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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 안된 식민, 복원 안된 광장

8·15에 돌아보는 세종로·광화문광장 수난사… 육조거리 5.6도 비틀어 도로 만든 일제의 축 그대로 국가상징거리 밀어붙이는 MB정부
등록 2011-08-16 17:14 수정 2020-05-03 04:26
한겨레21 김경호

한겨레21 김경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제1조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 구절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들끓던 거리의 노래다. 그 노래의 거리는 월드컵과 촛불의 기억으로 넘실댔다. 600년 전 어느 날엔 짱돌의 축제도 있었다. 지금의 광화문 앞 정부중앙청사 쪽에 위치했던 육조거리(이·호·예·병·형·공조 등으로 분류되는 조선시대의 관청이 있던 거리)로 뛰쳐나와 편 가른 도성민들은 세종이 보는 앞에서 서로에게 돌을 던지는 짓궂은 놀이를 즐겼다. 그 기억을 품은 세종로·광화문은 서울광장, 청계광장, 광화문광장을 엮고 세종로와 태평로를 묶어 세종대로가 됐다. 광화문광장이 열린 지 2년, 집단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광장은 찾기 힘들다. 광화문광장으로 선보인 그곳에서 2년 넘도록 제대로 된 집회는 단 한 차례도 열리지 못했다. 그곳은 ‘국가상징거리’로 또 다른 이름을 예비하고 있다. 서울시는 국가상징거리의 설계가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밝혔다.

한양 주축은 육조거리와 만난 종로

“국가 정체성을 확인하고 국민의 자부심을 높인다.”(건국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경복궁에서 한강까지 약 7km가 정부 주도로 꾸며지고 있다(그림 참조). 4대강만 완공이 코앞인 것이 아니다. 4대강만 논의가 막힌 것이 아니었다. 광화문광장은 조성 당시 유명무실한 공청회조차 없었다. 정체성을 확인하고 자부심을 높이는 국가 사업에 참여는 없다. 슬로건만 있다. “2012년까지 완공이다. 문제는 예산 확보다.”(서울시 관계자)

광화문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1단계 사업은 일사천리다. 청와대, 경복궁, 광화문, 숭례문을 잇는 세종대로는 ‘국가가 결정했으니’ 국가의 뜻대로, 방식대로 상징이 돼야 한다는 게 거리를 기념하고자 하는 정부 쪽 설명의 전부다. “봉건시대에나 있을 법한 구시대적인 스펙터클”(승효상 건축가·2011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이 단 한 번의 논의 없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8월15일 광화문광장에서는 국가 행사만 요란하다. 서울 한복판의 수난은 일제가 남북을 횡으로 갈라놓으면서 시작됐다. 그 길을 국민의 자부심을 위해 다시 닦고 있다. 세종로·광화문광장의 수난은 계속된다.

일제는 원래 도성의 남북 축을 5.6도 틀어 총독부를 지었다. 그 축은 성찰 없이 우리의 것이 돼 있다. “본래 세종로에서 시청을 거쳐 남대문으로 가는 길은 없었다. 현재 광화문은 삼거리였고 남쪽은 황토현으로 낮은 언덕이었다. 광화문 앞은 길고 넓은 한양의 큰 마당이었다.”(자료와 인용: 정기용, <서울 이야기>)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일제는 원래 도성의 남북 축을 5.6도 틀어 총독부를 지었다. 그 축은 성찰 없이 우리의 것이 돼 있다. “본래 세종로에서 시청을 거쳐 남대문으로 가는 길은 없었다. 현재 광화문은 삼거리였고 남쪽은 황토현으로 낮은 언덕이었다. 광화문 앞은 길고 넓은 한양의 큰 마당이었다.”(자료와 인용: 정기용, <서울 이야기>)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광화문의 터를 직접 닦은 세종은 광화문에 나와 주민들과 함께 척석놀이(돌던지기 놀이)를 구경했다.”(정기용, 중)

조선이 한양으로 도읍을 정할 때 주축은 남북이 아니었다. 동서로 난 종로가 경복궁 앞 육조거리와 만나 서울의 중심축을 이뤘다. 남북의 축은 정도전의 백악주산설에 따라 북한산과 관악산의 주봉을 연결하는 관념으로 존재했다. 남북의 길을 트지 않은 것은 화기를 막으려는 방편이기도 했다. 대로를 내는 대신 광화문에서 지금의 조선일보 사옥에 자리잡고 있던 나지막한 황토현 언덕까지 700여m를 궁의 앞마당인 육조거리로 조성했다. 조선의 도로 기준이 7궤, 17.5m였던 데 비해 3배가 넘는 50여m를 폭으로 삼은 것으로 미루어 육조거리는 거리이자 광장이었다. 그곳은 매해 문과시험의 대기 장소, 무과시험에서 달리기를 겨루는 시험 장소였다. 도성민들이 시험이 치러질 때마다 장사진을 이뤘다. 왕과 함께 척석놀이를 즐기고 구경하는 빈터였다. 단오가 되면 세종은 궁과 접한 광장에서 돌을 허락하고 그것을 함께 즐겼다. 물론 정치의 공간이기도 했다. 임금이 중국 황제의 칙서를 받는 공간이기도 했고, 중전을 맞이하거나 왕위를 계승하는 의식이 열리기도 했다. 상소를 올린 유생들이 산발을 하고 집단 시위를 벌인 곳, 친일 내각의 거두 김홍집이 흥분한 도성민들에 의해 최후를 맞은 곳이 바로 이곳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정신축이 찢어졌다”

거리와 광장의 수난은 일제의 침탈과 함께 시작됐다. 13만 평, 7800간의 경복궁은 4천여 간이 철거됐으며, 광화문 자리에 1916년 조선총독부가 들어섰다. 총독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광장을 없애는 것이었다. 일제는 지금의 태평로를 닦아 경성부청사(현재 서울시청)와 남산의 조선신궁을 잇는 축을 만들었다. 그 축은 원래의 광화문이 바라보던 육조거리를 5.6도 비튼 것이었다. 황토현이 태평로에 길을 내주자 세종로에 이르는 육조거리는 광장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일제의 새로운 공간 지배축이 드러난 것이다. 건축가 고 정기용은 생전에 이를 “본래의 도시 원형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정신축이 찢어발겨졌다”고 표현했다. 도시 중심축의 비틈과 남북의 관통을 도시 변형이라는 소극적 의미가 아닌 조선 침략이라는 전략적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조선에 도읍을 세운 본뜻대로라면 서울의 랜드마크는 ‘백악산(북악산)∼인왕산∼낙산∼남산’을 잇는 산세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두 동상은 결과적으로 산세를 가리고 있다. 한겨레21 김경호

조선에 도읍을 세운 본뜻대로라면 서울의 랜드마크는 ‘백악산(북악산)∼인왕산∼낙산∼남산’을 잇는 산세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두 동상은 결과적으로 산세를 가리고 있다. 한겨레21 김경호

정치가 지배하는 공간의 힘은 세다. 해방 뒤 복원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마다 정치가 작동했다. 한국전쟁 당시 불타없어진 광화문을 콘크리트로 복원한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다. 하지만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세종대왕을 기리는 세종로에)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우고, ‘조국 근대화’의 성과를 보이려고 일제가 만든 차마의 길을 자동차 길로 더 넓게 닦은 게 전부였다. 서울 600년과 함께한 기억의 복원이나 시민의 것으로 빈터를 돌리려는 성찰을 독재정권에서 찾기란 불가능했다. 변화의 기회는 또 있었다. 1996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며 광화문 이전 작업과 구도심 회복(육조거리 등)에 대한 논의가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보다 자동차의 흐름은 우위에 있었다. 기회는 또 왔다. 그런데 뜬금없다. 국가상징거리가 그 결과물이다.

1차 사업의 시작과 함께 2009년 광화문이 세종로 방향으로 14.5m, 서쪽으로 10.9m 이동해 자리를 잡았다. 박 대통령이 역사적 고려 없이 총독부의 방향대로 복원해 옛 남산신궁 자리를 바라보던 광화문이 원래 방향으로 돌아온 것 자체는 환영할 만했다. 폭 34m, 길이 740m의 광화문광장을 품은 세종대로에 세종대왕상을 만들어 그 이름에 맞도록 조성한 것, 광장이 조성되며 건널목이나마 시민들이 발을 디딜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는 공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의견도 등장했다. 2010년만 해도 1400만여 명이 다녀갈 정도로 명소가 됐다는 점 또한 광화문광장을 긍정하는 견해를 대변하는 근거다.

방향 잘못된 이순신·세종대왕 동상

딱 여기까지였다. 그 앞에 들어선 광장은 ‘거대한 중앙분리대’ ‘외딴 인공섬’ ‘조악한 놀이공원’ 등의 오명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오명을 다는 일은 좌우를 막론한다. 는 국내 유명 건축가와 건축학과 교수 등 전문가 3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주변과 고립된 공허한 공간’이라는 이유로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물 가운데 최악의 사례 1위로 꼽았다. 광장은 최소한 한쪽은 도로 없이 자유롭게 접근이 가능해야 한다는 원칙이 무시되고 현재의 광장은 섬처럼 떠 있는 형상이라는 지적은 광화문광장이 갖추지 못한 상식이다. 또 1만9천㎡의 면적 가운데 조형물을 제외하고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은 1751㎡뿐이라는 사실은 원래 너른 빈터가 광장이라는 또 다른 상식과도 거리가 멀다. 물리적으로 모일 공간이 부족하고 그래서 공감할 대상이 없는 공간에서 제 기능을 하는 것은 분수뿐이다. 그런데 어린이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문화콘텐츠학)는 “물놀이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왜 우리 광장이 그게 전부가 됐는지는 반성해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한겨레21 김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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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기능만이 아니다. 정부는 정통성을 입에 침이 마르게 강조했지만 국가상징거리는 그 또한 기본부터 어긋났다. 국가상징거리가 일제가 만들어놓은 축을 그대로 따른 것은 변명할 수 없는 사실이 된 것이다(그림 참조). 틀어진 축에 성과만 앞세우려 서두르다 보니 결과적으로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문화재제자리찾기운동본부 사무총장 혜문 스님은 “현재 틀어진 축에 놓인 광장은 그것만으로도 기형적일 뿐만 아니라 틀어진 축에 놓인 이순신 장군 동상은 옛 조선총독부를 등진 상태로 지금은 미국 대사관과 삼청동을 긋는 축에 자리를 잡고 있다”며 “세종대왕상도 방향이 잘못되기는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이순신 장군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은 그 형태적 단점에 위치까지 오류를 더하게 된 것이다.

애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본래 문화재청에서 제안한 광화문광장은 세종문화회관 쪽 보도와 연결해 사용하는 안이었다. 현재 도로로 끊어진 단점을 극복하고 접근성을 용이하게 하는 안이었다. 그 속에는 육조거리의 복원과 함께 일제의 축을 우리의 축으로 되돌려놓는 해법도 담겨 있다(유홍준, ).

“합의 없는 국가상징거리는 재고돼야 한다.”(승효상)

열린 듯 엄격하게 폐쇄된 광장

지난 2년 동안 광화문광장에서 벌어진 일들은 관변 이벤트와 국가 행사가 전부였다. 세종대로 광화문광장에서 여는 행사는 서울시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서울시는 2009년 6월22일 광화문광장 사용 및 관리 조례 제·개정안을 확정했다. 배제를 전제로 한 것이다. 광화문광장의 일부 또는 전부를 이용함으로써 불특정 다수 시민의 자유로운 광장 이용을 제한하는 특정한 사람 또는 단체는 광장 사용 허가 신청서를 사용하고자 하는 날의 60일 전부터 7일 전까지 시장에게 제출하고, 시장은 공공질서를 확보하기 위해 광장의 조성 목적과 다른 법령 위배 여부를 고려해 허가 여부를 결정한다. 중복되는 경우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행사가 우선이다. 8월15일 광복절 행사는 국가 행사이므로 1순위다. 집회는 신고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은 관할 경찰서인 종로경찰서 관계자의 설명으로 해소된다. 집회 신고 접수를 주관하는 종로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광화문광장은 서울시 관리를 받고 있어서 서울시에서 사용 허가가 내려져야 집회 신고가 가능한 곳”이라며 “서울시에서 광장 사용 허가를 받은 뒤에 신고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지난 2년여 동안 집회다운 집회는 한국대학생연합 소속 대학생 150여 명이 지난 5월29일 오후 2시부터 30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벌인 정부의 반값 등록금 공약 이행과 청년실업 문제 해결 등을 요구한 기습 시위가 유일하다. 경찰은 1400여 명의 경찰 병력을 동원해 이들을 해산했다. 국왕의 집무실 코앞에서까지 유생들이 항의하는 것을 인정했던 조선시대의 육조거리보다 못한 광장이라는 말에 토를 달기 어렵다. 홍성태 교수는 “열린 듯 보이지만 엄격하게 폐쇄된 광화문광장을 보면 현재 정권의 속성을 명확하게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논의는 닫혀 있다. 일부에서는 어차피 광화문 앞의 월대(일종의 광화문 진입로)와 육조거리의 복원을 예정하고 있으니 광화문광장의 개축은 언제든 해야 할 일이라고 운을 뗀다. 헛예산을 낭비한 뒤 뜯어고치느냐, 지금이라도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느냐의 차이만 있다는 것이다. 뒤늦게 광화문, 서울시청 앞 배수를 위한 공사가 한창이다. 그 공사가 끝날 즈음 국가를 위한 삽질은 다시 시작된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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