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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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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신소보다 못한 국정원

첩보작전 대상 인물의 길목도 지키지 않은 초보적 실수…

민간조사 전문가들 “흥신소라면 당장 간판 내려야”
등록 2011-03-03 14:04 수정 2020-05-03 04:26

“국정원이 ‘내곡동 흥신소’로 전락했다.”
국정원을 향해 쏟아지는 비판 가운데 하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흥신소만도 못한 국정원”이라는 지적도 있다. 국정원의 ‘절도 미수’ 행각이 그만큼 초보적이었다는 이야기다. 실제 ‘흥신소’에서도 그렇게 생각할까? 흥신소, 혹은 심부름센터로 불리는 민간조사업계는 이번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국정원의 절도 미수 사건을 바라보는 민간조사 전문가의 주장은 비슷하다. “흥신소를 어설픈 국정원과 비교하지 말라.” 의뢰인의 돈을 받고 일하는 민간조사업계에서 국정원처럼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면, 당장 간판을 내려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국정원 절도 미수 사건이 벌어졌던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1961호 앞에서 호텔 직원이 청소를 하고 있다.한겨레 김명진

국정원 절도 미수 사건이 벌어졌던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1961호 앞에서 호텔 직원이 청소를 하고 있다.한겨레 김명진

특사단 가로 막아 탈출 시간 벌어줬어야

가장 먼저 문제가 되는 대목은 국정원 요원 3명이 모두 객실 안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다. 2월16일 오전 9시20분쯤,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단이 숙소인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신관 1961호를 빠져나가자 낯선 사람 3명이 이 방에 침입했다. 셋 다 검은색 정장 차림이었다. 남성 2명과 여성 1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나중에 국정원 요원으로 사실상 밝혀졌다.

1961호에 들어서자마자 빠르게 노트북 컴퓨터를 살피던 이들은 불과 6분 뒤 특사단 관계자와 갑작스레 맞닥뜨리고 말았다. 오전 10시로 예정된 이명박 대통령과의 면담을 위해 청와대로 가고 있어야 할 인도네시아 특사단 관계자가 방향을 바꿔 19층 객실에 나타난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딪힌 국정원 요원들은 방에 있던 노트북 2대 가운데 1대는 그대로 둔 채 1대를 들고 객실을 빠져나왔다. 여기까지가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알려진 사건 개요다.

산업스파이 추적 및 감시 업무에 익숙한 민간조사 전문가는 국정원의 호텔 객실 침투 과정부터 ‘코미디’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인도네시아 특사단의 동선을 미리 파악하지 못해 객실에서 마주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노트북에서 자료를 빼내려는 목적이었다면, 대상자(특사단)의 소재를 최우선적으로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당시 현장 상황에서는 특사단이 차량에 완전히 탑승한 사실을 확인한 뒤 작전을 진행하는 것이 옳았다. 그런 다음 현장에 요원을 충분히 배치해 길목마다 지키고 있는 것이 최선이었겠지만, 만약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해도 국정원 요원 3명 가운데 최소한 1명은 엘리베이터 앞이나 호텔 복도에서 경계조 역할을 하고 있어야 했다.”(민간조사업체 ㅋ사 김아무개 기업조사팀장)

이 관계자는 국정원의 작전이 전혀 조직적이거나 체계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함께 지적했다. “만약 객실 외부에 다른 요원이 있었다면 관광객이나 호텔 직원을 가장해 객실로 향하는 특사단 앞을 가로막는 등 내부 요원의 탈출 시간을 벌어줘야 했다. 언론 보도를 보면, 국정원이 방심한 탓인지 몰라도 이런 노력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특사단과 맞닥뜨린 것으로 보인다.”

“나라면 일반 절도 사건으로 처리했을 것”

유우종 한국민간조사협회장은 “적어도 국정원이라면 분초 단위로 시간을 계산해서 작전을 진행했어야 하는데, 인도네시아 특사단의 동선을 파악하지 못해 발각됐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며 “언론에 밝히지 못할 (국정원 내부의) 파워게임 등 다른 속사정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스파이 작전의 필수 요소인 위장 및 변장을 빠뜨린 사실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의 지적이다. 위장과 변장의 중요성은 1887년 코넌 도일의 추리소설 시리즈만 봐도 알 수 있다. 명탐정 셜록 홈스는 숱한 위기 상황을 맞지만 위독한 환자나 노동자, 노인 등으로 변신을 거듭하며 현장을 빠져나왔다.

1961호에서 인도네시아 특사단과 맞닥뜨렸을 때 국정원 요원 3명은 ‘외부 침입자’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검은색 정장 차림이었다. 검찰 수사관 출신 민간조사업체 관계자는 “흥신소에서도 그런 실수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6분 만에 되돌아온 특사단 관계자와 딱 마주쳤다는 건 호텔방이 언제부터 언제까지 비어 있을지 사전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부분은 검은색 양복인데, 하다못해 호텔 직원 복장을 하는 등 최소한의 위장이라도 했어야 한다. 이를 의심한 특사단이 나중에 호텔에 확인해볼 수도 있지만, 일단 현장에서는 빠져나오고 봐야 한다. 사건이 터지자 국정원을 흥신소에 빗대던데, 흥신소는 돈 받고 그런 식으로 일처리를 하지 않는다.”

1961호에서 인도네시아 특사단 관계자와 맞닥뜨렸을 때 국정원 요원 3명은 ‘외부 침입자’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검은색 정장 차림이었다. 검찰 수사관 출신 민간조사업체 관계자는 “흥신소에서도 그런 실수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특사단과 마주친 뒤 국정원 요원이 갖고 나온 노트북을 돌려줬다는 것도 헛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대목이다. 민간조사업체 ㄹ사 박아무개 대표는 “현장 요원이 갖춰야 할 필수 자질 가운데 하나가 임기응변 능력”이라고 말했다.

“현장에서는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산업스파이 임무를 띠고 현장에 잠입했다면 들키지 않는 것이 최선일 테지만, 기왕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면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했어야 한다. 국정원이 정말 국익을 위해 작전을 펼친 것이 맞다면 당시 상황에서는 인도네시아 특사단에게 노트북을 돌려주기보다, 차라리 일반 절도 사건으로 방향을 틀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구차하게 노트북을 돌려주면서 영원히 드러내지 말았어야 할 국정원의 개입 사실 등이 드러난 것 아닌가.”

망신의 전적이 한둘이 아니다

국정원의 어설픈 정보 수집 활동이 도마 위에 오른 건 이번 사건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해 6월에는 리비아 주재 외교관으로 활동해온 국정원 직원이 현지에서 리비아 무기목록 등 군사정보와 현지 거주 중인 북한 근로자 1천여 명의 정보를 수집하다 적발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국정원 직원은 리비아에서 강제로 추방당했다. 이보다 조금 앞선 지난해 5월에도 국정원은 국제적 망신을 자초했다. 한국을 방문한 프랭크 라뤼 ‘유엔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 일행을 미행하다가 덜미를 잡힌 것이다. 당시 국정원은 미행 사실을 부인했지만, 라뤼 특별보고관을 몰래 촬영한 사람이 탄 승용차의 차주 주소지가 국정원 부지 안에 있는 유령업체라는 사실이 드러나며 국정원 개입이 기정사실화되기도 했다.

민간조사업체 ㄹ사 박아무개 대표는 “차량 추적의 경우 중간에 차량 몇 대를 끼워넣거나, 차량 운전석에서 후사경으로 볼 수 없는 사각지대를 벗어나지 않는 등 몇 가지 수칙만 지키면 노출될 위험은 거의 없다”며 “검찰이나 경찰 수사관 경험만 있더라도 미행의 기본이 거리 및 각도 유지라는 사실을 아는데 국정원 요원이 어떻게 미행하다가 걸릴 수 있는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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