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9월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수피아홀에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오른쪽)이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불출마와 박원순 변호사(왼쪽) 지지를 선언한 뒤, 두 사람이 끌어안은 채 환하게 웃고 있다. 이들의 급부상은 기존 정당정치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는 유권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담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온 나라가 술렁댄다. 이번 보궐선거는 내년 총선·대선의 전초전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지만, 여론의 출렁임 속에서 정작 직업 정치인이나 정당의 존재감은 확인되지 않는다. 관심의 초점은 당적을 가진 적이 없는 비정치인이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기술대학원장과 박원순 변호사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이 ‘하룻밤 사이’에 정국의 핵심 인물로 떠오르자, 정치권은 아연실색해 황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무당파 돌풍’이라고 부를 만한 이들의 급부상을 놓고, 정치권에선 ‘탈정치 현상의 심화’라는 분석이 쏟아진다.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스마트 시대가 왔는데, 정치는 아날로그 시대에 머물러 있다. (‘안철수 현상’은 국민이) 정치권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으로, 그 변화의 욕구가 아마 안 교수를 통해서 나온 것 아니겠느냐.” 정치를 ‘아날로그 시대’에 머무르게 한 ‘제 잘못’을 쏙 빼놨다는 점을 논외로 하면, 발언의 핵심은 정치 혐오와 불신이다. 이 대통령이 그간 ‘여의도 정치’와 자신을 분리해온 사실을 고려하면, 결국 ‘안철수 현상’이 탈정치적이라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안 교수와 박 변호사가 ‘정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선거의 후보로 각광받는다는 현상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과거엔 정치권 밖에서 주목과 존경을 받던 이들이 선거에 나서려면 “왜 진흙탕에 뛰어들어 몸을 더럽히려고 하나”라거나, “결국 정치하려고 그런 거였느냐”는 우려와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지금은 이런 반응을 찾아보기 어렵다. 문화평론가인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미문화)는 “‘안철수 현상’ 등의 겉모습은 탈정치적·비정치적이지만, 내용은 정치를 개혁하라는 정치적 요구”라며 “국민이 볼 때 정치는 자신의 삶이 나아지도록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기존 정당정치가 그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민이 정당 밖에서 대안을 찾는 것은 매우 정치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손학규 민주당 대표(왼쪽부터). 지금의 정당정치는 유권자의 삶을 나아지게 하지도, 도덕적 우월성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한겨레 김명진, 탁기형
정치권에선 지금처럼 어느 정당 소속도 아닌 ‘제3세력’에 대한 갈구가 늘 존재했지만, 대체로 금방 사그라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1995년 서울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인기를 끈 박찬종 변호사, 2002년 월드컵으로 각광받은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 2007년 대선에서 주목받은 문국현 전 창조한국당 대표와 이명박 대통령 등 정치와 거리를 둔 이들이 ‘참신함’을 무기로 바람을 일으켰지만, 이 대통령을 제외하면 성공한 사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도 지금의 무당파 돌풍을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 기존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은 ‘상수’다. 그간 주목할 만한 인물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방점이 찍힐 대목은 ‘왜 제3세력이냐’가 아니라, ‘왜 지금 안철수·박원순이냐’다. 안 원장과 박 변호사를 통해 유권자들이 실현하고 싶어하는 지금의 시대정신이 무엇이냐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얘기다.
이는 기존 정당정치가 뭘 잘못했느냐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택광 교수의 지적처럼 유권자에게 중요한 건, 누가 자신의 삶이 나아지도록 만들어줄 능력을 가졌느냐다. 그런데 민주개혁 정권도, ‘일 잘한다’고 강조한 보수 정권도 그런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진보정당은 미미한 지지율로 가능성조차 보여주지 못했다. 정당정치에 속한 인물 대부분이 선거를 통해 일종의 ‘검증’을 받았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이명박 정권은 도덕성도 없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데만 익숙하다. 시대착오적인 70년대 스타일이다. 대세라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땅에 발을 딛지 않을 것 같은, 차갑고 권위주의적인 ‘20세기 공주’다. 보통의 국민이라면 정당정치에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반면 안 원장과 박 변호사는 ‘우리 시대의 멘토’로 불릴 만큼 기존 정치인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우선 이들이 멘토로 불리는 것은, 자신의 분야에서 능력을 보여주고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 이들의 성공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타고난 집념과 노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잘 먹고 잘 살게 됐다’는 토건시대의 성공 신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안 원장은 안철수연구소와 한국형 백신 프로그램 V3 무료 배포 등을 통해, 박 변호사는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 등을 통해 ‘잘난 개인’의 성공을 사회의 몫으로 돌렸다. 성과를 나눈 뒤엔 미련 없이 다시 백지 상태에서 창조적인 도전을 거듭했다. 사회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선 비판도 주저하지 않았다. 개인과 자기 가족만을 위한 입신양명이 아니라, ‘우리’라는 인식과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깔려 있는 것이다. ‘성공 신화의 사회공헌’ 또는 ‘사회공헌의 성공 신화’인 셈이다.
장시기 동국대 교수(영문과)는 이들을 “근대적 이분법을 뛰어넘은, 국민과 시민의 친구인 동시에 연인이라고 생각하는 훌륭한 탈근대적 지도자”라고 극찬했다. 핵심은 이들이 각종 사회활동을 통해 도덕성을 확인시켜줬다는 점이다. 또한 대중강연과 서적 출판, 글쓰기 등을 통해 상식에 기반한 공감과 소통의 리더십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안 원장의 ‘희망공감 청춘 콘서트’에는 매번 수천 명의 학생이 몰리고, 박 변호사의 트위터 팔로어는 10만 명이 넘을 정도다.
자료: <조선일보>·미디어리서치(9월13일)
이들을 향한 대중적 지지가 이렇게 현실정치의 한계에 기반하기 때문에, 무당파 돌풍은 단순한 팬덤 현상으로 보기 어렵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과학부)가 9월14일 에 쓴 글처럼 “대중은 자신이 닮고 싶거나 도달하고 싶은 대상, 특히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정한 재력과 스펙을 갖춘 사람을 선망한다”는 점만 놓고 보면, 두 사람의 ‘인기’는 연예인의 그것과 비슷할 수 있다. 하지만 안 원장이 박 변호사에게 서울시장 후보 자리를 양보하자, 5%대에 불과했던 박 변호사의 지지율이 여야를 합친 후보군 가운데 1위로 급등한 사실은 ‘팬덤 그 이상’의 정치적 열망이 이들에게 투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분석실장은 “(안 원장 출마설이 나왔을 때의 지지율은) 정치세력에 대한 선호가 아니라, ‘안철수’라는 인물에 대한 선호라는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후보 단일화를 하더라도 안 원장을 선호하던 이들이 전폭적으로 박 변호사에게 갈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며 “(단일화 이후 박 변호사의 지지율이 올라간 것은) 안철수 현상 등을 촉발한 원인이 기존 정치에 있고, 두 사람 모두 이런 정치를 변화시켜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안철수·박원순 돌풍은 결국 한국적인 ‘정당 실패’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정치학에서 ‘정당 실패’란 기존 정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과 불신이 커지고, 시민사회단체·이익집단의 정치 참여와 개입 등 대인적 조직이 나타나 주목받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정당은 이전부터 지역 말고는 이념·계층·세대 등 정당 고유의 사회적 기반이 약하다. 그런데 기존 정당이 갈수록 유권자의 이해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불만이 커지자 대중과 시민사회에 기반한 안 원장과 박 변호사가 등장한 것이다.
안 원장과 박 변호사에게 어느 정당도 지지하지 않는 무당파층의 지지가 쏠리고 있다는 점은 특히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을 향해 켜진 경고등이다. 지금의 무당파층엔 ‘한나라당은 싫고, 야당은 못 믿는’ 이가 많기 때문이다. 윤희웅 실장은 “무당파층엔 정치 무관심층과 순수한 부동층도 있지만, 정치적 관심이 있어도 현재 정치세력에게 기대감을 갖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며 “최근의 무당파층은 보수 정치세력을 지지하지 않거나, 이들에게 실망했지만 야당이 자신의 기대를 실현시켜줄 것이라고 믿지 못하는 진보 성향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진보·개혁 정당이 제 구실을 못해 정치의식이 높고 상식적인 진보적 유권자를 무당파층으로 내몰았고, 이것이 무당파 돌풍을 만든 주요한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이런 진단이 맞다면 “안철수·박원순 바람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고 ‘검증’을 거치면 사그라질 것”이라는 정치권의 기대 섞인 전망은 오류로 결론 날 가능성이 크다. 설령 안 원장과 박 변호사의 지지도가 떨어지고 대중한테서 잊혀질 수는 있을지 몰라도, 이들을 수면 위로 떠올린 유권자들의 ‘아래로부터의 요구’는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제2의 안철수’ ‘제3의 박원순’은 언제든 등장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정당정치가 수명을 다했다는 분석도 ‘공상’에 불과해 보인다. 근대 민주주의가 정당을 기본 원리로 한다는 사실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정당이 살아남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지난해 지방선거와 지난 4월 재·보궐 선거에서 진 뒤 한나라당이 복지를 강조하고, 내년 총선을 걱정해 이 정권의 핵심 기조인 ‘부자 감세’까지 철회한 건 뭘 뜻할까. 바로 정당은 선거에서 이겨야 하고, 선거에서 이기려면 민심을 수용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뿐만 아니라 선거를 제대로 치르고, 정치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전국적 조직을 비롯한 정당적 질서가 필수적이다. 민주당 입당을 일단 거절한 박 변호사도 ‘진보개혁 통합정당’에는 합류할 의사를 밝히고 있고, 안 원장의 주변 그룹에서도 ‘정치세력화’ 이야기가 나돌았던 것은 이런 맥락이다.
시민 중심 정치의 시대 열릴 것인가
김윤철 경희대 교수(후마니타스 칼리지)는 “정당 실패가 곧 정당 자체의 사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며 “기존 정당들은 여러 가지 갈등을 겪으며 시민이 원하는 변화를 수용하는 ‘창조적 적응 능력’을 갖고 있다. 지금의 무당파 열풍은 기존 정당들이 적응하고 변화하는 추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모든 정당이 살아남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변화에 실패한 정당은 문을 닫겠지만, 정당을 기반으로 한 정치 질서는 유지될 것이라는 뜻이다.
무당파 돌풍과 관련한 이런 분석과 전망을 종합하면, 정당정치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입지가 약해졌고, 시민사회·시민정치의 가능성은 커졌다는 잠정적 결론이 나온다. 이들 정치의 두 축이 삐걱거리지 않고 상호작용하는 새로운 정치의 시대는 열린 것일까.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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