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5월 투쟁을 경험한 이들을 ‘91년 세대’로 호명하려는 시도는 90년대 중반부터 있었다. 정치적 승리를 체험하지 못한 ‘1987년 이후’ 세대가 91년 5월의 상처와 좌절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빚어낸 정치적 구별짓기 욕망의 산물이었다. 물론 그들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세대’라는 구획 만들기는, 청년기의 집단 체험이 개인의 의식 형성에 영향을 끼치고, 이렇게 만들어진 사고와 행동 패턴이 생애 전반에 걸쳐 일관된 형태로 작동한다는 사회심리학적 가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청년기의 공통 경험만으로 세대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 의해 불려지고 호명된 이들이 여기에 공감하고 반응을 보일 때 세대는 비로소 하나의 집단 주체로 구성된다.
레닌보다 그람시, 알튀세에 열광‘386세대’가 그랬다. 1990년 한 언론사가 30대에 접어든 80년대 운동권을 막 보급되기 시작한 신기종 개인 컴퓨터에 빗대 이름을 붙이며 인구에 회자됐고, 운동권들이 그것을 자신의 집단적 상징으로 승인함으로써 386은 세대로서 생명력을 얻었다. 그러나 91년 세대란 명칭은 언론·학계는 물론, 호명된 집단 내부에서조차 별다른 공명을 일으키지 못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의 김현우 상임연구원은 “91년 5월이 남긴 트라우마가 워낙 깊었던 탓도 있지만, 1980년대에 비해 학생운동의 세대 장악력이 크게 약화된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진단한다.
오히려 1990년 초·중반 대학을 다닌 이들은 ‘신세대’ ‘엑스(×)세대’로 불려지길 선호했다. 세대명에 내장된 ‘자유로움’ ‘분방함’ ‘무정형성’의 코드가 본격 소비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든 당시의 젊은 세대에게 강한 호소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죽음’ ‘좌절’ 같은 부호들로 조합된 91년 세대는 애초부터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한겨레경제연구소의 홍일표 수석연구원은 “대학 진학률이 30%를 겨우 웃돌던 상황에서 대학생 집단 일부의 정치적 경험으로 동일 연령 집단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무리였다”며 “단일한 세대 특성으로 수렴되기 힘든 다양하고 모순된 면모들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이 세대가 겪은 ‘상대적 풍요’와 ‘탈억압’의 경험이다. 1970년대 고도성장기에 태어나 80년대 중·후반 ‘3저 호황’(저유가·저금리·저달러)의 수혜 속에 성장하고, 청년기에는 심야영업 규제 완화와 개인용 컴퓨터와 PC통신 보급, 해외여행 자유화의 과실을 맛보며 앞선 세대들에 비해 자유롭고 개인주의적 감성 구조를 키워나갔다는 얘기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불운한 세대이기도 했다. 윗세대가 주도한 1987년의 승리를 선망하며 그들의 성취를 모방하려 했지만, 91년의 좌절과 사회주의권 붕괴를 목격하고 대학 사회의 보수화를 체감하곤 지속적인 위축과 패배감에 시달려야 한 것도 이 세대의 운명이었던 까닭이다. 90년대 운동권들이 레닌보다는 그람시와 알튀세르에, 정치혁명보다 문화혁명에 열광한 것도 이런 현실과 무관치 않았다.
‘70년대산(産)’ 사회 곳곳에서 활약
마흔줄에 접어든 이 세대는 시민단체, 학계, 문화계 등 사회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다. 두드러진 곳은 시민단체다. 윤기돈 녹색연합 협동사무처장을 필두로 이구경숙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처장, 최준영 문화연대 사무처장 등이 지도부에서 활동 중이며, 중진 그룹에는 안진걸 참여연대 사회경제팀장,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상임활동가 등이 있다. 학계에선 신진욱 중앙대 교수(사회학), 김홍중 서울대 교수(사회학), 고병권 ‘수유+너머’ 전 대표 등이 꼽힌다. 소설가 김연수·전성태, 시인 김선우, 영화감독 이송희일, 배우 김여진·고창석 등도 문화계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70년대산(産)’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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