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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와 라이터가 있으면 안 된다고 했다. 함께 간 사진기자 선배는 ‘러키스트라이크’ 한 갑을 건넨 뒤 다른 주머니에서 또 한 갑을 꺼내 맡겼다. 휴대전화도 가져갔다. 녹음기도 있으면 맡기라고 했다. 안내를 맡은 교도관이 지문감식기에 손가락을 대자 ‘보안정문’이 열렸다. 서울남부교도소(옛 영등포교도소)로 통하는 길이 열렸다. 수형자들이 머무는 수용동(사동)까지 가려면 주복도 통용문과 수용동 출입문을 더 통과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수형자들이 갇혀 있는 수용거실 출입문까지 열어야 하니, 바깥세상과는 4개의 자물쇠가 걸려 있는 셈이다.
김지하, 백기완, 이근안, 지강헌, 전경환…
서울남부교도소는 낯설다. 사람들은 영등포교도소로 기억한다. 긴급조치 1호 위반 사건의 첫 번째 피고인인 백기완 선생이 영등포교도소를 거쳐갔다. 시인 김지하 등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도 들어왔다 나갔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도 영등포교도소 수용동에서 오고 간 은밀한 대화가 바깥세상으로 전달되며 드러났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회원들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학생들은 영등포교도소 밖에서 시위를 벌였다. 지강헌은 영등포교도소에서 공주교도소로 이송되던 중 탈주해 서울의 가정집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쳤다. 고문기술자 이근안도 자신의 ‘관절뽑기’ 기술을 동원해 간첩으로 조작했던 이들이 거쳐갔을 영등포교도소 두부공장에서 두부를 만들었다.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은 영등포교도소에서 화초에 물을 뿌리는 편한 일을 하다가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군사독재와 민주화운동 시기를 거치며 정치범으로, 혹은 공안범으로 한국 현대사에 세 글자 이름을 남긴 이들부터, 권력을 지저분하게 사용한 부정부패범, 회삿돈을 제 마음대로 굴린 경제범, 남의 집 담을 넘고 사람을 속이고 주먹과 몽둥이로 때린 이름 모를 잡범들까지 영등포교도소를 채웠다. 영등포교도소는 과거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재벌과 기업과 양심이 문제가 되는 요즘 세상에서, 삼성과 지난한 싸움을 벌이는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이, 병역거부를 선언한 숱한 양심들이 영등포교도소에 머물렀다. 그 교도소가 62년 만에 문을 닫고 새로운 곳으로 옮겨간다.
10월27일 오전 서울 구로구 고척1동 100번지 남부교도소를 찾았다. 교도소는 10월29일 있을 ‘수형자 대이동’ 준비로 분주했다. 이틀 뒤면 800여 명의 수형자가 구로구 천왕동의 신축 교도소로 이송된다. 이를 위해 남부교도소는 서울지방교정청 소속 다른 교도소에서 모자라는 호송버스와 수갑 등의 계구를 빌려왔다. 호송버스 14대에 호송인력만 170여 명이 동원된다. 지난 10월22일에는 이미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된 미결수와 기결수 등 1500여 명을 이송했다. 조명형 남부교도소 소장은 “신축 교도소가 같은 구에 있어 이송 거리는 그렇게 길지 않다”고 말했다. 교도소 쪽은 수형자 이송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보안이라며 밝히지 않았다.
소장실과 총무과 등이 있는 구외(보안정문 밖) 청사에서는 60여 년 묵은 서류더미들이 커다란 박스에 포장돼 바쁘게 트럭에 실렸다. 교도소 관계자는 “62년 만에 하는 이사다. 옛날 누군가 숨겨놓은 돈이라도 나오면 좋겠다”며 웃었다. 수형자 대이동 하루 전날인 10월28일은 ‘교정의 날’이다. 이를 기념한 가석방 업무도 이사 전에 처리해야 한다. 아무리 이사가 바쁘더라도 중요한 업무를 빼먹을 수 없다.
아침엔 윤형주, 저녁엔 2NE1
남부교도소는 정부 수립 뒤인 1949년 12월27일 현재의 자리에 ‘부천형무소’로 문을 열었다. 당시는 행정구역이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고척리 산40번지였다. 소림광업소·제련소 자리였다고 한다. 1961년 12월23일 부천교도소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68년 9월18일 행정구역 변경으로 영등포교도소로 바뀌었다. 1969년에는 교도소 옆에 영등포구치소가 들어섰다. 이후 1980년 4월 또다시 행정구역이 바뀌어 고척동이 구로구에 속하게 됐지만 영등포교도소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올해 5월4일 서울남부교도소로 개칭됐다. 6만7696㎡ 부지에 수용동·작업장·사무실 등 건물 50개 동이 들어서 있다. 수형자가 머무는 거실은 독거 78실, 혼거 190실로, 최대 수용인원은 900명이다. 영등포구치소 부지까지 더하면 이전 뒤 11만970㎡가 주거·문화·체육·상업 시설 등으로 개발된다.
보안정문을 통과해 구내로 들어서자 ‘옛 생각’이 났다. 교도소에 수감된 적은 없다. 대학 시절 과선배 중에 ‘홍부장’으로 불리던 이가 있었는데, 홍부장이 살던 야트막한 연립아파트가 담벼락 하나를 두고 영등포교도소와 이웃하고 있었다. 후배들은 그 집에 자주 갔다. 꼭대기층이었는데 새벽 어름에 들리던 기상나팔 소리에 창문을 열고 교도소 운동장을 바라보곤 했다. 요즘 수형자 기상 시간을 물어봤다. 아침 6시30분이라고 했다. 나팔이나 트럼펫 소리로 깨우느냐고 물었다. 교도관은 “법무부의 ‘법질서 로고송’이 나온다”고 했다. 법질서 로고송은 법질서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걸그룹 ‘2NE1’이 부른다. 하지만 수용거실마다 달린 스피커에서 틀어주는 로고송은 2NE1 이전에 로고송을 부른 ‘세시봉’ 가수 윤형주씨 버전이다. 2NE1의 로고송은 취침 전에 틀어주는 텔레비전 방송 끄트머리에 나온다. 로고송 다음에는 애국가다. 수형자들은 밤 9시면 취침에 들어간다. 작업자는 그보다 이른 저녁 8시30분에, 환자는 저녁 8시에 재운다고 한다. 군대 취침 시간보다 이르다. 이곳은 취침 시간에도 불을 환하게 켜놓는다. 24시간 점등체제다. 안대를 쓰고 자야 한다.
운동장 초입에는 하얗게 페인트칠을 한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조명형 소장은 “일제시대 극장 건물을 강당으로 쓰고 있다”고 했다. 입구가 두 개로 아담하게 지어진 벽돌 건물이다. 사진기자 선배는 “어느 쿠바의 성당 같은 느낌”이라고 했고, 안내를 맡은 이일도 교도관은 “예전 부천극장”이라고 했다. 강당은 수용동과 평행하지 않게, 45도 정도 비뚤게 자리하고 있다. 기존에 있던 부천극장을 헐지 않고 교도소 안으로 수용한 탓일 게다. 남부교도소는 감시탑을 중심으로 한 방사성 모양으로 지어지지 않았다. 근대 감옥의 전형적 모습과 달리, 수형동을 서로 평행하게 지었다.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됐던 이들은 “간악한 일제가 지은 형무소와 달리 해방 뒤에 무언가 어설프게 비효율적으로 지은 것 아니냐”고 ‘의심’한다. 감시당하는 사람이 감시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는 ‘원형 감옥’이 아니라는 얘기다. 나름대로 ‘인간적인 교도소’였던 셈이다.
맑은 날 휑하니 비어 있는 운동장 가운데에서 교도소를 둘러보자니 ‘이곳은 분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만한 것이, 교도소 담벼락과 감시대가 높다고 하지만 주변에서 가장 낮은 건물은 교도소였다. 2층 높이가 최고인 교도소 건물을 고층아파트들이 빙 둘러쌌다. 비교적 건물들이 낮은 북쪽으로는 고척초등학교가 버티고 있고, 그 뒤로 비탈을 따라 4~5층짜리 오래된 연립들이 자리하고 있다. 조명형 소장은 “교도소가 생기고 나서 한참 뒤에야 아파트가 들어섰다. 주민들은 교도소를 기피시설이라며 못마땅해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도 피해자”라고 했다. 주변 아파트에서 교도소 안이 다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두부공장 사라지고 인쇄공장 남았네
수형자들이 운동을 마치고 그늘을 즐기는 운동장 구석 왕버들나무 밑에 하얀 박스가 잔뜩 쌓여 있다. 이일도 교도관이 “사무실 이사는 수용동 이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상자마다 ‘5동3층9방’ 등 새로 이사갈 곳의 ‘주소’가 사인펜으로 적혀 있다. 수형자 개인 사물이다. 책이며 영치품 등 개인 사물이 많은 수형자는 일단 가족에게 소포로 일부를 보내게 했다. 이삿짐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수용동으로 이어지는 복도도 수형자들의 짐 박스가 가득하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수형자 6명이 푸른 옷을 입고 줄 맞춰 걸어 들어갔다.
운동장 주변에는 2층짜리 작업장(공장) 건물이 ㄱ자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다. 남부교도소에는 인쇄·목공·양재·외부위탁 공장 등 10개 작업장에 236명이 취업하고 있다. 올해 목표액이 12억7천만원인데 10월 현재 8억2600만원을 채웠다. 솜씨들이 좋다. 건물 맨 오른쪽이 인쇄공장이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된 시인 김지하는 인쇄공장에서 일했다. 그는 출소한 뒤 이렇게 썼다. “저 번뜩이는 쇠고랑 수갑으로 일치된 캄캄한 암흑 속의 펄펄 끓어오르는 용광로, 영등포감옥이다. 사상도 빛깔도 사투리도 표준말도, 부자도 가난뱅이도, 그 어떤 차별도 깨뜨려버리고 일치된 황불의 예감이었다. 그 감방, 그 인쇄공장은.” 또 “낮도 밤도 없는 시커먼 영등포/ 멍청히 남은/ 소화 20년제의/ 아 아 나는 낡아빠진 가와모도 반절기”라고도 썼다. 남부교도소 교도관으로 있는 황용희씨는 지난해 펴낸 에서 “고척호텔(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된 김지하가 인쇄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시인이 ‘가와모도 반절기’라 부른 일제 구형 활판인쇄기가 1980년 중반까지 있었다”고 썼다. 이곳 인쇄공장에서는 법무부나 세무서에서 필요한 각종 서류와 양식 등을 인쇄한다. 공무원시험 문제지를 여기서 인쇄하기도 했다니 ‘보안’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시인이 썼을 활판인쇄기는 옵셋인쇄기로 교체된 지 오래다. 교도소 쪽은 옵셋인쇄기를 사흘 동안 해체해 10월26일 새 교도소로 보냈다. 기계가 커서 인쇄공장 벽을 허물어야 했다. 이근안이 일했다는 두부공장은 없어졌다. “간수 조절에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데 이게 제대로 안 되면 두부에 구멍이 뻥뻥 뚫린다. 자체 수급을 하다가 기술적 문제로 폐공했다”는 설명이 따랐다.
교도소는 여전히 주민들에게는 기피 대상이지만, 교도소 안에서 새 희망을 품는 사람도 있다. 조명형 소장은 “수형자들에게 취업 알선, 소자본 창업 정보 등을 제공하고 있는데, 출소 뒤 즉시 활용이 가능하도록 현장 중심의 실기 위주 교육훈련을 실시하고 있다”고 했다. 올해에만 18명에게 취업 알선을, 3명에게는 창업 지원을 했다. 교도소 밖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등포교도소에는 1979년 문을 연 직업훈련소가 있다. 자동차정비 등 7개 공과가 있는데 개소 이래 1만3528명의 기능인력을 양성했다. 올해 서울지방기능경기대회에서 금상 1명, 우수상 1명을 배출하는 등 지금까지 245명이 각종 경기대회에서 입상했다. 천왕동으로 이전한 뒤에는 ‘점역·교정사 자격취득’ 직업훈련이 새로 추가된다. 시각장애인이 책을 점자로 읽을 수 있도록 번역·교정하는 일이다.
심리치료센터 등 도입된 신축 교도소
천왕동에 지어진 신축 교도소는 ‘최신식’이다. ‘그래도 교도소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지금의 낡은 수용동과 비교할 수 없다고 한다. 22만9191㎡ 부지에 수용동·취업장·심리치료센터 등 19개 건물이 들어섰다. 수용동은 현재의 2층에서 3층으로 한 층 올라갔다. 548개 수용거실에 지금보다 200명이 많은 11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전국 교정기관 가운데 최초로 지열난방에 태양광발전 설비가 들어섰다. 교도소에서 최우선인 경비 업무에도 최첨단 전자경비 시스템이 도입됐다. 조명형 소장은 “인권이나 시설 면에서 교정행정이 크게 변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예산 등에서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관심을 가질 때가 됐다”고 말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처럼 남부교도소 건물들도 한국 현대사의 한 공간으로 보존될 수 있을까. 남부교도소에서 수형자를 대상으로 인문학 강좌를 하고 있는 소설가 서해성씨는 보존을 주장한다. “옛 영등포교도소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대표적 장소다. 외국처럼 건물 하나라도 남겨서 기념관이나 인권센터라도 만들자”고 했다. 구로구청 도시개발과는 “건물들이 낡아 경제적 가치로 재활용할 만한 것은 없다고 본다. 건물의 사료적 가치가 검토된 것도 없다”며 “앞으로 건물 소유주가 될 한국토지주택공사 쪽에서 개발계획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한국토지주택공사 관계자는 “개발계획은 서울시, 구로구,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참여한 12개 회사 등과 협의해 결정해야 한다. 이제 초기 단계로 개발계획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협의를 통해 일부 건물을 기념관 등으로 남길 수 있는 여지가 아직은 있는 셈이다.
주민들은 어떨까. 교도소 바로 옆 아파트에 사는 조소재(81)씨는 교도소가 없어지는 게 속 시원하다. “‘교도소 옆 아파트’라는 말이 듣기 그렇잖아. 애들 교육에도 안 좋고. 교도소가 간다니까 아주 좋아. 진작 갔으면 좋았을걸”이라고 했다. 최옥엽(77)씨는 교도소가 잘 내려다보이는 층에서 산다. “최근 밤인데도 구치소 쪽에 불이 안 들어온다. 좋은 나무들은 다 캐갔다. 구보하는 사람도 안 보인다”고 했다. 교도소·구치소 이전 때문에 그렇다고 하자, “옛날에는 (수형자가) 담 넘어오면 잡으러 오고 그랬어. (교도소 터에) 새로 들어오는 거나 잘 들어와야 하는데”라며 교도소 이전에 기대를 보였다. 최씨는 “공원이 들어오느냐”고 되물었다. 교도소 뒤쪽에서 고척마트를 운영하는 이정안(60)씨는 ‘교도소 이전 뒤’에 대해서도 심드렁하다. “예전에는 면회를 온 사람들이 칫솔 하나, 치약 이렇게 사가지고 가기도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다 사들고 오는지 그런 손님도 없어요.” 그는 “이미 주변에 대형마트가 잔뜩 들어섰고 장사도 안 되는데, 교도소 터가 개발되면 대형마트가 또 들어오지 않겠느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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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건물 남겨 역사 보존하면 어떨까
1987년 영등포교도소 수감 당시 양심적 교도관들의 도움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범인이 축소·조작됐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린 이부영(69) 민주평화복지포럼 대표는 “아파트에서 교도소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도심 한가운데에 행형시설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지만 없어진다고 하니 감회가 새롭다”며 “그래도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기념물로는 서대문형무소면 충분할 것 같다”고 했다.
남부교도소 쪽은 건물 자체를 남길 수 없어 하나하나 사진으로 담고 있다고 한다. 건물 한 채 정도를 남겨 그곳을 거쳐간 이들의 편지나 책을 모아 보여주면 어떨까. 이근안·전경환의 ‘악행’도 영원히 남길 겸.
글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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