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치동의 주상복합 아파트에 사는 박규식(49·가명)씨는 호텔방에서 전화를 받았다. 제조·무역업을 하는 박씨는 외국 출장 중이다. 강남에서 산 지는 14년이 됐다. 아내도 아파트의 같은 동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박씨도 아이 친구들 아빠들과 자주 어울린다. 하지만 박씨는 “가능하면 정치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화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강남에 살고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면 당연히 자신들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간주한다.” 최근에는 ‘노골적인 경험’도 했다. “어느 한 사람이 ‘박근혜 위원장을 만났는데 너무 좋더라. 사람이 있어 보인다’, 이런 말을 하는데 별다른 반박이 안 나오더라. 내가 반박한다고 해서 설득될 사람들도 아니다. 괜히 말 꺼냈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수 있으니 다른 주제로 얘기를 돌렸다.”
사람과는 다른 강남이라는 공간
박씨와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사람은 강남 도곡동의 고급 아파트에 사는 친구 정도다. 그 친구도 박씨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강남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워낙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자기 밥그릇만 건드리지 않으면 남에게 피해를 주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그냥 이대로 가는 거다.” 박씨는 ‘강남좌파’ 혹은 ‘강남진보’로 분류되지만 고립된 좌파, 고립된 진보다.
강남에서 ‘다른 생각’ ‘다른 행동’ 하기를 모색하는 이들도 있다. 전직 교사 이기숙(가명)씨의 남편은 변호사다. 이씨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가 벌어졌을 때 지역 촛불시민 모임 ‘강남 촛불’에서 활동했다. 강북에서 살다가 2004년 아이들 교육 때문에 서초동으로 이사 갔다. “문화적 충격이 컸다. 참여정부 얘기가 나오면 ‘종북’ ‘빨갱이’ 같은 무서운 말을 내뱉더라. 사람들은 아이 아빠가 변호사니까 당연히 나도 ‘한당’(한나라당)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얘기를 하다 보면 ‘갭’이 너무 크다. 부녀회 한 번 나갔다가 질려버렸다.”
강남 사람인 이씨가 보는 ‘원조’ 강남 사람들은 이렇다. “의식수준으로 보면 새누리당 중심 지역이다. 물질에 대한 재테크에 능한 사람들이다. 물질에 대한 경쟁과 다툼이 심하다. 그런 점에서 살기 빡빡하다.” 반면 강남이라는 공간은 조금 다르다. “물가는 당연히 비싸지만 교통이 편하다. 놀 공간이 많다. 아이들 왕따도 별로 없다. 치안 걱정도 덜하다. 끼리끼리 살기에는 강남이 편하다.” 강남 사람들과 생각이 다르지만, 강남에 계속 사는 이유다.
그의 ‘암약’은 결국 들통났다. “표시 안 내려고 했는데 결국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알려졌다. 지금은 부녀회도 나가지 않는다.” 이씨는 강남의 변화는 내부 동력으로는 불가능하며, 외부에서 강남으로 유입되는 이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했다. “그들의 성향은 고쳐지지 않는다. 투표 성향도 절대로 바뀌지 않는 사람들이다. 자녀들도 똑같다. 하지만 외부에서 유입된, 강남에서 살지만 자기 집은 없고, 고학력에 좋은 직장에 다니는 1인 가구들의 투표 성향은 확실히 바뀌었다.”
강남, ‘무균 배양실’의 공간
고립의 전선을 강남 내부에서 스스로 뚫어보려는 이도 있다. 50대 후반인 김이천(가명)씨는 30년 가까이 강남 지역에서 살았다. 송파구에서 10년, 강남구에서 7년을 살았고 현재는 서초구에서 10년 가까이 살고 있다. 이른바 ‘강남 3구’를 모두 경험했다. 갤러리를 운영하는 김씨는 녹색당 입당을 고민하고 있다. 그는 격월간으로 발행되는 애독자다. “올바른 먹을거리를 고민하다가 을 읽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매체들이 토해내는 그런 기사하고는 완전 다른 각도에서, 세상 어느 매체에도 없는 얘기를 만나게 됐다.” 김씨는 ‘강남좌파’라는 말은 옳지 않은 용어라고 했다. “나는 생각은 진보적이지만 정책에 따라서는 우파가 될 수도 있고, 좌파가 될 수도 있다. 정책이나 팩트, 사안에 따라 좌우를 나눠야지 지역으로 좌우를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무상급식을 ‘당연히’ 찬성한다. “아이들이 눈칫밥을 먹어서는 안 된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손자도, 이 회장이 세금을 냈으니 무상으로 먹을 권리가 있다.” 복지정책에 대해서는 “너무 진보적으로만 가서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복지에는 돈이 든다. 오래가지 못할 복지는 안 하는 게 낫다. 나는 점진적인 복지에 가깝다.” 그러면서도 ‘기본소득’ 같은 복지정책은 당장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패러다임을 바꾸는 복지에서는 급진적일 필요가 있다.”
말이 잘 안 통하고, 말 꺼내기가 조심스러운 것은 김씨도 마찬가지였다. 김씨는 을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는데, ‘이 책은 나와는 안 맞는 것 같다’ ‘세상하고 안 맞는 책’이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한단다. 그래서 그는 아예 독자모임을 만들었다. “코드가 같으니까 어떤 사안이든 편하게 말을 꺼낼 수 있어 좋다.” 김씨는 희망제작소에서 자원봉사 활동도 하고 있다.
김씨의 아이들은 어떨까. “아이들과는 의견 대립이 있다”고 했다. “강남에서 태어나 강남에서만 성장하고 강남에서 학교를 나와서 그런지 내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강남이라는 공간은 이질적인 것을 거부하는, ‘무균 배양실’이 작동하는 간단치 않은 공간이라는 얘기다.
“‘반미 하면서 자식들 미국 유학은 왜 보내느냐’는 질문이 한 단어로 압축된 것이 바로 ‘강남좌파’다. 강남좌파는 사실 많은 수식어가 생략된 단어다. 이 단어는 ‘반미 하면서 자식들 미국 유학 보내는, 겉 다르고 속 다른, 강남 사는 좌파’의 준말이니까. 강남좌파는 애초부터 달동네 우파를 염두에 두고 이들을 자극하기 위해 동원된 표현이다. 좌파는 호화로운 삶을 살면서 겉으로만 서민을 걱정하는 위선자이며 서민의 어려움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파라는 주장을 ‘강남좌파’라는 레토릭에 집약한 것이다.”(황승현, ) 그렇더라도 많은 이들이 ‘강남좌파’ ‘강남진보’라는 용어 아래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삶의 방향을 규정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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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간 제비가 몰고 올 소식은
‘빠리의 택시운전사 강남 좌파를 만나다’. 지난 2월 말 진보신당 서울 강남서초 당원협의회가 내건 홍보 문구다. 2월29일 지하철 2호선 강남역 근처,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가 강남서초 당협 소속 당원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 4·11 총선, ‘강남’ 갔던 제비는 무슨 소식을 물고 돌아올까.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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