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정녕 마을이 있을까 싶었다. 입구는 길 아래 계곡을 포함해도 폭이 채 30m가 안 됐다. 가늘게 이어진 소롯길을 따라 조심조심 차를 몰았다. 몇 차례 굽이를 돌자 시야가 트이더니 돌연 분지 형태의 개활지가 펼쳐진다. 전체를 조감하면 동쪽이 트이고 삼면이 산자락에 둘러싸인 부채 형세로, 초입의 굴곡 때문에 바깥에선 내부가 안 보인다. 이 이곳을 전쟁이 나도 화가 미치지 않는 10곳(십승지) 중 하나로 꼽은 것도 이런 천혜의 지형 때문이다.
땅과 집과 농사 교육이 있는 공동체
“입구는 좁은데, 안쪽은 넓지요? 지세가 여성의 자궁을 닮은 이런 골짜기엔 통상 ‘안골’이란 이름이 붙는데, 이 동네에선 ‘샘골’이라 부르더군요.” 동행한 두레배움터 김석균 교장의 말이다. 지명과 관련해선 샘에서 물이 솟듯 사시사철 골짜기가 마르지 않는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게 정설이다. 서쪽 봉우리인 활인봉 아래엔 약효가 뛰어난 샘이 있어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한국전쟁기를 전후해 샘골엔 150가구가 넘는 집들이 있었다. 주민 수는 1천 명에 육박했는데, 대부분 정감사상이 유행하던 황해도 출신의 피란민들이었다. 이들은 샘골을 둘러싼 태화산 자락에서 약초를 캐거나 사찰인 마곡사 소유의 전답을 부쳐 생계를 이었다. 하지만 1960~80년대를 거치며 하나둘 마을을 등져 지금은 10가구 정도만 남아 있다. 그 사이 10만여 평에 달하던 마곡사 소유 농지들은 소롯길 주변을 제외하곤 잡목 숲으로 변했다.
“지금은 농사를 짓지 않는 휴경지가 6만~7만 평쯤 됩니다. 볕이 잘 들고 경사가 완만한 곳을 골라 밭을 일구고 응달진 산자락에 약초단지를 만들면 충분히 자립 생활이 가능해요. 우선은 10가구 정도로 출발해 점차 규모를 늘려나가야죠.”
김 교장이 샘골에 들어설 소농 공동체의 밑그림을 설명한다. 그가 소속된 두레배움터는 지난 1월3일 마곡사, 전국귀농운동본부와 함께 ‘십승지 소농 마을공동체’ 건설을 위한 3자 협약을 체결했다. 첫 단추를 꿴 것은 2009년 마곡사 주지로 부임한 원혜(58) 스님이었다. 사찰이 가진 주변 땅을 쓸모없이 놀리느니, 귀농인들에게 내놓아 농사를 짓게 하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소박한 발상이었다. 스님은 서울 봉은사 주지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박승옥 전 시민발전 대표에게 의견을 구했다. 두 사람은 마곡사 인근에 생태적인 공동체 마을을 꾸리기로 의기투합했다.
귀농인들이 살 집을 마련하려고 1단계로 마곡사가 운영하던 옛 공민학교 터에 흙집 시공과 교육을 병행하는 두레배움터를 열기로 하고 발기인대회를 가졌다. 지난해 4월이었다. 흙집 건축가인 김석균씨가 교장을 맡았다. 하지만 농사지을 땅과 살 집만 있다고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귀농인들의 안착을 위해선 지속적인 농사 교육 지원이 절실했다. 전문 교육기관인 귀농운동본부 쪽에도 참여 의사를 타진했다. 즉각 반응이 왔다.
지난해 말 세 단체 관계자들이 모여 실무 협의를 시작했다. 공동체 운영의 전반적인 틀이 마련됐다. 귀농 희망자들로 ‘마곡사람들’이란 협동조합을 꾸린 뒤 마곡사는 조합에 샘골에 있는 농지와 임야의 경작권을 내놓고, 두레배움터는 조합원 출자금으로 공동 농가주택을 짓고, 귀농본부는 현지에 소농학교를 운영하며 농사기술을 보급하는 3자 협업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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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양 않고 경작권 사실상 무상 제공
토지 이용료는 있지만, 규모가 적어 사실상 무상이나 마찬가지다. 거둬들인 작물 일부를 ‘이번에 수확한 건데, 맛이나 조금 보세요’ 하고 나누는 정도라고 김 교장은 덧붙인다. 임대 기간에도 제한이 없다. 그러니 조합원들 출자금은 집을 짓는 데 소요되는 건축비가 전부다. 출자금은 조합을 탈퇴할 때 환불받는다. 말 그대로 ‘전세금’ 개념이다.
전국에 생태공동체, 생산자공동체가 수십 곳에 달하지만, 마곡사에서 시도되는 방식을 취한 곳은 지금껏 없었다. 전북 남원의 실상사 공동체는 사찰 소유지였던 땅을 귀농 경작지로 활용한다는 점에선 유사하지만, 토지 이용 방식이 다르다. 실상사는 사찰이 소유한 땅을 귀농자들에게 유상으로 분양하는 형태인 데 반해 , 마곡사는 토지 소유권을 사찰이 가진 상태에서 귀농자 조합에 토지 경작권을 줄 뿐이다.
“귀농자에게 가장 큰 어려움이 농사지을 땅과 집을 구하는 문제입니다. 귀농 열풍을 타고 농촌 땅값이 턱없이 올라 농지 한 평의 평균 가격이 5만원을 넘었어요. 그 돈 주고는 도저히 농사 못 짓습니다. 우리는 이 장벽을 완전히 없애버린 셈이죠.” 박승옥 전 대표의 설명이다.
실제 실상사 공동체가 있는 전북 남원시 산내면 일대는 10여 년 전 평당 2만원에 불과하던 농지 가격이 4~5배나 뛰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에 귀농해 정착하려면 최소 1억5천만원은 갖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돈다. 귀농자들이 개별적으로 토지를 구매하는 과정에서 경쟁이 과열돼 나타난 부작용이다. 박 전 대표는 “경작자가 굳이 땅을 소유하고 농사를 지을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집은 생태순환형 흙집으로 지어 에너지 낭비를 최대한 줄이려고 한다. 대소변과 음식물 찌꺼기가 발효할 때 나오는 메탄가스를 난방과 취사에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화장실도 수세식으로 만들지 않을 작정이다. 가스를 생산하고 나온 부산물은 천연비료로 쓴다.
공간 이용의 효율성을 높이고 에너지 비용을 줄이기 위해 1·2층 규모로 3~5가구가 함께 사는 공동주택도 구상하고 있다. 물론 개인 생활은 철저하게 보장한다. 김 교장은 “추울 때 몸을 맞대고 붙어 있으면 혼자 떨어져 있는 것보다 훨씬 덜 춥다”며 “공동주택은 건축비를 절감하고 토지·에너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 공동 생활을 강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샘골 어르신들에게 얻는 농사의 지혜
고민은 있다. 귀농인 공동체가 겪기 쉬운 토착민과의 갈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다. 현재 샘골에 살고 있는 30여 명의 주민 대부분은 60대 이상 고령자들이다. 젊은 외지인들이 갑자기 몰려와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하다보면, 자칫 심각한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런 점 등을 고려해 초기엔 현지인들과 정서적 거리감을 줄이는 데 주력할 방침이다. 김 교장은 이것이 갈등을 피하려는 방편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마을 사람들의 경험과 지혜를 전수받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게 소농입니다. 대농은 기계와 하우스, 농약·비료에 많이 의존하니 현지의 기후와 생육 조건에 까다롭게 맞출 필요가 크지 않아요. 그런데 소규모 손농사는 다릅니다. 시골 할머니들이 그래요. ‘어, 앞산 너럭바위 위에 뭉게구름 걸렸네? 30분 뒤에 비 오니까 나락 걷어라.’ 이건 그 지역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어오며 터득한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공유하지 않고선 손농사 못 짓습니다.”
실제 샘골의 지세를 살펴 보면 대규모 기계농업을 시도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논이라야 다랑논 몇 필지가 전부인데다, 밭의 모양이나 경사도 역시 일일이 사람 손을 타지 않으면 경작이 쉽지 않은 조건이다. 게다가 소농 자체가 끈끈한 공동체적 유대 없이는 불가능한 농사 방식이기도 하다. 가족들만으론 일손이 달리니 자연스럽게 이웃들 힘을 빌려야 하는데, 그러려면 평소 인간관계를 돈독히 다져놓아야 한다.
마곡사가 귀농인들에게 땅을 내놓는다는 소식이 입소문을 탄 뒤 참여 방법이나 정착 조건을 묻는 귀농 희망자들의 전화가 하루 평균 예닐곱 통씩 마곡사와 귀농운동본부 쪽으로 걸려온다. 현지 사정을 눈으로 확인하려고 차를 몰고 직접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기자가 샘골을 찾은 1월10일엔 태화산 산책로를 찾은 등산객들만 간간이 마을길을 오갔다. 이들은 샘골의 범상찮은 형세를 두고 나름의 풍수 지식을 풀어내는가 하면, 눈밭에 남아 있는 짐승 발자국이 고라니 것인지 멧돼지 것인지를 두고 가벼운 입씨름을 벌이기도 했다.
마곡사로 내려와 남태규 종무실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소농마을 조성에 참여하는 마곡사 쪽 실무 책임자다. 소농 공동체의 성공 가능성을 물었더니 2009년 원혜 스님 취임 뒤부터 시작한 생태농장 이야기를 들려준다.
“태화산 자락의 방치된 휴경지에 3천 평 규모로 농장을 만들었습니다. 우거진 잡목을 베어내고 잔돌을 골라낸 뒤 배추와 무를 심었는데, 화학비료와 농약을 전혀 쓰지 않았는데도 절에서 먹고 남을 정도로 잘 자란 거예요. 김장을 담가 지역의 복지시설과 다문화가정에 전달하고, 2010년 배추 파동 땐 시장에서 포기당 2만원 하는 배추를 안마당에 잔뜩 쌓아놓고 절을 찾는 신도들에게 나눠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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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 쪽은 소농마을이 조성되면 자급자족에 필요한 텃밭 농사 외에 밀이나 보리를 키우고, 절 아랫마을에선 제빵·제과 공장을 운영하는 것도 고민하고 있다. 지역 특산물인 밤을 가공해 빵이나 과자를 만들어 팔면 70여 가구에 달하는 지역민들의 소득 향상에도 도움이 되리란 판단에서다. 이런 아이디어를 두고 주변에선 우스갯소리로 ‘21세기 사하촌(寺下村) 프로젝트’라 부르기도 한다. 한때 수탈과 억압의 상징이던 소설 속 사하촌이 이곳 공주에서 사람과 땅이 상생하는 우애와 환대의 공동체로 거듭나고 있는 셈이다.
마곡사람들 조합원이 되려면 ‘자기·가족 소개서’를 작성해 1월25일까지 마곡사로 제출하면 된다. 서류 심사를 통과한 지원자는 면접(1월31일)을 거쳐 2월1일 합격 여부를 개별 통보받는다. 올해는 10가구를 우선 선발한 뒤 차츰 규모를 늘려나갈 계획이다. 문의 041-841-6220~3.
공주=글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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