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모임마다 자체 청문회, 높아가는 시민의 도덕 감수성

‘줄줄이 낙마’ 거치면서 자격 기준 토론 활발해져…

‘공정 사회’ 강조한 이 대통령 언행일치에 주목
등록 2010-09-07 16:23 수정 2020-05-03 04:26
‘공정사회 구현’의 첫 희생물이 된 김태호 전 국무총리 후보 자. 청와대는 인사청문회 통과를 목표로 검증된 후보, 준비 된 후보를 찾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종찬 선임기자 rhee@hani.co.kr

‘공정사회 구현’의 첫 희생물이 된 김태호 전 국무총리 후보 자. 청와대는 인사청문회 통과를 목표로 검증된 후보, 준비 된 후보를 찾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종찬 선임기자 rhee@hani.co.kr

세대교체, 활력, 소통.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 후반기를 맞아 지난 8월8일 새 내각 진용을 발표하면서 내세운 핵심 키워드다. 세 단어를 집약해놓은 ‘대표 상품’은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였다. 그런데 김 후보자는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이재훈 지식경제부 장관 후보자와 함께 인사청문회의 벽을 넘지 못하고 8월29일 낙마했다. 형식은 후보자들의 자진 사퇴였다. 하지만 청문회 과정에서 드러난 거짓말과 부동산 투기 혐의가 짙은 잦은 위장전입, ‘쪽방촌’ 투기 등에 민심이 들끓었고 다급해진 한나라당의 요청에 따라 이 대통령이 사실상 지명을 철회한 것이다.

소셜 네트워크가 연 ‘국민 검증 시대’

‘국민 검증 시대’라고 불릴 만큼, 공직 후보자들의 인사청문회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청문회 내용이 실시간으로 중계됐다. 소셜 네트워크 이용자들은 이를 전파하는 데 그치지 않고 후보자들 답변의 허점을 파고드는가 하면 직접 질문을 만들어 올렸다. 김 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열린 국회 인사청문특위와 장관 후보자들 인사청문회가 열린 각 상임위의 야당 의원들은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후보자들에게 질문을 하면서도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들어온 국민의 질문”이라고 소개한 뒤 질문을 이어갔다.

이 대통령은 세 후보자가 사퇴한 다음날인 8월30일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청와대가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데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총리와 장관의 사퇴를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솔선수범’이라는 표현도 썼다. 이 대통령이 ‘공정사회 구현’을 목표로 시민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일부러 문제 많은 인사들을 공직 후보자로 지명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번 인사청문회는 또 다른 의미에서 ‘국민 검증 시대’를 연 계기가 됐다.

인사청문회의 열기가 한창 달아올랐을 즈음, 그리고 청문회가 끝난 이후 각종 모임에서 ‘모의 인사청문회’가 성황을 이뤘다. 단골 메뉴는 이번 인사청문회에서 문제가 됐던 △위장전입 △투자와 투기의 경계가 모호한 부동산 문제 △엄격하게 법으로 금지하기 이전 부동산 거래 과정의 ‘다운계약서’ 관행 등이었다. 공직 후보자들의 잘못을 비판하던 잣대를 스스로에게 들이대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들 대부분은 청문회에 설 가능성이 높지 않은데도 말이다.

기업체 임원과 법관 등이 포함된 어느 가족 모임에서는 공직자의 도덕성이 도마 위에 올랐다. 자신들의 사례와 청문회 주인공이던 후보자들의 문제점을 비교하면서 ‘커트라인’이 어느 정도인지가 논란이 됐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재훈 지식경제부 장관 후보자의 경우 서울 종로구 창신동 ‘쪽방촌’ 투기가 결정적 낙마 사유가 됐는데, 이 후보자의 ‘노후를 대비한 투자’가 쪽방촌이나 서울 강남 3구가 아닌 다른 지역이었다면 살아남았을까? 당시 부동산과 전쟁을 벌이던 노무현 정부의 산자부 차관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 자리에서는 “나라를 위해 일하는 고위 공직자들에게는 일반인에 비해 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는 의견과 함께 “투자와 투기의 기준이 모호하다”거나 “도덕성에 집중하다 보면 업무 능력이나 정책과 비전에 대한 검증은 소홀해질 수도 있다”는 반론도 있었다.

상관이 선물한 과일상자도 거절한 서기관

최근 기자가 참석한 대학 동창 모임에서도 청문회가 열렸다. 공직 후보자가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위장전입이나 부동산 거래 경력 등을 캐물은 뒤 적격 여부를 판단해주는 방식이었다. 술자리 놀이 비슷하게 진행됐지만 분위기는 진지했다. 한 참석자가 “10여 년 전 아파트 청약 통장 제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청약 자격을 상실했다가 은행 쪽의 권유로 기준이 낮은 경기도로 주소를 이전해 자격을 되살린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어찌 보면 ‘생계형 주소 이전’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위장전입에 해당하므로 인사청문회장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말라는 권유가 뒤따랐다.

참석자들의 인사청문회 관전평은 대체로 일치했다. “해도 해도 너무했다”거나 “그렇게 자기 관리를 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이 그런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생각이 아예 없었거나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한 참석자는 자신의 경험을 털어놨다.

“청와대 직원 몇몇이 회식 끝에 어느 비서관 집으로 몰려갔다. 자리가 끝날 즈음 이 비서관이 직원들에게 과일 한 상자씩을 선물로 건넸다. 정부에서 파견 나온 30대의 젊은 서기관은 끝내 고사했다. 다른 사람들이 ‘직장 상사인데 그 정도야 호의로 받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하자 그 공무원은 ‘○○○ 장관이 가끔 직원들에게 격려금을 주신 적이 있는데 번번이 받지 않아서 심하게 혼난 적이 있었다’면서 웃더라. 그 친구는 김대중 정부 말기 장상·장대환 총리 후보자의 낙마 과정을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어떤 꿈이 있는지는 몰라도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문제는 김태호 총리 후보자 낙마 이후 인사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총리감을 물색하고 있는 청와대가, 앞에 언급한 서기관처럼 젊은 날을 살아온 후보자를 찾을 수 있느냐는 점이다. 이 대통령은 ‘중도실용·친서민’에 이어 8·15 경축사에서 “공정한 사회”를 처음 언급한 이후 연일 ‘공정사회’를 강조하고 있고, 인사청문회가 한창이던 지난 8월23일에는 “조금 더 엄격한 인사 검증 기준을 만들라”고 지시한 바 있다. 게다가 인사청문회에 대한 시민들의 주목도는 한층 높아졌다.

이 대통령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 지켜보고 있다. 한나라당 지도부와 의원들도 임기 초반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아 거침없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청와대의 인사·검증 라인 문책 요구에 청와대가 “사람보다는 시스템이 문제”라고 피해가고 있지만, 총리 낙마 사태가 재연될 경우엔 “공직이나 인사에 대한 이 대통령의 인식이 문제”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면서 이 대통령이 직접 공격받는 사태로 번질 수 있다.

낙마 사태 재연 때는 레임덕 가속화

현재 청와대는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는 준비된 후보, 검증된 후보를 찾다 보니 이미 청문회를 거친 장관이나 정치인 출신, 법조계 인사 등을 후보군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재희 전 보건복지부 장관,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김황식 감사원장, 조무제 전 대법관,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 김진선 전 강원지사, 이완구 전 충남지사, 정우택 전 충북지사,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이석연 전 법제처장, 김종인 전 의원 등이 거론된다. 그런데 검증된 후보, 준비된 후보가 있었다면 굳이 김태호 후보자를 앞세울 이유가 있었을까. 이명박 정부에는 레임덕은 없고 기승전결만 있을 뿐이라던 청와대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