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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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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사라지지 않은 ‘유령’

- 유령집회로 집회의 자유 제한해선 안 된다는 서울행정법원의 판결… “신고 이유 집회 불허는 기본권 침해"
등록 2011-12-22 13:31 수정 2020-05-03 04:26

사람들은 거리로 나선다. 자신의 사정을 호소할 다른 방법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다른 누군가가 집회 신고를 한 상태다. 신고된 집회는 열리지 않는다. 열리지도 않는 ‘유령집회’가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린 셈이다. 익숙한 풍경이다. 노동조합과 시민단체가 개최하는 집회를 막으려고 사옥 주변에 ‘교통문화 질서확립 캠페인’ ‘근무환경 보호집회’ ‘사원복지 결의대회’ 등의 행사를 미리 신고하는 대기업의 행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회사 쪽과 노조 관계자가 신고 가능 시간을 기다리며 경찰서 앞에 밤새 줄을 서기도 한다. 삼성과 현대, SK, KT 등 대기업의 사옥 주변은 그렇게 ‘집회프리(free)’ 지대로 남아 있다.

» 지난 2009년 1월6일 자신을 ‘삼성 소속’이라고 밝힌 한 남성(오른쪽)이 집회신고 대기표를 받으려고 서울 서초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유령집회’ 신고로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의 집회를 원천 봉쇄하는 대기업의 행태는 여전하다. <한겨레21> 탁기형 선임기자

» 지난 2009년 1월6일 자신을 ‘삼성 소속’이라고 밝힌 한 남성(오른쪽)이 집회신고 대기표를 받으려고 서울 서초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유령집회’ 신고로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의 집회를 원천 봉쇄하는 대기업의 행태는 여전하다. <한겨레21> 탁기형 선임기자

법원, “유령집회로 집회 자유 제한 안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서 꾸준히 ‘유령집회’ 문제를 제기해온 문학진 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10년 6월까지 전국 경찰서에 접수된 330만2545회의 집회 신고 중 실제 집회가 이뤄진 것은 9만3341회(2.8%)에 불과했다. 문 의원은 “이는 대부분 대기업의 유령집회 때문”이라며 “대기업이 신고하는 집회의 실제 개최율은 0%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중복 신고된 집회의 “목적이 상반되거나 방해가 된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만 이후 신고된 집회를 금지할 수 있도록 한 현행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조항은 무용지물이다. 집회 자체를 범죄와 동일시하는 ‘불통의 대한민국’에서 집회·결사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는 질식돼왔다. 지난 11월24일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박정화 부장판사)의 판결은 이런 현실에 균열을 냈다. 유령집회로 집회를 열지 못하게 된 서울의 한 상가 임차인들이 수서경찰서를 상대로 낸 ‘옥외집회 금지통고처분 취소 소송’에서 재판부는 “집회 및 시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법익의 보호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 한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임차인들의 손을 들어줬다. 이들은 상가의 실소유주인 서울의 한 사찰 주변에서 돌려받지 못한 보증금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 계획이었지만, 사찰 신도회가 먼저 신고를 해 금지 처분을 받았다. 신도회가 신고한 집회는 실제 열리지 않은 ‘유령집회’였다. 재판부는 “집회 신고가 이미 돼 있다는 이유만으로 집회를 불허하는 것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으로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서울행정법원 쪽은 “유령집회로 집회의 자유를 제한해선 안 된다는 취지의 판결이 난 것은 처음인 걸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번 소송의 피고인 수서경찰서와 사찰 쪽은 최근 항소를 제기했다. ‘올해의 판결’ 심사위원인 최재홍 변호사는 “유령집회 논란에 하나의 준거가 될 수 있는 취지의 판결”이라면서도 “이번 판결이 곧바로 모든 경우에 적용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관계 법령 및 집회 중복 신고 문제에 대한 경찰 내부의 업무지침을 정비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최 변호사는 “앞으로 벌어질 비슷한 유형의 소송에서 집회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는 취지의 판결이 축적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여전히 유령 집회신고 일삼는 삼성”

회사 쪽과의 ‘유령집회 싸움’에 이골이 나 있는 삼성일반노동조합 김성환 위원장은 “집회 신고를 선점해 노조의 집회를 무력화하려는 삼성의 시도는 여전하다”고 말했다. 집회를 개최하려는 개인과 단체가 매번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유령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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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C21A1A">심사위원 20자평</font>
오창익 집회·시위의 자유는 헌법에만 쓰여 있는 ‘벽장 속의 보화’일 뿐인가
이재근 알박기 유령집회로 집회 막는 꼼수는 이제 안 통해요
최재홍 권리는 인간에게, 유령 저리 가!</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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