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신’ 김성근 감독은 잔뜩 벼르고 있었다. “싸울 때처럼 주먹 불끈 쥐고 뛰어. 자네, 사람 패본 적 없어?” 외야수 김정록을 더 뛰어오르도록 채근하다가 문득 뒤에 있는 김영관에게 한마디 한다. “발이 흐트러졌잖아.” 방심하면 안 된다. 김성근 감독의 별명은 ‘잠자리 눈깔’이다.
“여기가 마지막이다”
2011년 12월28일, 고양 원더스 선수 51명이 겨울 훈련을 하는 전북 전주야구장은 긴장감으로 팽팽했다. 방망이가 공을 때리는 소리와 기합 소리만 침묵을 찢었다. 삼성 라이온즈 출신 포수 최천수는 “숨 쉴 틈도 없다. 이렇게 지독한 훈련은 처음”이라고 했다.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캐치볼, 체력보강 훈련, 달리기, 난타가 쉼없이 이어졌지만 김성근 감독은 “긴장감이 부족하다. 아직 멀었다”고 채근한다. 김 감독이 원하는 순간은 따로 있다. 2006년 그가 SK 와이번스 감독을 맡아 처음으로 겨울 훈련을 떠났을 때다. “그해 일본 미야자키 캠프에서 훈련할 때였어요. 운동장에서 파리 한 마리 날아가는 것도 느껴질 정도로 예민했죠. 한순간도 정신을 놓치면 가만히 놔두지 않았어요. 운동장 전체에 긴장감이 흘렀죠. SK는 그 순간을 가짐으로써 좋아진 거예요. 사람이 그런 순간에서 살아남아야만 뭔가를 느끼고 발전할 수 있지. 그런 순간을 모르면 그건 선수도 아니에요.”
2011년 12월12일 정식 창단한 고양 원더스는 프로야구 1리그나 2리그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않은 독립구단이다. 선수들 대부분이 프로구단 지명을 받지 못했거나 프로구단에서 방출된 선수들이다. 대학을 졸업한 선수들이 대다수여서 선수 연령도 높은 편이다. 부상으로 재활훈련을 거듭하다 프로 진출의 기회를 놓친 선수도 많다. 선수들은 “여기가 마지막이다. 그러나 결정적 기회다”라는 생각으로 트라이아웃에 뛰어들어 선발됐다. 그런 선수들을 바라보는 김성근 감독은 마치 충암고·신일고 감독을 맡았던 40여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하다. “고등학교 감독할 때 이 정도 아이들을 데리고 했죠. 지금은 수준이 훨씬 높은 팀과 경기해야 하니까, 만약 지금 붙는다면 누구나 다 우리를 이길 거예요.” 김성근 감독은 다시 지는 팀으로 자신을 불러들인 것은 “운명 아니었을까”라고 되묻는다. “우선 SK를 떠나지 않는 한 상상도 못할 이야기였다. 그다음으로는 고양 원더스 구단주인 허민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모두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프로야구 SK 와이번스를 세 차례나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야구의 신’으로 불렸던 그다. 그러나 2011년 여름 구단과의 갈등으로 감독직을 떠났다. “나한테 전권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야. 야구하면 돼. 전권이 없을 때도 내가 필요하고 야구하기 위해서는 내 할 대로 했어요. 이리 하나 저리 하나 잘릴 때는 잘리더라고요.” 정상 팀 감독으로 있을 때부터 야인 같은 감독이던 그에게 고양 원더스는 정말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순간이 인생, 운명, 승부처”
훈련 첫날 선수 50여 명을 모아놓고 김성근 감독은 “과거는 잊어버려라. 오늘부터 너희의 새로운 시작이다. 과거 속에서 헤맬 필요는 없다. 너희가 잘했든 못했든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이제부터 스타트니까 새로운 마음을 갖고 하라”고 말했다.
희망을 가질 근거가 있을까? 한 달간의 훈련이 끝나기 하루 전이지만 감독은 “아직 눈에 차는 선수가 단 한 명도 없다”고 했다. 12월27일 고양 원더스에 합류한 정영일 선수에 대해서도 “아직은 야구 선수라 할 단계가 아니다. 저거 몸 보니까 야구 선수 몸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정영일 선수는 광주 진흥고 시절 한 경기 23탈삼진을 기록하는 등 고교야구 최고의 투수로 군림했다. 2006년 계약금 110만달러를 받고 미국 프로야구 LA 에인절스로 갔던 그는 팔꿈치 부상으로 결국 2011년 구단에서 방출돼 한국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최종 선수 선발은 1월 이후로 미뤄졌다. 12월5일 고양 원더스 감독을 맡은 김성근 감독은 처음엔 선수들을 지켜보다가 일주일 전부터 운동장으로 뛰어들었다. 직접 공을 던지고 배트를 잡았다. 감독이 직접 나서자 선수들이 달라졌다. 김 감독은 “투수들은 처음보다 많이 향상됐지만 만족할 만한 단계가 아니다. 모든 게 시작”이라고 다시 한번 못박는다. “나는 간첩은 아니지만 불만과 불안 속에 살아요. 사람들이 뭐 하나 했을 때 그 순간 만족하며 흐트러지는 기색을 보면 기분이 나빠요.” 어떤 선수가 그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감독은 이렇게 답한다. “좋은 뜻에서 욕망에 가득 찬 선수. 늘 뭔가 안타깝고 자기 상황을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하는 자세가 있어야만 선수로 살아가지 않나 싶다.” “순간이 인생이고 운명이고 승부처”라던 그는 지금 이 자리에서 새로 승부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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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안에 잠자는 재능 캐내면 돼”
고양 원더스는 2012년 2군에 속한 팀들과 48차례 경기를 치른다. 지금으로서는 2군을 이길 만한 실력도 안 된다. 그래도 선수들과 수석코치를 맡은 김광수 전 두산 베어스 감독대행, 투수코치인 박상열 전 SK 와이번스 2군코치 등 7명의 코칭스태프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김정록 선수는 “이번 동계 훈련만 버텨내면 우리는 누구와 해도 안 질 것 같다”고 했다. 칠순에 독립야구구단 감독을 맡은 김성근 감독은 “모든 것이 미지수지만 선수들이 자기 속에 잠자고 있는 재능을 캐내기만 해도 된다. 그걸 내가 할 거다”라고 했다.
전주=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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