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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여름, 한국인들의 대탈출



국외여행자 수 지난해보다 32% 증가, 인구 대비 출국자 비율 미·일의 2배…
한국 사회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인가
등록 2010-08-06 15:39 수정 2020-05-03 04:26

이쯤 되면 ‘폭발’이다.
올해 들어 5월까지 출국 인구는 494만 명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32%나 늘어났다. 출국 ‘붐’을 타고 항공사들은 역대 최대 실적의 꿈에 부풀어 있다. 여행사들은 몰리는 예약으로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출국자 기준 역대 최대인 2007년 기록(1332만 명)을 깰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단기적 요인, 경기회복·환율안정

2010년 여름, 한국인들의 대탈출.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2010년 여름, 한국인들의 대탈출.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이런 증가세는 올해만의 얘기가 아니다. 1989년 국외여행을 전면 자유화한 뒤, 출국자 수는 20년도 안 돼 11배 넘게 늘었다. 인구 대비 출국자 비율은 27%를 넘어섰다. 미국과 일본의 인구 대비 출국자 비율 13%를 크게 넘는 수준이다. 우리나라 출국 인구 비율은 이제 경제력이 월등히 앞선 선진국을 웃돌고 있다.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1973년 타계한 프랑스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1944년에 출판한 동명의 책에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인간의 운명을 이렇게 표현했다. 21세기 한국인들은 어느새 세계에서 이 말에 가장 적합한 집단으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7월28일, 국내 최대 여행사인 하나투어의 예약 자료를 펼쳐봤다. 8월 국외여행 예약자는 9만9천 명이었다. 지난해 같은 달 5만9천 명보다 무려 68%나 늘어난 수치다. 7월의 여행객 수도 지난해보다 48% 늘었다. 다른 대형 여행사인 모두투어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두 달간 국외여행 예약자가 12만 명을 웃돌았다. 지난해 예약 인구 5만5천 명보다 크게 늘어났다. 하나투어 관계자는 “경기가 풀리면서 실적이 2007년 수준을 넘어설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고 말했다.

항공사들도 신이 났다. 대한항공은 올 2분기 매출액이 2조8천여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경신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올해 처음으로 1조원 이상의 영업이익이 날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아시아나항공도 2분기 매출액 1조2388억원, 영업이익 1775억원으로 창사 이래 가장 좋은 성적을 냈다.

이런 호황의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지난 1~2년 사이 단기적 요인과 10년 이상에 걸친 장기적 요인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단기적 요인으로는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경기회복, 환율안정, 신종플루다. 지난 7월26일 한국은행은 올 상반기 경제가 7.6% 성장했다고 밝혔다. 실물경기의 회복세가 여행산업을 든든하게 받쳐줬다는 뜻이다. 환율도 안정세다. 2009년 3월 1500원을 넘어섰던 환율은 꾸준히 떨어져 올여름 들어서는 1200원 선을 오르내리고 있다. 같은 액수의 원화를 가지고 국외에서 살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졌다는 얘기다. 신종플루의 파고도 잠잠해졌다. 이성태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박사(경제학)는 “2007년 이후 경제위기와 신종플루의 영향 때문에 잠재됐던 여행 수요가 올해 폭발했다”고 말했다.

출국자 수가 올해만 ‘반짝’ 느는 것은 아니다. 출국 인구는 국외여행 자유화 이후 외환위기를 겪기 전까지 해마다 평균 21%의 높은 성장세를 보였고, 외환위기 이후에도 연평균 18% 정도씩 늘었다. 1989년 출국 자유화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기 이전인 2007년까지 출국 인구는 11배 넘게 증가했다. 2008~2009년 2년 동안 침체를 겪은 뒤 올해 다시 나타나는 기록적인 성장세도 이런 장기적 흐름 속에서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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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당 국외여행 지출 일본인의 7.4배

그렇다면 출국 인구가 20년 동안 꾸준히 늘어난 원인은 무엇일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국민소득이 계속 늘었다. 우리나라는 1989년부터 금융위기가 닥치기 전인 2007년까지 18년 동안 연평균 6%씩 성장했다. 둘째, 주5일 근무제도 주목할 만한 변화다. 우리나라는 2004년 7월 공기업과 금융업을 대상으로 주5일 근무제를 도입한 뒤 해마다 도입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우리나라 노동자의 월평균 근로시간도 1998년 199시간에서 2008년 178시간으로 줄어들었다. 자유 시간이 늘어나고 벌이는 늘었으니, 국외로 여행할 수 있는 여유가 많아졌다.

그렇지만 두 가지 요인만으로 출국 인구가 폭발하는 현상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6%인데, 국외여행 수요는 해마다 20% 정도씩 늘었기 때문이다. 국내여행 수요와 비교해보자. 한국관광공사가 낸 ‘국민여행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국내여행에 쓴 시간은 1999년 2억7200일에서 2007년 4억7700만 일로 늘었다. 해마다 6.4% 정도씩 늘어났다. 국내여행 수요는 경제성장과 속도를 맞춰 늘어난 셈이다. 결국 국외 출국 인구만 별나게 많이 증가했다.

외국과 비교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극성스러운 ‘국외여행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 인구 가운데 출국자의 비율을 보니, 우리나라는 2007년 27.3%로 나타났다(표 참조). 1년에 우리나라 사람 100명 중 27명꼴로 국경을 넘었다는 뜻이다. 같은 해 미국과 일본의 비율은 각각 13.5%였다. 출국자 수로 보면, 비율은 우리나라가 2배가 넘는다.

2008년 한국은행이 낸 보고서도 흥미롭다. 보고서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만달러에 근접한 시기에 한국(2007년)과 일본(1987년)의 국외여행 관련 지출을 비교했다.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가 2007년 국외여행으로 지출한 돈이 208억9천만달러였고, 비슷한 1인당 소득을 가졌던 20년 전 일본은 74억4천만달러를 썼다. 우리나라의 지출액이 2.8배 더 많았다. 일본 인구가 우리보다 2.6배 많은 점을 생각하면, 한국인은 한 사람당 일본인보다 국외여행에 평균 7.4배를 더 쓴 셈이다. 보고서는 별다른 분석을 하지 않은 채 “GDP 규모에 비해 한국의 해외여행 지출이 과다”하다고만 풀이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안타깝게도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없다. “관광 혹은 여행 관련 연구가 해외 관광객 유치라는 정책적인 요구에 집중된 탓”(김종원 세종대 교수)이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직관적인 의견을 들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정신병리적 분석들이 나왔다. 크기가 서로 다른 조각 퍼즐을 맞추다 보니, 전체 그림도 조금씩 윤곽을 드러냈다.

우선 과거 국외여행 금지 조처가 미친 영향을 생각해볼 수 있다. 군사정권은 1989년까지 국외여행을 엄격하게 규제했다. 헌법에 보장된 거주·이전의 자유를 국가가 가로막은 셈이었다. 당시 여권과 비자는 특권의 상징이었고, 국외여행은 일부만이 누릴 수 있는 특혜였다. 군사정권은 여권과 비자를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국민의 외부 출입을 틀어막았다. 냉전체제 아래서 국외여행은 사회주의권과 대면하는 기회로도 인식됐다. 당시 국외로 출국하는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소양교육을 받아야 했는데, 교육을 맡은 쪽은 다름 아닌 한국자유총연맹이었다.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던 체코가 우리나라와 같은 해에 국민을 대상으로 여행 자유화 조처를 취한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국외여행 전면 자유화가 1987년 민주항쟁에 뒤이어 나온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민중항쟁을 통해 한국인들은 개인의 의지에 따라 해외로 자유롭게 나갈 수 있는 권리를 쟁취했다.

올해 들어 5월까지 국외 출국자 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2%나 늘어났다. 슬로베니아, 일본, 그리스, 라오스를 여행하는 한국인 관광객들(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한겨레21 박승화, 정용일, 류우종, 윤운식 기자.

올해 들어 5월까지 국외 출국자 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2%나 늘어났다. 슬로베니아, 일본, 그리스, 라오스를 여행하는 한국인 관광객들(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한겨레21 박승화, 정용일, 류우종, 윤운식 기자.

독재정권 시절, 국외여행은 특혜

물론 국외 관광객 수가 폭증한 게 우리만의 경험은 아니다. 서구에서도 비슷한 선례가 있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를 보면, 북미에서 중앙아메리카로 이동한 관광객의 수는 1950~70년 사이 30만 명에서 700만 명으로 불어났고, 유럽의 대표적 관광지인 스페인은 1950년에 외국 방문객이 거의 없었지만 1980년대 말에는 해마다 5400만 명의 관광객을 맞게 됐다. 차이점은 서구에서는 국가가 나서 수요를 통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은 출국을 통제했지만 우리나라보다 35년이 앞선 1964년에 출국 자유화 조처를 단행했다. 오창은 단국대 연구교수(국문학)는 “군사정권이 만든 폐쇄된 공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한국인은 해외여행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가지게 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군사정권 시기에 만들어진 ‘국외여행=특권층의 수혜’ 공식도 오늘날 여행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문옥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장은 “90년대 대거 나온 저렴한 패키지 관광 상품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등 의식과 지위 상승 욕구를 건드렸을 것”이라며 “해외 어디에 가서 무엇을 했다기보다 ‘해외여행을 다녀왔다’는 것 자체가 마치 하나의 벼슬처럼 인식됐다”고 풀이했다. 흥미롭게도, 해외여행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이런 인식은 드러난다. 2005년 한국관광공사가 실시한 설문조사는 국외관광 여행을 떠난 주된 이유를 물었다. 복수응답이 가능한 객관식 문항에 대해, 58.5%가 ‘해외여행을 경험했다는 만족감’을 들었다. 54.8%는 ‘꼭 방문하고 싶던 도시가 있어서’라고 답했다. 특정 지역을 가는 것보다, 외국에 나간다는 것 자체를 즐긴 비율이 높았다.

“한국 사회에 대한 환멸의 정서”

오창은 연구교수는 “여행에는 현재의 공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도피의 욕망이 있다”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정한 목적지를 가고 싶어한다기보다 어디론가 떠나는 체험 자체를 즐긴다는 것은 자신이 사는 한국 사회에 대한 환멸의 정서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꽉 조여진 일상과 스피디한 시스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개인들의 욕망이 해외여행이라는 형태로 드러난 듯하다”고 풀이했다.

우리나라의 높은 무역의존도도 ‘출국 러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변수다. 우리나라 무역의존도는 지난해 82.4%로 중국(45.0%), 일본(22.3%), 미국(18.7%)보다 크게 높았다. 무역의존도는 무역액(수출액+수입액)을 GDP로 나눠 구한다. 높은 무역의존도는 경제 규모에 견줘 무역 비중이 높다는 뜻이다. 그만큼 외국 업체와 접촉이 잦고, 우리나라 비즈니스맨들이 비행기를 탈 일도 많다. 한국관광공사의 ‘목적별 내국인 출국’ 자료를 보면, 비즈니스 목적으로 출국을 하는 비율은 2005년 20.6%였다. 관광(54.8%), 친지 방문(22.8%)에 이어 세 번째로 비중이 높았다. 2006년 7월 우리나라 출국자가 공항에서 출국신고서를 작성해야 할 의무가 없어지면서, 전체 집단을 대상으로 한 여행 목적 등의 통계는 잡히지 않는다. 정기윤 하나투어 홍보팀장은 “관광 수요는 경기에 따라 변동이 심하지만, 비즈니스 목적의 여행은 상대적으로 큰 진폭 없이 꾸준히 늘어나는 편”이라고 말했다.

높은 교육열도 우리나라 사람들을 외국으로 이끌었다. 한국관광공사의 ‘목적별 내국인 출국’ 자료에서 ‘유학·연수’의 비중은 4.3%를 차지했다. 미국 연방이민세관단속국이 7월24일 내놓은 미국 유학생 통계를 봐도 우리나라 학생들의 ‘왕성한’ 활동력을 확인할 수 있다. 단속국의 자료를 보면, 미국에서 유학 중인 한국 학생은 7월1일 현재 10만1428명으로 전체 유학생의 13.8%를 차지했다. 중국 유학생(11만8506명)보다는 적지만 인도(10만57명), 캐나다(2만9185명)보다 많다.

국내 여행지 매력, 아직은…

우리나라가 관광지로는 아직 매력이 떨어진다는 의견도 있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한국의 관광경쟁력은 세계 31위였다. 싱가포르(10위), 홍콩(12위), 일본(25위)에 뒤진다. 한국관광공사의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를 찾는 국외 관광객 수는 2007년 782만 명으로 튀니지(690만 명)와 체코(603만 명)에 못 미쳤다. 세계 35위 수준이었다. 반면 세계관광기구(UNWTO)의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출국 인구는 전세계에서 18번째로 높다. 바깥 손님을 끌지 못하니, 나가는 손님도 잡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진석 내일여행 사장은 “우리나라의 관광 인프라는 외국보다 빈약한데 물가는 비싸니, 국내 관광객들이 외국 관광지를 찾게 된다”고 설명했다. 철학가인 탁석산은 “관광객은 흔히 새로운 지역에서 놀라운 광경, 색다른 음식, 이국적인 풍광을 기대한다”며 “우리나라는 중앙집권적인 전통이 강하고, 개발기를 거치면서 지역색도 많이 사라져 관광 대상으로서는 매력이 떨어진다”고 풀이했다.

우리 사회의 높은 스트레스가 나라를 떠나도록 자극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훈상 동아대 교수(사학)는 “우리나라는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데,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느끼는 스트레스가 높다는 뜻이고 한편으로는 이 스트레스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욕구도 크다는 뜻”이라며 “사람들은 미치지 않기 위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일상적인 공간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려고 국외여행을 선택하는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다층적 요인이 겹쳐져 우리의 염색체에는 ‘호모 비아토르’의 유전자가 새겨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떠돌이들의 세상이 올 거야.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고 물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곳을 찾아 떠도는 떠돌이들의 세상이 올 거야. 떠돌지 않고는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이 올 거라. 나는 경제학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물은 낮은 곳을 흐른다… 이것은 만고의 진리다. 호로룸 바쿰… 세계는 진공상태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 또한 만고의 진리다. 그래서 세계는 움직인다.”(이윤기, ‘호모 비아토르’)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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