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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반대자’를 기다리며

MB 말기 대법관 4명, 헌법재판관 5명 교체돼 전체 23명 최고 법관 가운데 9명 갈려…
사회적 약자와 시민의 눈으로 사회 갈등과 쟁점 최종 판단할 최고 법관을 기대한다
등록 2012-05-16 20:34 수정 2020-05-03 04:26
서울 서초동 대법원 건물.

서울 서초동 대법원 건물.

“소수의 편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 소수자가 되지 않고서는 안 되는 것 같다. 대법원에 있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바로 스스로 소수자가 되는 것이었다.”

어느 퇴임 대법관의 변이다. 우리 대법원은 여전히 ‘주류’의 공간이다. 그 안에서 반대의견·소수의견으로 남는다는 것은 때론 ‘싸움’을, ‘고립’을 의미한다. 그래서 ‘소수’가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눈물 나게 고맙다. “다른 대법관들이 공격해올 때 한 명이라도 거들어주면 정말로 상황이 달라진다. ‘얘기라도 한번 들어보자’며 판을 깔아주는 효과가 크다.”

미국 연방대법원에는‘위대한 반대자’(the great dissenter)들의 전통이 있다. 그러나 미국 10대 대법원장인 윌리엄 태프트 같은 이는 “소수의견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법원의 권위를 약화시킬 뿐”이라고도 했다. ‘반대의견 없는 만장일치’가 국민의 신뢰를 얻고 행정·입법부에 맞서는 사법부의 힘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덮어놓고 만장일치를 요구하기에는 대법관 구성이 너무 그렇다.

<font color="#877015">신영철은 남았고 조용환은 낙마했다</font>

우리나라 최고 법관 자리는 모두 23개다.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14명, 헌법재판소장을 포함한 헌법재판관 9명. 오는 7월과 9월, 23명 가운데 무려 9명이 교체된다. 대법관은 4명이 한꺼번에 바뀐다. 박일환·김능환·전수안·안대희 대법관이 6년 임기를 마치고 7월10일 물러난다. 헌법재판관도 9월14일 김종대·민형기·이동흡·목영준 재판관이 임기 6년을 끝내고 퇴임한다. 조대현 전 재판관 자리가 10개월째 채워지지 않고 비어 있으니 모두 5명의 재판관이 새로 임명된다.

최고 법관 한 자리의 ‘의미’는 생각 이상으로 크고 무겁다. 최종심인 대법원은 3개 소부로 나뉜다. 1개 소부에 대법관 4명이 배정된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맡는 대법관은 소부 판결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대법원장은 대법관 전원(법원행정처장 제외)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 판결에만 관여한다. 대법관 4명이 교체된다는 것은 사실상 1개 소부가 새로 구성된다는 얘기다. 과반으로 결정이 갈리는 전원합의체 사건 심리에서도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기에 충분한 수다.

헌법 해석의 최종 판단기관인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은 재판관 9명 가운데 6명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다. 기존에 헌재가 합헌이라고 판단했던 쟁점도, 헌법재판관 5명이 교체된 뒤에는 위헌으로 돌아설 수도 있다는 얘기다. 권한쟁의심판의 경우에는 과반인 재판관 5명 이상의 동의만 있으면 된다. 헌법재판관 5명은 그런 의미의 숫자다.

정치·경제·노동·복지·교육·환경 등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가치와 방향을 결정하게 될 주요 쟁점과 갈등의 최종적 판단이 대법관·헌법재판관 손에 달려 있다. ‘보수 엘리트 남성 법조인’이라는 비슷한 이력과 경험을 가진 우리 사회 ‘1%’에게만 대법원과 헌재를 맡길 수 없는 이유다. 사회 양극화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계층·계급 사이에 충돌하는 가치와 이해관계를 해석하고 조정하고 적절히 반영하기 위한 ‘대법관·헌법재판관 구성의 다양화’는 필수라는 얘기다. 그런데 최고 법관 대규모 교체를 앞둔 사법부 안팎에서 ‘안정 속 다양화’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이상한 구호가 슬로건처럼 되풀이되고 있다. 방점은 다양화보다는 안정 쪽에 세게 찍혔다.

‘신영철은 남았고 조용환은 낙마했다.’ 이명박 정부, 18대 국회 때의 사법부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신영철 대법관은 임명 직후인 2009년 2월, 서울중앙지법원장 시절 촛불사건 재판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법원 내부는 물론 야당과 시민사회로부터 사퇴 요구를 받았지만 대법관직을 지켰다. 야당이 조대현 전 헌법재판관 후임으로 추천한 조용환 후보자는 2011년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천안함 사건에 대한 ‘양심 고백’을 강요하는 의원들의 집요한 이념 공세를 받았다. 새누리당은 지난 2월 기어이 조 후보자 선출안을 부결했다. 입맛에 맞는 이는 끝까지 지켜주고, 눈 밖에 난 이는 어떻게든 주저앉히겠다는 심사다. 최고 법관을 보수 성향의 비슷한 이들로만 꽉꽉 채워넣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 법률 해석을 다루는 헌법재판관 9명은 개개 사건을 다루는 대법관들과는 또 다른 형태의 권력이다.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 법률 해석을 다루는 헌법재판관 9명은 개개 사건을 다루는 대법관들과는 또 다른 형태의 권력이다.

<font color="#877015">대법관 전원 MB 임명한 인물로 </font>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현 양승태 대법원장과 대법관 9명을 임명했다(차한성 법원행정처장은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말에 임명제청이 들어와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 나머지 4명까지 추가로 임명하게 되면 대법관 14자리가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이들로 모두 채워진다. 헌법재판관은 대통령·대법원장·국회가 각각 3명씩 임명·선출한다. 이번에 새로 교체되는 5명 가운데 3명은 국회가 선출하고, 2명은 대법원장이 지명한다. 내년 1월에는 대통령한테 임명 권한이 있는 헌법재판소장이 바뀐다.

2003년 8월12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회의실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대법관제청자문위원회 당연직 위원으로 참여한 강금실 당시 법무부 장관과 박재승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이 “대법원이 기존 관행대로 대법관을 제청하려 한다”며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다. 참여정부 출범 뒤 첫 대법관 임명 자문을 위한 자리였다. 당시 시민사회단체 등은 사법 개혁 의지가 담긴 대법관 제청을 요구했고, 청와대 역시 이에 호응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러나 당시 최종영 대법원장의 의중이 실린 대법관 후보군들은 기존 관행을 그대로 답습한 인사들로 채워졌다. 144명에 이르는 판사들이 대법관 후보 추천에 반발하는 서명에 참여했다. 서울지법 부장판사였던 박시환 전 대법관이 사표를 던진 것도 이때였다. ‘사법 파동’ 가능성이 커지자 최종영 대법원장은 “2004년부터는 여러 직역에서 추천받은 후보자들이 폭넓게 심사를 받도록 개선하고, 대법원 구성에 다양성이 반영되도록 후보자를 선정하겠다”고 물러섰다.

2004년 8월 김영란 대전고법 부장판사가 여성으로는 처음 대법관에 임명됐다. 사법연수원 기수를 10기수나 뛰어넘는 파격이었다. 이듬해 11월에는 진보 성향의 박시환 대법관, 노동법 전문으로 비서울대(원광대) 출신인 김지형 대법관이 임명됐다. 2006년에도 이런 흐름은 이어져 그해 7월 중도 개혁 성향의 이홍훈 대법관, 여성이자 개혁 성향의 전수안 대법관이 새로 임명됐다. 진보·개혁 성향 대법관 5명을 이르는 말로 굳어진 ‘독수리 5형제’가 대법원에 둥지를 틀었다. ‘보수 8 : 진보 5’라는, 여전히 한쪽으로 기울기는 했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소수집단’이 응집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그런 독수리 5형제도 임기를 마치고 차례대로 둥지를 떠났다. 마지막 남은 전수안 대법관마저 7월에 떠난다. 법조인들 사이에서는 “독수리 5형제가 모두 떠나면 대법원은 누가 지키냐” “‘새끼 독수리’ 하나 안 남기고 물갈이됐다”는 씁쓸한 농담도 나온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들이 물러난 자리를 채운 이들의 면면이 ‘대법관 구성 다양화’라는 시대적 요구를 충족하기에 부족하거나, 오히려 역행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font color="#877015"> ‘안정 속 다양화’라는 주장</font>

‘안정 속 다양화’라는 속내는 이런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퇴임하는 대법관 4명의 후임으로 거론되는 이들을 보면 모두 현직 고위 법관이다. 사법연수원 기수와 연공서열을 착실히 따랐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강조하는 평생법관제, 여기에 대법관·법관 정년이 5년씩 늘어난 점 등을 고려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연륜 있는 법관들이 중용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서울 지역의 한 부장판사는 “대법관 4명은 ‘검찰+비서울대+지방법관+대법원장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구성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검찰 출신인 안대희 대법관 후임으로 현직 검찰 고위직들이 거론된다. 또 대법관 14명 가운데 박보영 대법관만 비서울대(한양대)라는 점을 고려해 비서울대 출신이 추가로 대법관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지방에서만 법관 생활을 한 ‘향판’ 출신 대법관도 2004년 조무제 대법관 퇴임 이후 ‘추천’은 여러 번 됐지만 ‘낙점’은 받지 못했다. 이번에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이번 정부에서 임명된 양승태 대법원장, 차한성·양창수·신영철·민일영·이인복·이상훈·박병대·김용덕 대법관은 전원 서울대 법대 출신의 남성이다. 지난해 말 임명된 박보영 대법관만 여성에 비서울대였다. 판사 생활을 하다가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있던 양창수 대법관, 마찬가지로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로 활동한 박보영 대법관을 제외하고 모두 현직 고위 법관 출신이다.

법원 관계자는 “양승태 대법원장이 대법관 구성 다양화라는 모양새에는 굉장히 신경 쓰고 있다”고 했다. 여성·비서울대·검찰·향판. 다양하기는 하다. 그런데, 애초 ‘대법관 구성 다양화’라는 취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는 “기계적·형식적 다양화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비서울대를 나와도 성향이 다들 비슷하다면 다양성을 확보한 게 아니다. 실제적인 다양화를 위해서는 법관 이외의 다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적절한 인물이 없을 수 있다. 매번 파격을 요구할 수도 없다. 하지만 사법부가 신뢰를 얻으려면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은 갖춰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는 헌법재판소에도 그대로 요구된다. 헌법학계 관계자는 “과거처럼 대법관 자리에 오르지 못한 고위 법관들이 헌법재판관으로 오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국회가 재판관 3명을 선출하는 시기인 만큼 여야 나눠먹기식, 자기 사람 챙기기로 가지 말고 과감하게 학계나 재야에서 다양성과 전문성을 동시에 갖춘 이들을 추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조대현 전 재판관은 민주당 추천, 이동흡 재판관은 옛 한나라당 추천, 목영준 재판관은 여·야 공동 추천으로 재판관이 됐다.

<font color="#877015">최고 법관이라는 ‘정치적 자리’</font>

대법원장은 헌법에 따라 대법관 13명 전원과 헌법재판관 3명 등 모두 16명에 달하는 최고 법관 제청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대법원장이 내부 인사 명령 내듯 대법관·재판관을 임명해왔다’는 비판이 있어왔다. 대법원장의 이런 막강한 권한을 일부 ‘제한’하려는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가 지난해 법제화됐다. 문제는 추천위 구성에 있다. 당연직 위원에 현직 대법관과 법원행정처장, 법무부 장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법학전문대학원협의회 이사장이 포함됐다. 하태훈 교수는 “추천위원들 구성부터 실질적으로 다양화해야 논의도 다양하게 이뤄질 수 있다. 그런데 추천위가 주로 법관 출신들로 구성되다 보니 시각이 한정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당연직 위원인 정종섭 법학전문대학원협의회 이사장(서울대)은 지난 4월 총선에서 새누리당 공직후보자추천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공정성 시비마저 일고 있다. 법조계의 한 인사는 “법제화 전부터 대법관후보추천위는 사실상 대법원장의 거수기 역할을 해오지 않았느냐”고 혹평했다.

6월 초 4명의 새 대법관이 임명 제청되면 6월 말~7월 초 국회 인사청문회가 열리게 된다. 새 헌법재판관 5명도 8~9월께 인사청문을 하게 된다(국회 선출 3명은 인사청문특별위원회 주관, 대법원장 지명 2명은 법제사법위원회 주관). 양승태 대법원장은 새 대법관을 임명 제청하며 동시에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는 헌법재판관 2명도 함께 지명할 것으로 보인다. 법원 인사를 연거푸 하기 어렵다는 이유도 있지만, 대법관 후보로 경합하다가 ‘밀렸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 차원이다.

5월30일 개원하는 19대 국회는 12월 대선을 앞두고 있다. 워낙 인사청문 대상이 많은데다 당내 대선 후보 선출 등 어지러운 정치 일정 속에 대법관·헌법재판관은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 있다. 법조계의 또 다른 인사는 “새로 시작하는 국회인데다 대선 국면이라 인사청문회가 얼렁뚱땅 넘어갈 수도 있다. 이번 정권에서 한자리 차지하려는 사람들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물밑에서 움직임이 대단하다고 한다. 이럴 때일수록 국회가 잘해줘야 하는데 걱정이 크다”고 했다.

조용환 후보자의 낙마에서 보듯이 여야가 인사청문 과정에서 날선 대립을 이어갈 수도 있다. 대선을 앞두고 있다는 점이 오히려 진보와 보수 사이에 불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최고 법관 구성 다양화의 불씨를 살려갈 가능성이 있다. 위장전입 등 이명박 정부 고위직들의 고질병도 이번에는 그 고리를 끊을지 관심사다.

헌법학계 관계자는 “최고 법관이라는 자리는 ‘정치적 자리’라는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정치적으로 뽑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진보·보수 균형, 좌우 날개의 균형을 잡아줘야 한다. 진보 진영이 정권을 잡더라도 이런 좌우 균형의 전통을 유지해줘야 한다. 그것이 사법부 독립을 해치지 않는 길이다. 보수는 보수만, 진보는 진보만 뽑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법 독립을 해치는 길이다.”

<font color="#877015"> ‘코드 인사’ VS 보수-진보의 균형</font>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기간에도 최고 법관들이 무더기로 바뀌었다.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14명 가운데 13명, 헌법재판관 9명이 모두 교체됐다. ‘코드 인사’라는 비판이 나왔지만 노 전 대통령 시기에는 독수리 5형제가 출동했고, 이명박 대통령 때는 신영철 대법관이 출동했다. 그런 차이다. 이번에는 고쳐보자.

김남일 기자 A href="mailto:namfic@hani.co.kr">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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