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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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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8’의 낮은 ‘588’의 밤보다 위험하다

대낮에 일어난 살인 사건을 계기로 돌아본 성매매 집결지의 위험한 오늘…
‘성매매 방지법’ 시행 뒤로 오히려 업소는 늘어
등록 2010-08-10 16:33 수정 2020-05-03 04:26
지난 7월30일 살인 사건이 발생한 서울 청량리 ‘588’ 성매매 업소 전경.

지난 7월30일 살인 사건이 발생한 서울 청량리 ‘588’ 성매매 업소 전경.

오후 2시, ‘청량리 588’이라 부르는 거리는 스산했다. 비가 내리는 골목에는 좀처럼 사람이 들지 않았다.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588번지. 좁은 골목 건너편에 우뚝 선 ㄹ백화점 정문으로는 평일 낮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골목은 두 세계를 예리하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자동차 두 대가 간신히 비껴 지나갈 만큼 좁은 길이 나온다. 길을 따라 쪼르륵 ‘유리방’이 펼쳐진다. 유리방은 쇼윈도같이 펼쳐진 유리문 안에서 성매매 여성들이 호객하는 형태의 업소를 뜻한다. 붉은 불빛 아래 흰색 탱크톱을 입은 여성이 앉아 손님을 기다린다. 짙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한 남성이 흥정을 시도한다. 대낮에도 ‘588’은 돌아간다.

 

대낮의 살인, “누구라도 당할 일”

흥정이 벌어지는 가게 옆쪽으로 ‘폴리스라인’이 길게 쳐진 유리방이 보인다. 여기서 지난 7월30일 오후 2시께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앞서 설명한 풍경과 다르지 않을 한낮이었다. 성매매 여성 박아무개(31)씨가 손님과 함께 방에 들어갔다가 흉기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588’을 떠난 지 몇 년 만인 지난해 7월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져 형편이 어렵다”며 돈을 벌러 돌아왔다는 이였다. 부검 결과, 경찰은 범인이 박씨를 목 졸라 살해한 뒤 흉기로 난자한 것으로 추정했다. 살해 방법에 ‘분노’가 묻어났다.

나흘 뒤 서울 동대문경찰서는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신말석(52)씨를 공개수배했다. 그는 ‘588’의 단골손님으로, 최근엔 박씨를 자주 찾아와 성매수를 한 뒤 따로 만날 것을 요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키 167cm, 단정한 상고머리, 흰색 피부, 와이셔츠와 면바지를 자주 착용, 깔끔한 회사원풍이다. 인상착의마저 무엇하나 특이할 것 없다.

‘588’은 충격에 휩싸였다. 한 성매매 여성은 “여기선 누구라도 당할 수 있는 일”이라며 슬퍼했다. 손님과 단둘이 방에 들어갔다가 살해된 정황은 성매매 여성에게 일상적인, 그러나 애써 무시해온 공포를 되살렸다. 하지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사건이 발생한 업소만 문을 닫았을 뿐 주변 업소는 영업을 계속했다.

성매매 여성 살인 사건은 무수히 반복됐다. 지난 2월에는 부산 부산진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성매매를 하던 여성이 목 졸려 살해됐다. 지난해 8월에는 제주시 연동에서 성매매 여성이 흉기에 찔리고 목 졸려 살해됐다.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는 서울 서대문·종로·강남 등지에서 출장 성매매 여성 11명이 잇달아 살해됐다. 모두 ‘손님’에 의한 살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박씨가 죽었다.

이번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588’이 여전히 그곳에 있었음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동안 성매매 집결지는 2004년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과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시행되면서 한 달간 벌인 대대적인 ‘특별단속’으로 대부분 사라졌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588’은 건재했다.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이하 ‘이룸’)이 ‘588’ 일대에서 현장 지원센터를 열고 성매매 여성 상담과 자활 지원을 시작한 2006년에는 80개 업소가 영업 중이었다. 2007년에는 94개, 2008년에는 104개로 늘어났다. 단속 기간에 다른 지역의 성매매 업소를 떠돌던 여성들은 다시 ‘588’로 모여들었다.

현재 ‘588’에서 성매매를 하는 공간은 유리방 외에 찻집, 쪽방 등이 있다. 찻집은 집결지 내의 작은 주점인데 커피와 주류를 함께 판매하는 성매매 업소다. 쪽방은 대부분 중·장년 여성들이 주거와 성매매를 겸하는 형태로, ‘588’ 내 업소의 25%가량을 차지한다. 한 건물에 3.3m2(1평)가 조금 넘는 방 6~7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고, 대부분 공동 화장실과 공동 부엌을 사용하는 구조다. ‘이룸’이 지난 4년간의 ‘588’ 현장 활동 경험을 담아 펴낸 ‘불온한 확신, 끝나지 않은 천일야화’란 제목의 보고서는 “영업만 하는 쪽방은 싱글침대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의 크기이고 머리가 닿을 정도로 천장이 낮다”고 기록했다. 주거 빈곤과 빈곤 노동의 공간이다.

 

‘월세’ 대려고 위험도 감수

최근에는 ‘588’이 더욱 빈곤해지고 있다. 지난해 5월 서울시는 ‘588’ 일대에 최고 200m 높이의 랜드마크 타워 등 7개 빌딩을 신축하는 내용의 ‘청량리 균형발전촉진지구개발 기본계획 변경안’을 발표했다. 2013년까지 400억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지난 2월에는 ‘588’의 큰 길목 하나가 재정비 대상이 됐다. 10여 개 업소가 모여 있던 건물이 철거됐다. 이제 ‘588’에는 80여 개 업소가 남았다. 거리는 더욱 지저분해졌고 찾는 이는 더욱 줄었다.

‘588’의 성매매 노동자들의 상황도 열악해졌다. 손님이 없어 공치는 날이 늘자 업주들은 타산이 맞지 않는다며 영업 방식을 바꿨다. 손님에게 받는 돈을 업주와 성매매 여성이 5 대 5 정도의 비율로 나누던 방식 대신 ‘월세’를 도입했다. 밤 영업은 한 달에 250만원을 일괄 수금하기로 한 것이다. 이제 성매매 여성은 성판매를 많이 하지 못하더라도 한 달에 일정 금액을 맞춰 업주에게 지급해야 했다. ‘이룸’의 한 활동가는 “어떤 업소는 250만원을 일수로 찍게 한다”고 설명했다.

숨진 박씨는 250만원의 밤 영업 비용을 대지 못해 대신 낮 영업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낮 영업을 하는 이들이 내는 ‘월세’는 100만원이다. 몸이 아파도, 손님이 없어도 어떻게든 월세보다 많이 벌어야 집에 돈을 가져갈 수 있다.

낮 영업자들은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퇴근한다. 밤 영업자들은 오후 4시에 출근해 새벽이나 아침에 퇴근한다. ‘이룸’의 한 활동가는 “뒤를 봐주는 이른바 ‘삼촌’들과 업주들이 업소 주변을 서성이는 밤 시간대와 달리 낮 시간대는 성매매 여성을 지켜주는 이가 없어 오히려 치안의 사각지대”라고 말했다. 성매매 여성을 감시하고 속박하는 ‘삼촌’이지만 정작 성매매 여성이 위험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이들도 ‘삼촌’뿐인 것이 현실이다.

성매매 공간에서 벌어지는 폭력적 상황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된다. “내가 자기 여자친구나 애인이었으면 그렇게 함부로 안 대했을 거예요. 뜨거운 커피를 쏟는 사람도 있고, 머리를 뜯긴 적도 있고, 머리 때리고 뺨 때리고…. 경찰에 신고요? 못하죠.” ‘이룸’과의 상담에서 한 성매매 여성은 손님의 폭력이 힘들고 무섭다고 털어놓았다. 부모의 이혼 뒤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중학교 때 가출해 보육원에 들어간 그는, 보육원 원장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뒤 세상을 떠돌았다. 19살 때부터 20대 후반까지 성매매를 하고 있는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대안을 찾긴 쉽지 않다. 그나마 이제는 ‘588’과 같은 성매매 집결지에 단속의 손길조차 미치지 않는다. 여성가족부와 경찰은 올 들어 성매매 집결지에서 대대적인 단속을 벌인 적이 없다.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최근에는 키스방 등 유사성매매 업소를 중심으로 단속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현실과 동떨어진 정부 대책

정부가 내놓는 정책도 현장과는 멀다. ‘이룸’은 여성가족부의 위탁으로 성매매 여성들에게 검정 고시·학원 수강 등을 지원하며 탈성매매를 돕던 ‘집결지 자활지원사업’을 얼마 전 그만두었다. 지난해부터 여성가족부가 ‘성매매 여성 중 주민등록번호 등을 밝힌 이들에게만 생계지원금을 지급한다’는 방침을 정한 탓이다. 성매매 여성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지원의 한시성도 문제다. 10대 후반에 ‘588’에 들어와 유리방에서 일해온 한 성매매 여성(33)은 “자활 사업의 지원을 받아 검정 고시를 보고 나니 공부에 욕심이 생기는데, 대학교에 가려 해도 등록금이 비싸고, 졸업해도 이 나이에 취직이 될지 모르니 결국 또 이 일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룸’의 이수진 활동가는 “정부 정책은 성매매 여성의 전 생애적인 위기와 빈곤 문제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588’ 은 여전하고, 위험에 내몰린 성매매 여성의 일상도 여전하다.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낯선 남성을 맞아 빈곤한 공간에 몸을 누일 그들을 지켜줄 힘은 어디에도 없다. 박씨의 죽음이 더욱 슬픈 이유다.

글·사진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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