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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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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이라 쓰고 폭로라 읽는다


우리는 왜 고백에 열광하나…
은밀한 이야기 뒤에 숨은 의도를 궁금해하는 음모론이 득세하는 사회
등록 2011-04-15 11:32 수정 2020-05-03 04:26

조선 정조·순조 연간의 문인 심노숭(1762~1837)이 쓴 (自著實紀)에는 ‘나는 여자를 너무 밝혔다’고 고백한 대목이 나온다. 10대 시절부터 30대에 이르기까지 성에 집착해 패가망신할 지경이 됐단다. 시파였던 심노숭은 벽파 영수 심환지 일파를 극도로 증오했다. 는 정적인 이들을 인간 이하로 묘사한다. 요즘으로 치면 포르노그래피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던 탤런트 서갑숙씨의 성고백과 신정아씨의 정치인 손버릇 폭로를 세트로 묶은 셈이다.

보여주기와 보기 욕구는 짝으로 움직인다

강독수업을 하고 있는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과)는 “그래도 선비인지라 자기검열이 존재했다”고 말한다. 글 쓰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선대의 글을 문집으로 묶어내는 후손의 ‘검열’까지 더해져 죽도록 미워도 절제와 품격을 갖췄다는 것이다. 당쟁 비사인 혜경궁 홍씨의 도 신정아씨의 경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사건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굉장히 절제하고 조심스럽게” 쓰였다. 안 교수는 “우리 문화에서 자기 이야기나 다른 이를 해칠 수 있는 이야기를 선정적으로 풀어놓은 예는 거의 없다”고 했다. 근세로 넘어오자 이런 자기검열 시스템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심노숭이 19세기 인물이기 때문에 성고백이나 뒷담화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안 교수의 해석이다.

»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귀는 자기표현 욕구로 살짝 벌어진 입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신정아씨의 책 <4001>에는 경제적 성공과 성적 코드, 권력이 서로를 관계짓는 감춰진 치부가 착종돼 있다. 유명인의 사생활을 엿보고 싶어하는 심리가 작동하는 지점들이다.

»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귀는 자기표현 욕구로 살짝 벌어진 입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신정아씨의 책 <4001>에는 경제적 성공과 성적 코드, 권력이 서로를 관계짓는 감춰진 치부가 착종돼 있다. 유명인의 사생활을 엿보고 싶어하는 심리가 작동하는 지점들이다.

가 나온 지 200여 년, 한국 사회에 돌출한 신정아씨의 고백록 은 어디에 빨대를 대고 10만 부나 팔려나갔을까.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인문의학연구소장)는 이윤 동기를 의 가장 큰 배경으로 꼽으면서도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진단한다. 세상살이 자체가 내러티브이고,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욕망은 누구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문학이나 예술이 이런 자기표현 욕구의 산물인데, 신정아씨의 경우 자신한테 붙은 사회의 낙인을 벗고 싶은 욕망이 컸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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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신경정신과)는 ‘굳이 보여주고·굳이 보려는’ 관계를 문명과 학습이라는 큰 틀로 바라본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관찰하고, 따라하고, 생존 가능성을 높이고, 이를 다음 세대에 알리는 것은 원초적 본능이자 문명의 기본 룰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정아라는 현상을 관음증이라는 병리적 잣대로 보면 얘기가 안 된다고 지적한다. 목욕탕에 불이 나면 당연히 보고 싶다. 이건 병이 아니다. 반면에 불도 안 났는데 목욕탕 창문을 따고 들어간다면 여기서부터는 병적인 상태다. 하 교수가 보기에 신정아씨의 책은 “목욕탕에 불이 난 것과 똑같다”. 이미 실명으로 모든 것을 까발렸는데 안 보면 바보라는 것이다. 게다가 고백과 관음은 이미 도처에 있다. 미니홈피나 블로그, 페이스북이 사방에 널렸다. 내보이고 싶은 욕구와 보고 싶은 욕구는 짝으로 돌아간다.

신씨의 책을 낸 출판사 쪽은 ‘증언이라고 썼는데 폭로로 읽는다’며 억울해했다. 하지현 교수는 “내보이는 사람은 의도가 없다고 하지만 그 안에는 굉장히 많은 의도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복수가 아니라고 하지만 복수로, 폭로가 아니라지만 폭로로 읽히는 것이다. 이는 음모론이 득세하는 사회의 단면이기도 하다.

은 음모론적 사회구조 역이용한 것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는 한 사회의 신뢰가 무너졌을 때 나오는 음모론적 사회구조를 신정아씨가 역이용했다고 본다. 은 내용의 진실성 여부보다는 이를 둘러싼 공방 자체가 상업적 중요성을 가진다. 그리스에서 중우정치와 대중선동가가 등장한 시기에 소포클레스의 비극 가 인기를 끈 것도, 진실과 거짓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무너지고 흔들렸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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