른 회사에서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회사 조직문화라는 것을 경험해봤다. 그것 말고는 이력서에 들어간 인턴 경험 한 줄이 취업에 결정적 영향을 주지는 않은 것 같다”고 했다.
기업들이 인턴이라는 ‘신분’을 활용하기 시작한 지 30년이 돼간다. 한국 경제의 부침에 따라 인턴도 따라 출렁였다. 기업들의 인턴 채용 규모와 방식, 정규직 전환 조건과 비율 등은 수시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인턴 제도가 기업들이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주요 창구로, 인턴 경험이 채용의 중요 심사 기준으로 자리잡았다는 데 이견은 없다. 한국고용정보원에서 2010년에 인턴을 정규직으로 채용한 기업들을 분석했다. 매출액 기준 상위 100대 기업의 인턴 정규직 전환 비율이 57.6%, 직원 500명 이상 사업장의 전환 비율은 56.8%였다. 조사 대상 사업장 전체의 인턴 정규직 전환 비율은 68.5%였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작성한 지난해 하반기 주요 기업 채용전망 보고서를 보면, 매출 상위 100대 기업의 81.1%가 인턴 채용 계획을 세웠다. 올해도 어김없이 상반기·하계 인턴 공고가 쏟아지고 있다. 경쟁이 치열하다. 취업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는 취업 합격 후기만큼이나 인턴 합격 후기가 ‘감격스럽게’ 올라온다. 구직 경쟁에 앞서 인턴 합격 경쟁에 진이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턴 경력을 발판으로 취업이 아닌 또 다른 인턴 자리를 구하는 ‘인턴 돌려막기’도 흔하다.
그러나 인턴 경험이 주는 ‘만족도’는 구직자들의 피나는 노력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9월 취업 포털 사이트 인크루트를 방문한 20대 구직자 65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인턴 제도의 단점으로 41.6%(274명)가 ‘저임금 노동착취’를 들었다. 2~6개월 정도 안정적 출근이 가능한 ‘질 좋은 아르바이트’로 인턴사원을 바라보는 기업이 많다는 얘기다. 최근 교보증권 인턴사원들이 주식거래 실적을 높이려고 가족 등 주변 사람들의 돈까지 끌어다 주식거래를 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됐다. 정규직 채용 평가에 주식거래 실적이 포함된 탓이다. 이렇게 ‘착취’를 당하고도 정규직 채용에서 떨어지면 구직자들은 좌절한다. ‘불합격했을 경우 받게 되는 물리적·심리적 피해가 너무 크다’는 응답이 25.5%(168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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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청년인턴제’, ‘인턴 낭인’ 양산
정부가 청년 실업을 줄이겠다며 분기별로 공공기관 채용 실적까지 점검하는 ‘청년인턴제’ 역시 ‘인턴 낭인’을 양산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대학원을 마치고 한 연구원에서 8개월 동안 인턴으로 근무한 김은영(27·가명)씨는 현재 다른 연구원에서 1년짜리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방치될까봐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정부 정책이니 뽑아는 놨지만, 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알아서 하라는 식이 많다는 것이다. 실무 경험 쌓기에 별 도움이 안 된다. ‘손가락 노동’ ‘눈 빠지는 노동’과 같은 단순·반복 업무를 시키는 것도 문제다. 한국고용정보원의 2012년 상반기 조사를 보면, 청년인턴제로 들어온 사원에게 ‘단순 업무 보조’를 시키는 경우가 52%(직원 1천 명 이상 사업장)에 달했다.
기업들도 어려움은 있다. 인턴들은 실무 능력이 떨어지고 업무 결과에 대한 책임도 지우기 어렵다. 10대 그룹의 부장인 박아무개씨는 인턴사원을 받은 경험이 있다. “사전 연수를 했더라도 사실 비중 있는 업무를 주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기존에 우리가 하던 일이 아니라 평소 우리가 바빠서 못했던 일들에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하는 프로젝트 과제를 줬다.” 나중에 이 인턴들이 낸 일부 아이디어가 채택됐고 이들은 정규직으로 채용됐다고 한다.
미국 등의 인턴은 직무교육 위주의 ‘현장실습’이 목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국의 ‘채용 목적’ 인턴 제도가 직무교육 면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발간된 책 은, 미국 사회 역시 디즈니랜드부터 워싱턴 정가까지 인턴들의 ‘고혈’을 빨아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앞서 인용한 한국의 인턴 정규직 전환 비율도 거품이 끼었을 가능성이 크다. 정규직 전환 뒤, 실제 그 고용이 얼마나 유지되는지 제대로 된 조사가 없기 때문이다.
구직자와 구인자가 일정 기간 함께하며 서로 접점을 찾아가는 인턴 제도의 장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청년 취업을 지원하는 ‘함께일하는재단’ 김창주 팀장은 “‘경력 형성’이 정규직 채용에는 중요한데, 경력 형성은 단순한 이력이나 커리어와는 다르다”고 했다. 이력서에 나열할 경력이 아니라 그 경력이 얼마나 해당 직무와 관련됐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김 팀장은 “기업 인사담당자들이 말하는 ‘미스매치’가 바로 직무와 무관한 인턴 경험이다. 그래서 요즘은 대학에서도 과거의 취업지원센터를 넘어서는 ‘경력개발센터’를 운영하는 곳이 늘고 있다”고 했다.
정부가 ‘좋은 일자리’ 늘려야
그렇더라도, 구직자들이 눌러앉을 수 있는 ‘좋은 일자리’가 늘지 않는다면 인턴 자리를 찾아 떠도는 인턴 낭인의 출현을 막을 수 없다. 허튼 곳에 돈 쓰지 말라는 얘기다. 정부에 하는 말이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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