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 체 게바라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아?” “최 누구?” “체 게바라아~.” “최씨면 한국 사람이겠네.” “우아, 이 무식한 것들.”
18살 유범이가 투덜댄다. 체 게바라에 관한 글 한 편을 읽고선 아이들 앞에서 티를 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올해 나이 14~15살인 나머지 아이들이 남미의 혁명가 이름을 들어봤을 리 없다. 건너편 책상에서 책을 읽던 상하(19)가 끼어든다. “나 알아. 쿠바 사람이잖아.” 유범이 얼굴에 득의만만한 미소가 번진다. “아, 거긴 혁명하러 갔던 거고. 태어난 데는 아르헨티나라니까.”
드나듦이 자유로운 열린 공간
대화가 한창인 이곳은 서울 성산동에 있는 ‘공간 민들레’다. 카페 체인인 ‘민들레 영토’와는 무관하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모여 공부하고, 놀고, 고민을 나누는 곳이다. 역사는 10년이 조금 넘는다. 시작은 1990년대 말 만들어진 ‘민들레 사랑방’이었다. 대안교육 전문출판사인 ‘민들레’에 놀러와 밥 먹고, 잡담하고, 시간을 죽이던 10대들의 쉼터이던 곳이 2003년부터 탈학교 청소년을 위한 공부방 겸 놀이터로 바뀌었다.
대안교육 공간이라고는 하지만, 운영되는 형태는 일반 학교는 물론 대안학교와도 거리가 멀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학교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느껴 스스로 뛰쳐나온 아이들이 다수인 만큼, 스스로 배움을 갈망하도록 자극을 주려면 드나듦이 자유로운 열린 공간이 한결 효과적이란 판단에서다. 40평 남짓한 공간을 출판사 민들레의 편집자들과 함께 쓰는데, 점심때면 주방에서 함께 밥을 지어 먹고, 회의실과 놀이 공간을 겸한 중앙홀에선 수시로 만남과 상담이 이뤄진다.
김경옥 민들레 편집장은 “책 만드는 공간에서 함께 생활한다는 게 아이들은 물론 편집자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책을 만드는 언니·오빠들로부터 수시로 지적 자극을 받고, 편집자들은 아이들의 생각과 고민을 함께 나누며 성찰과 영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민들레에 오는 아이들은 40명이 조금 넘는다. 연령대는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13살부터, 대학 입학을 준비 중인 18살까지 폭이 넓다. 학교를 그만둔 이유도 제각각이다. 학교의 억압적 분위기가 싫거나 그냥 공부가 지겨워서 뛰쳐나온 아이, 대안학교 생활이 답답해 휴학한 아이, 왕따나 학교폭력에 시달렸거나, 심지어 가해자로 지목돼 학교를 그만둔 아이도 있다. 신기한 점은 이처럼 다양한 배경의 아이들이 모여 있는데도 갈등이나 다툼이 없다는 사실이다.
대학처럼 듣고 싶은 수업 들어
김경옥 편집장은 “밖에선 터무니없이 거칠고, 자기 마음을 꼭 닫아두었던 아이들도 이곳에서 한두 달을 지내면 어김없이 무장해제돼버린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김 편집장은 그 이유를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배려하고 협력하며 뭔가를 성취하는 일의 즐거움을 아이들 스스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의 기회는 아이들끼리 진행하는 각종 모임과 회의를 통해 자연스럽게 주어진다. 함께 여행을 계획하고, 공연을 꾸리고,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자기 뜻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이견을 조율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 오는 아이들이 마냥 쉬고 노닥거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25명 정도는 1년 과정의 학습 프로그램에 참여하는데, 대학에서 수강신청하듯 듣고 싶은 교과목을 선택해 1학기 단위로 수업을 듣는다. 개설되는 과목은 읽기·쓰기·수학·역사·경제 등이다. 교과목 외에 아이들 스스로 꾸리는 소모임도 다양하다. 심리학, 물리학, 기타교실, 일본어교실, 라디오 드라마 모임 등이다. 4명의 상근교사와 8명의 재능기부 교사가 교과 수업과 소모임 운영에 참여한다.
민들레에는 졸업이 없다. 5년째 이곳을 드나드는 아이도 있다. 1년 과정을 마친 아이들은 민들레에 나와 검정고시에 필요한 교과목 1~2개를 선택해 듣기도 하고, 소모임에만 참여하며 진학에 필요한 공부는 홈스쿨링이나 학원을 다니며 보충하는 아이들도 많다. 문턱이 없는 열린 공간이라서 가능한 얘기다.
아이들의 꿈은 다양하다. 의 애독자인 17살 연수의 꿈은 일러스트레이터다. 따뜻하고 메시지가 있는 그림으로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다. 틈틈이 작가들의 공방을 나가며 그림을 익혔지만, 아무래도 대학은 가야겠더란다. 그래서 올해는 어떻게든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하려고 한다. 같은 또래 소정이는 창업에 필요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생각이다. 2011년엔 3개월간 사회적 기업인 서울 마포의 한 찻집에서 인턴십을 했다. 직접 개발한 ‘밤 라떼’의 반응이 좋았다며 활짝 웃는 소정이는 멋진 카페를 차려 수익금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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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
기백(18)이는 3월부터 다니던 학교로 돌아갈 작정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 학교는 왜 꼭 나가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해 방황했다는 감수성 예민한 이 곱슬머리 소년은 민들레 생활을 통해 ‘그래도 학교는 다니는 게 좋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했다. 체 게바라를 읽고 부쩍 혁명가들의 삶에 관심이 많아진 유범이는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 출판 공부도 하고 싶고,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에도 마음이 끌린다. 언젠가 대학도 가야 한다. 그래도 당장 무엇을 할지 정하지는 않기로 했다. “시간은 많잖아요. 오십이 넘은 아버지도 그래요. 나도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젊은 네가 벌써부터 웬 고민이냐고요.”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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