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라 생각하시고 마음 편하게 의견을 말씀하세요.”
지난 9월8일 윤종오 울산 북구청장이 중소상인 5명을 맞았다. 상인들은 이 지역에 들어설 예정인 대형마트 ‘코스트코’를 막아달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자본력을 가진 대형마트가 들어서면 2천여 명의 주변 소상공인은 물론 그곳에 물품을 대는 150여 개의 중간 공급상까지 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윤종오 구청장은 “법적인 수단으로 입점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명확하게는 없다”면서도 “건축허가를 내주지 않는 방식으로 막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답했다. 또 “구청이 막으면 대형마트가 소송을 낼 수 있겠지만, 1~2년의 (소송) 기간이 걸리는 동안 입점이 미뤄지거나 제풀에 꺾일 것”이라며 “필요하면 기자회견을 열어서라도 공개적으로 이런 방침을 천명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시장 논리’ 보완하는 ‘구청장 논리’
윤 구청장의 말에 중소상인들은 얼굴이 펴졌다. 신울산슈퍼마켓사업협동조합 차선열 이사장은 간담회가 끝난 뒤 “그동안 울산시를 찾아가봐도 ‘현실적인 대안이 없다. 시장 논리에 맡기자’는 말만 들었다”며 “새 구청장이 규제 의지를 밝히니 많은 기대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울산 북구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대형마트와 기업형슈퍼마켓(SSM)의 진출로 중소상인들이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다. 이들이 대형유통업체 입점 규제를 요구한 것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해 7월 충북 청주 재래시장에서 가게 4500여 곳이 문을 닫은 채 시위를 벌였고, 지난 2월에는 중소상인 수십 명이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 모여 단식농성도 펼쳤다. 지난 8월에는 서울 화곡동에 들어설 기업형슈퍼마켓 입점에 반대하며 주위 상인들이 단식농성을 했고, 9월7일에는 서울 염창동 기업형슈퍼마켓 입점 예정지 앞에서 동네 슈퍼마켓 주인이 자기 승합차에 불을 지르기까지 했다.
1년 넘게 이들의 목소리가 계속 커져가고 있지만 정부는 자유무역협정(FTA)을 이유로 요지부동이다. 국회 역시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이 주축이 돼 기업형슈퍼마켓을 규제할 수 있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을 제출했지만, 법사위에서 한나라당과 외교통상부의 반대에 부딪혀 본회의에 상정조차 하지 못했다.
이런 갈등을 풀어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새롭게 얼굴을 내민 기초자치단체장들이다. 윤종오 울산 북구청장을 비롯해 ‘위생점검’이라는 칼로 기업형슈퍼마켓의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노력하는 서울 노원·성북구청장 모두 초선 기초자치단체장이다. 김성환 노원구청장은 취임 뒤 입점을 준비 중이던 홈플러스 쪽에 “우리 구 관내에는 이미 대형마트를 포함해 기업형슈퍼가 다수 영업 중이며, 지역 영세 유통업계의 생계에 상당한 위협이 되고 있는바, 소상공인·지역유통업체 보호 및 상생 협력을 고려하여 입점 계획을 철회해주실 것을 요청드린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동시에 기존 10곳에 이르는 기업형슈퍼마켓에 대해 7월 이후 두 달간 13차례나 위생점검을 벌였다. 그 결과 한우 개체식별번호를 표시하지 않는 등 미비점이 드러난 곳에 영업정지나 과태료 처분을 내렸다. 노원구는 “영세상인 보호를 위해 가능한 행정규제 수단을 모두 동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성북구 역시 지난 9월7일 관내 6개 기업형슈퍼마켓을 대상으로 위생점검을 벌였고, 일부 규정 위반 업체에 영업정지나 과태료 처분을 내릴 예정이다. 성북SSM대책위원회 박은호 위원장은 “새 구청장이 적극적으로 기업형슈퍼를 규제하면서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며 “구청의 노력에 상인들이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비록 중소상인과 대형 유통업체 간 사업조정 권한은 광역자치단체장에게 있지만, 기초단치단체장이 다른 수단을 동원해 약자를 보호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여기에 서울 광진·구로구청장, 경기 수원시장, 인천 부평구청장, 경남 김해시장 등은 대형마트·기업형슈퍼마켓 규제를 위한 조례 제정을선거 공약으로 내세웠거나 취임 이후 약속한 바 있다.
이처럼 6·2 지방선거는 그동안 한나라당이 싹쓸이했던 지방권력에 큰 변동을 가져오며 주민들의 실생활에도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시민이 한표 한표 행사해 바꾼 지방자치단체 권력은 당선 뒤 100일, 취임한 지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기업형슈퍼마켓 규제, 친환경 무상급식 실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방권력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강원 정선군에서는 지난 8월19일부터 60개 학교 4442명의 학생에게 친환경 재료로 만든 식사를 공짜로 제공하고 있다. 유치원을 비롯해 초·중·고교 학생들이 모두 친환경 무상급식 혜택을 받는 곳은 전국에서 정선군이 유일하다. 최승준 군수가 취임한 지 한 달여 만이다. 정선중·고등학교의 이현자 영양사는 “우리 학교 470명 가운데 급식 지원을 받는 아이들이 70여 명이었는데, 이젠 쭈뼛쭈뼛하지 않는다”며 “아이들이 ‘급식비가 줄어 엄마가 아주 좋아해요’라고 말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최 군수는 친환경 무상급식으로 군비 8억원이 소요되지만 그에 못지않은 경제적 효과를 누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교육 현장에서 왕따가 없어진 것은 물론 지역의 쌀 생산량 절반이 지역 학교에서 소비되는 등 지방경제에도 도움이 되고 있다”며 “서울 강북구와 도봉구에 친환경 옥수수를 납품할 예정인데 ‘우리 지역 아이들이 먹는 것’이라고 강조하니 쉽게 납품이 결정됐다”고 말했다. 최 군수는 무상급식을 반대한 직전 군수 출신의 한나라당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서울 성북구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성북구는 오는 10월부터 초등학교 6학년에게는 무상급식을, 초등학생 전체에게는 친환경 급식을 실시할 예정이다. 내년에는 초등학교 전 학년, 2012년에는 중학교까지 친환경 무상급식을 확대할 계획이다. 강북·광진구도 내년부터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친환경 무상급식을 실시하기로 하는 등 서울의 민주당 출신 구청장 대부분이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여기에 106명 가운데 102명이 한나라당이던 서울시의회에서 민주당(79명)이 과반을 차지하고, ‘진보 교육감’이 서울시교육감을 맡으면서 더욱 힘이 실리고 있다. 지난 9월9일에는 허광태 서울시의회 의장과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고재득 서울구청장협의회장이 오세훈 서울시장과 ‘서울교육행정협의회’를 꾸려 정례적으로 교육 현안을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서울교육행정협의회는 초등학생 무상급식을 비롯해 사교육·학교폭력·학습준비물 없는 ‘3무 학교’ 실현 등을 논의할 계획이다.
경기도 역시 고양시가 지난 8월부터, 안산·수원시는 오는 10월부터 초등학생 5~6학년을 대상으로 친환경 무상급식을 실시하고 있거나 할 예정이다. 경기도는 진보 교육감인 김상곤 교육감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무상급식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2012년까지 경기도의 초등학생 전체, 2014년에는 중학생 전체로 확대할 계획이다.
민주노동당 후보가 당선된 울산 북구와 인천 동·남동구 역시 친환경 무상급식에 적극적이다. 울산 북구는 내년부터 초등학교 6학년을 대상으로 시범사업을 실시하고, 인천 동·남동구는 하반기에 관련 조례를 마련해 내년부터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친환경 무상급식을 실시할 예정이다. 민주당이 집권한 인천 부평구, 충남 아산시와 대전 유성구 등도 같은 상황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무료 예방접종 등의 정책도 현실화되고 있다. 민주노동당 출신이 처음으로 구청장을 맡은 인천 남동구는 현재 구청 안 190명 정도의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기 위해 실태를 파악 중이다. 안창현 구청장 비서실장은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을 쓰는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울산 북구 역시 비정규직 40여 명을 대상으로 무기계약직화를 추진하고 있다. 서울 서대문·노원·성북·구로·동대문구와 경기 부천시 등은 민노당·국민참여당 등이 야권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센터 건립이나 비정규직의 단계적 축소 등을 합의한 바 있다.
또 인천 남동구는 내년부터 0~12살 어린이가 동네 병·의원에서 필수 예방접종을 할 경우 돈을 받지 않도록 할 계획이다. 현재는 보건소에서만 실시되는 무료 예방접종을 확대한 것이다. 남동구 관계자는 “총 20억원가량의 예산이 드는데 국비와 시비 지원이 있으면 더욱 쉽게 진행할 수 있다”며 “지원이 안 되면 구비만으로라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울 구로구도 예산이 확보되는 대로 0~6살 어린이의 동네 병·의원 예방접종을 무료화하고,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생후 1년간 의료비를 무상 지급할 계획이다.
이처럼 기초자치단체의 변화는 실제 시민의 삶과 맞닿아 있다. 기초자치단는 시민이 체감할 수 있는 행정을 펼치는 곳이기 때문이다. 고원 상지대 교수(정치학)는 “지난 6·2 지방선거는 시민들이 삶에서 복지나 안정을 절박하게 요구하고 있음을 드러냈다”며 “그 결과 친환경 무상급식 등 서민을 위한 정책이 현실화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변화한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의 정책에 시민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4대강 사업’이다. 경상남도와 충청남도는 정부의 4대강 사업에 맞서 9월 말이나 10월 초에 대안을 제시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지역 주민과 전문가, 시민단체 활동가 등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경남도는 ‘생명과 풍요의 낙동강 가꾸기 심포지엄’을 9월9일과 9월16일 두 차례 연다. 충남도 역시 ‘충청남도 4대강 사업 재검토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금강 주변 7개 시·군의 여론을 수렴하는 동시에 ‘4대강 사업 전문가 포럼’을 구성해 의견을 모으고 있다. 특위 위원장인 허재영 대전대 교수(토목공학)는 “지역민의 의견을 반영하고 전문가 포럼에서 제출한 보고서를 검토한 뒤 금강사업 방향의 대안을 9월17일께 제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때로는 정부가 못하는 일을 지방정부가 대신하기도 한다. 인천시는 대북사업을 통해 이명박 정부 들어 냉랭해진 남북관계에 온기를 불어넣을 계획이다. 시는 통일부의 승인을 받아 북한 함경북도 온성군 어린이들에게 1억원어치의 빵과 생필품 등을 9월16~17일 전달한다. 지원 품목은 온성군 24개 유치원 어린이 1500명이 먹을 빵과 두유 3개월치, 신발과 옷, 추석 선물상자, 유치원 공동 비품 등이다. 또 남북 유소년축구팀의 친선경기를 매년 평양과 인천에서 한 차례씩 열기로 한 기존 합의를 실행에 옮기고,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 북한이 참가할 수 있도록 교류·협력 사업을 벌일 예정이다. 윤관석 인천시 대변인은 “전국 16개 광역 지자체 가운데 인천이 처음으로 대북 지원을 하는 것”이라며 “인천은 접경지역에 가까운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대북관계에 민감하고 남북관계가 시민의 삶과 직접 연결돼 있어 남북관계 개선에 선도적인 역할을 맡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정부가 대북 지원에 쉽사리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방정부가 나서 남북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되도록 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더 이상 중앙정부 들러리가 아니다
이처럼 지방정치가 시민의 일상에 구체적 변화를 주는 한편 중앙정부 정책에까지 영향력을 발휘하는 새로운 지방자치시대가 열리고 있다. 박원석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기존 지방정부가 중앙정부의 보조적 역할에 그쳤다면 이제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앞으로 생활정치, 풀뿌리 정치가 실현될 가능성이 열린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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