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초 평양을 방문해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고위 관계자를 만나고 서울에 온 박한식 미 조지아대 석좌교수가 흥미로운 말을 꺼냈다.
“북쪽 관계자들과 대화를 해보니 의외로 북-미 간 대화 및 교류에 적극적인 입장이었어요. 천안함 사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미국 민간단체의 방북과 대북 지원사업도 재개될 것이고, 재야의 고위급 인사가 방북해 획기적인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고 봐요.”
이 발언 뒤에는 두 개의 키워드가 숨어 있었다. 하나는 미국의 고위 인사가 방북할 경우 북-미 간 고위급 회담이 가능하다고 시사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이 임박했다는 것이었다.
인도적 방문자 vs 정치적 해결사청와대를 들러 남북대화에 대한 북쪽의 입장을 전달한 박 교수는 미국에 돌아가 카터 전 대통령을 만났다. 장시간의 대화가 이어졌다. 북쪽의 입장뿐 아니라 천안함 사건을 둘러싼 한반도의 긴장 상태, 방북의 의미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고 한다.
카터 전 대통령은 이때 방북 결심을 굳혔고, 곧바로 미 국무부에 방북 승인을 요청했다. 8월 초 미 국무부는 “방북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8월11일 과의 통화에서 박 교수는 “조만간 북-미 관계에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2주 뒤 마침내 카터 전 대통령은 방북길에 올랐다. 1994년 6월 방북해 1차 북핵 위기 해소에 결정적 역할을 한 지 16년 만에 다시 북-미 관계의 ‘해결사’로 나선 것이다. 당연히 그의 방북이 한반도 정세에 또 하나의 ‘반전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전망은 엇갈린다. 우선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이 지난해 8월의 클린턴 전 대통령처럼 억류된 미국인 곰즈의 석방에만 초점이 맞춰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 정부 인사들은 그의 방북이 개인 차원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방북이 제재 국면인 대북 기조의 변화 조짐으로 해석되는 것을 막겠다는 뜻이다. 실제로 카터 전 대통령의 이번 방북에는 1994년의 1차 방북 때와 달리 미 행정부 관료는 동행하지 않고 부인 로절린과 카터센터 대표 겸 최고경영자인 존 할드만 박사 등만 함께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순수한 개인 방문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의 활동 이력이나 북-미 관계의 가변성을 고려할 때 국면 전환의 돌파구를 마련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카터 전 대통령은 지난해부터 북한에 특사로 가고 싶다는 뜻을 수차례 피력해왔다. 이번 방북도 단순히 곰즈 석방 차원을 넘어 북-미 관계의 교착 상황을 타개하려는 목적으로 이뤄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도 형식은 개인 방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2차 북핵 실험으로 조성된 위기를 완화하고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방북으로 이어졌다. 특히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을 계기로 북-미 대화와 6자회담 재개에 적극 나섰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3월 이후 중단된 북-미, 남북 대화 복원을 위해 카터 전 대통령에게 모종의 선물을 내놓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엇갈리는 전망 속에서 주목해봐야 할 대목은 북-미 대화와 6자회담 재개의 키를 쥐고 있는 미국과 중국, 그리고 한국의 최근 행보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8월 초 대북정책 평가회의를 소집했다. 외부 전문가들을 초청한 가운데 북한 정책 관련 회의를 열었다는 것이다. 특히 기존의 한반도 전문가 라인 대신 북한 문제에 직접 관여하지 않으며 통상 큰 그림의 장기적 외교정책을 기획·입안하는 국무부 정책실이 이 회의의 준비를 맡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기적으로도 이 회의를 거치면서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이 결정됐다.
‘오바마 독트린’ 나올까이와 관련해 박한식 교수는 주목할 만한 발언을 했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이 머잖아 지금까지 힐러리의 대북정책과 다른 ‘오바마 독트린’을 내놓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며 “오바마 대통령이 몇 달 안에 북한과의 대화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나오리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표면적으로 북한의 태도 변화가 전제되지 않는 한 직접적인 개입 정책은 피한 채 대북 압력·제재와 동맹국과의 조율을 중시하는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은 큰 틀에서 변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복잡한 논의 과정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번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 때 내놓을 북한의 카드에 따라 큰 틀의 전환이 고려될 수도 있는 것이다.
국면 전환을 위한 중국의 노력도 본격화되고 있다. 지난 8월16~18일 북한을 방문해 완전한 견해 일치를 본 중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인 우다웨이 한반도사무 특별대표는 6자회담 재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26일 방한한 뒤 일본·미국·러시아를 잇달아 방문한다. 중국은 올 3월 북한·미국과 합의를 봤던 3단계 중재안(북-미 추가 접촉 → 6자 예비회담 → 6자 본회담 개최)을 다시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정부는 아직까지 천안함 사태와 관련해 사과를 비롯한 ‘책임 있는 행동’을 북이 우선 실행하고 핵시설 불능화 재개 등의 조처가 이뤄져야 남북대화와 6자회담이 가능하다는 ‘원칙론’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제재와 대화를 병행해야 한다는 ‘현실론’의 목소리가 최근 높아지고 있다.
특히 지난 8월21일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회동 이후 ‘박근혜 대중특사설’과 ‘박근혜 대북특사설’이 흘러나오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시기적으로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이 확정돼 우리 정부에 통고된 시점이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대북 쌀 지원 요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명박-박근혜 회동’ 다음날인 22일에 열린 당·정·청 9인 회의에서 안상수 대표가 쌀 지원 재개 검토를 제안했고, 인사청문회에서 이재오 특임장관 후보자와 유정복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후보자도 긍정적 입장을 보였다. 임태희 대통령실장과 이재오 특임장관이 청와대와 정부에 합류하면서 정부의 대북정책이 원칙론보다 현실론 쪽으로 선회할 가능성이 크다는 징후들이다.
최소한 단기적 국면 전환 효과이러한 미국·중국·한국 정부의 움직임은 세부적인 조정을 거쳐야 큰 그림이 만들어지겠지만, 한반도 정세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1994년 1차 카터 방북, 1999년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의 방북, 2000년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방북, 2009년 클린턴 방북 등 과거 미국의 전·현직 고위 관료의 방북은 북-미 관계와 남북관계에 대화 국면을 촉발했다. 미국 정부의 승인 아래 이뤄진 이번 카터 전 대통령의 2차 방북도 단기적으로 대화 국면으로의 전환을 가져올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격적인 방중 결과를 주목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용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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