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 수신료의 뿌리는 일제 총독부가 세운 ‘경성방송국’에 있다. 1926년 11월30일에 설립한 경성방송국 운영을 위해 총독부는 라디오를 소유한 사람들로부터 청취료 1원씩을 받았다. 해방 이후인 1946년, 미 군정은 청취료를 10원으로 올렸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1963년 텔레비전 방송 확대를 내걸고 100원의 시청료를 거뒀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1981년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면서 시청료를 2500원으로 올렸다. 공교롭게도 독재 정부 초창기 때마다 시청료가 인상됐다.
4600원 혹은 6500원, 인상률만 남았나노태우 정부는 한국방송공사법을 개정해 시청료 대신 ‘수신료’ 개념을 도입했다. 방송을 보는 대가로 돈을 내는 시청료가 아니라, 전파를 받아볼 수 있으면 누구나 내야 하는 ‘준조세 특별부담금’으로 수신료를 규정한 것이다. 1995년부터는 한국전력이 수신료 징수를 위탁받았다. 모든 국민이 내는 전기세와 함께 수신료가 통합 부과됐고, 징수율은 99% 수준으로 올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민이 납부한 수신료는 한국방송이 97%, 교육방송이 3%를 받아 방송사 운영 재원으로 사용한다. 현재 연간 수신료 총액은 5646억원 정도다.
현행 수신료 제도는 공영방송이 정치·경제 권력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정신을 담고 있다. 공영방송은 모든 국민이 접근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일정한 시설을 갖춰야 하는데, 여기에는 일정 규모 이상의 재원이 필요하다. 그 돈을 광고에 의존하면 기업의 이해관계에 휘둘리고, 국가재정으로 직접 운영하면 정치권력에 흔들릴 테니, 국민 모두의 십시일반으로 방송의 공영성을 지키자는 뜻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한국방송 수신료 인상도 방송 공영성 문제로 귀결된다. 지난 6월 한국방송 경영회의는 두 가지 수신료 인상안을 채택해 이사회에 제출했다. 현재 2500원의 수신료를 4600원으로 올리고, 주요 시간대를 제외한 광고를 폐지해 광고 수입 비중을 19.7%로 낮추는 방안이 첫 번째다. 한국방송 쪽은 이를 ‘보수적 개선안’이라 부른다. 또 하나의 방안은 6500원으로 수신료를 올리고 상업광고를 완전히 없애는 내용이다. 한국방송 이사회는 두 방안을 두고 내부 논란을 거듭하고 있지만, 이사회의 입장이 정리되는 대로 9월 정기국회에서 이 문제를 다루게 될 예정이다.
일련의 과정에서 문제가 드러난다. 세금을 내는 국민이 관련 논의에 참여할 방법이 사실상 막혀 있는 것이다. 현재 방송통신위원회는 대통령 소속 기관이다. 방통위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5인 위원 가운데 3인이 대통령 또는 여당의 몫이다. 방통위는 한국방송 이사회의 이사를 선임한다. 한국방송 이사회는 대통령에게 한국방송 사장 후보를 제청하고, 대통령은 그를 임명한다. 한국방송 사장이 이끄는 임원진이 수신료 인상안을 내놓으면 한국방송 이사회가 이를 심의 의결하고, 방통위가 또 한 번 의결한 뒤, 여당이 다수를 이루는 국회가 승인한다. 다수 국민은커녕 야당이 개입할 여지조차 많지 않다.
국민 쌈짓돈 모아 질 낮은 방송시장 조성?
거대한 고리의 핵심은 방통위다. 2008년 관련 법이 바뀌기 이전인 방송위원회 시절에는 여야 정당 추천 3인, 국회 문광위 추천 3인, 방송위 호선 3인 등으로 9명의 방송위원을 뽑았다. 특히 방송위가 호선하는 3명의 상임위원 가운데 2명은 반드시 야당 대표와 협의해 추천하게 돼 있었다. 대통령과 여당이 방송위원의 절반을 장악할 수 없도록 장치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그 구성을 바꾸면서 방통위는 사실상 대통령의 의중이 직접 관철되는 기관이 됐다.
정부 출범 이후, 이명박 정부는 한국방송 사장을 갈아치웠다. 권력에 대한 비판 보도는 사실상 종적을 감췄다.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굳이 수신료까지 올려야 할 이유가 있을까? 최시중 방통위원장이 지난 1월 그 이유를 말했다. 최 위원장은 기자간담회에서 “수신료를 인상하면 7천억~8천억원 규모의 광고가 민간 시장으로 이전되는 효과를 낼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서 ‘민간’이란 종합편성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를 말한다. 조선·중앙·동아일보 등이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달려든 종합편성채널이다. 방통위는 올해 말까지 사업자를 최종 선정하겠다는 방침이다. 지난해 언론법 날치기 통과가 조·중·동 종편 진출의 ‘법적 토대’였다면, 한국방송 수신료 인상은 종편 진출 이후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다.
이남표 문화방송 연구위원은 정권의 구상대로 모든 일이 완료된 뒤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예상했다. 광고수입이 줄어도 수신료 인상에 성공하면 한국방송의 재정에는 별 차이가 없다. 따라서 방송 품질의 개선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오히려 수신료 인상 과정에 적극 역할한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정치적으로 더욱 예속될 것이다. 수신료 인상으로 형성된 광고시장을 노리고 종편채널들은 상업성 짙은 프로그램을 편성해 치열하게 경쟁할 것이다. 채널이 늘어난 만큼 주요 연예인의 출연료는 폭증하고, 이에 따라 제작비 부담도 늘어난다. 시간이 갈수록 싸구려 프로그램의 선정성 경쟁이 치열해진다…. 이 연구위원은 “수신료 인상은 일종의 세금 인상인데, 국민의 주머니를 털어 이런 식의 방송시장을 만드는 게 온당한 일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2009년 한국방송 결산을 보면, 총수입 1조3508억원 가운데 순이익만 693억원에 이르렀다. 품질 높은 공영방송을 만들 재원은 이미 한국방송 안에 있다. 그럴 뜻이 이명박 정부와 방통위, 한국방송 이사회와 경영진에게 있는지가 문제일 뿐이다. 그래도 수신료 인상을 강행한다면?
20년 전에도 ‘땡전방송’ 반대
시민단체들은 ‘수신료 거부 운동’을 거론하고 있다. 25년 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85년부터 한국방송의 ‘땡전방송’에 항의하는 시민들 사이에서 시청료 거부운동이 일었다. 그 해 8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산발적으로 시도되던 시청료 거부운동을 범국민행동으로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당시 KNCC가 발표한 ‘목회서신’을 보면, “한국방송은 프로그램의 제작과 전달과정에서 공기(公器)로서의 정확한 자세를 찾아볼 수 없고 시청자들을 소외시킬 뿐 아니라 정부의 국민 지배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운동은 날로 확산돼 1986년 1월 ‘한국방송 시청료 거부 기독교 범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됐고, 같은 해 9월에는 전국을 망라한 민주화운동단체가 모여 ‘시청료 거부 및 자유언론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했다. 시청료 거부 운동은 군사정권 아래서 전국 동시다발로 진행된 최초의 조직적 시민운동이었다. 결국 1988년 무렵, 시청료 징수율은 44.3%까지 떨어졌다. 20여 년 전, 한국방송은 국민의 절반 이상이 돈 내길 거부하는 방송이었다. 지금은 얼마나 다를까.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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