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블랙’의 의미를 가진 블랙리스트라면 연루된 인사들의 방송 3사 출연이 다 어려워야 한다. 그러나 실정은 다르지 않나. 그런 점에서 한국방송의 블랙리스트는 기회주의적이고 정치적인 리스트다.”(김종배 시사평론가)
‘한국방송 블랙리스트’ 파문이 커지고 있다. 개그우먼 김미화씨에 이어 진중권 문화평론가,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유창선 시사평론가, 배우 문성근씨 등의 폭로가 이어지면서 한국방송과의 진실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논란 대상자들이 하는 이야기는 모두 사실”
김미화씨가 트위터를 통해 밝힌 블랙리스트는 이미 지난 4월부터 의혹을 사왔다. 한국방송 임원회의에서 의 내레이션을 맡은 김미화씨를 문제 삼자 그 이유를 두고 여러 해석이 나왔다. 당시 침묵을 지켰던 김씨가 7월6일 트위터를 통해 오랜 의혹에 방점을 찍었다.
“저는 코미디언으로 27년을 살아왔습니다. 사실 어제 한국방송에서 들려온 이야기가 충격적이라 참담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김미화는 한국방송 내부에 출연금지 문건(블랙리스트)이 존재하고 돌고 있기 때문에 출연이 안 된답니다.”
김미화씨의 공개적인 문제제기 이후 그동안 알게 모르게 언급되던 블랙리스트 논란 인사들도 수면 위로 다시 떠올랐다. 석연찮은 이유로 프로그램을 하차한 의 정관용씨, 의 윤도현씨, 의 김제동씨 등이다. 김미화씨의 한 측근은 “김미화씨가 블랙리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4월 이전에도 알고 있었으나 믿지 못하다가 최근 어떤 정황에 의해 확신을 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방송 관계자는 “윗선의 기호나 가치관 때문에 적용되던 암묵적인 블랙리스트 문제가 밖으로 터져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블랙리스트의 존재는 한국방송 관계자들도 부정하지 않는다. 지난해 시사종합채널인 1라디오에서 일했던 한 방송작가는 “문서로 존재하지 않는 암묵적 블랙리스트가 적용돼 프로그램의 아이템 선정이나 출연진 섭외에 제약을 받았다”고 밝혔다. “당시 맡고 있던 한 프로그램에서 회의를 거쳐 출연을 섭외했던 김갑수 문화평론가, 노동일 경희대 교수, 유창선 시사평론가 등이 이유도 없이 윗선에서 거부당했다”고 했다.
이런 ‘낙인’은 꼭 진보 논객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다. 진보도 보수도 아닌, 그저 솔직하게 할 말을 하는 사람들도 걸렀다. 비교적 제약이 덜한 FM 라디오도 규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국방송의 한 라디오 PD는 “2009년 봄 개편께 윤도현을 다시 진행자로 앉히자는 얘기가 있었으나 데스크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거절했다”며 “유창선 시사평론가를 포함해 블랙리스트 논란 대상자들이 지금 하는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라고 했다. 또 다른 라디오 PD는 “개인이 아니라도 소속기관이 문제가 돼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한다”며 “지금은 퇴직한 모 본부장은 같은 온라인 매체를 두고 ‘이게 언론이냐’며 해당 언론 소속 기자의 출연을 제약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병순 사장 취임 이후 TV와 라디오에 패널로 출연하던 진보 매체 기자들이 대폭 ‘물갈이’됐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특정 인사의 출연이 프로그램 폐지로 이어지기도 했다. 문화평론가 진중권씨와 정재승 교수가 폭로한 <tv>가 대표적이다. 진중권씨는 “높으신 분께서 진중권 나왔다고 프로그램 자체를 없애버리라고 하셨다더군요. 그래서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했다가 영원히 못 뵙게 됐지요”라고 트위터에 밝혔다. 한국방송은 즉각 “프로그램이 노후화돼 폐지한 것이지 특정인 때문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출연자의 ‘출신성분’을 보고하라
방송 진행자의 도중 하차를 둘러싸고 거론되는 ‘윗선의 지시’는 어떤 방식으로 관철될까? 보통 프로그램 출연자 섭외 등의 업무는 PD와 작가가 협의한 뒤 책임PD(CP)의 지휘 아래 결정된다. 고정 출연자나 아이템 문제 등은 책임PD-부장(EP)-국장-본부장 선까지 올라가며 보고되고, MC나 중요 출연자의 경우는 사장까지 결재 라인이 지정된다. 이때 본부장급 이상과 실무자 사이에 제작 방향에 대해 충돌이 생길 수 있으나 명령 계통상 실무자는 윗선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다. 방송사 내 각종 심의위원회를 통한 심의와 시청률을 통한 평가를 받는 구조에서 PD가 윗선의 지시를 무시하고 자기 소신을 펼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내부 구조뿐 아니라 외부의 ‘부추김’도 작용한다. 김종배 시사평론가는 “외부의 일탈적 자극 요소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정감사 때 국회의원들이 프로그램 진행자나 출연자들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 방송사에 명단을 제출하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명단에는 출연자들의 고향, 출신 학교, 소속기관 등이 적혀 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 소속 최문순 의원(민주당)은 “출연진이 편향적으로 구성돼 있는지 점검하려는 용도로 요구되는 이런 문서가 역으로 악용될 여지도 있다”고 말했다.
이병순 전 한국방송 사장도 취임 이후 프로그램 출연자들의 명단을 제작진에게 요구했다. 한 전직 방송작가는 “1라디오의 모든 프로그램 제작진에게 출연자들의 이름, 소속 등을 적어내라는 지시가 떨어졌었다”며 “방송 일을 수십 년 했지만 그런 명단을 만들어 제출한 건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방송 내용보다 방송 출연자의 ‘출신 성분’이 먼저 문제시된 것이다.
‘출연진 솎아내기’는 곧 ‘제작진 솎아내기’로 이어졌다. 한국방송의 한 라디오 PD는 “개편 때마다 문제적 PD들을 골라내는 바람에 현재 1라디오에는 파업 중인 새 노조에 속한 PD가 한 명도 없다”며 “체제 순응적인 PD들이 자리하면서 시사종합교양채널이 종합교양채널로 전락했다”고 평했다.
블랙리스트 논란의 핵심이 문건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시스템 문제라는 건 여기서 드러난다. 한 라디오 PD는 “처음에는 윗선의 지시에 반발하다가도 여러 번 이런 일이 반복되면 눈치껏 피해가고 아이템도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면서 “윗선까지 올라갈 것도 없이 제작실무자인 PD부터 ‘게이트키핑’이 이뤄지는 게 요즘 실정”이라고 말했다.
윗선이 한 일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지켜져야 할 제작진의 연출권은 출연진뿐 아니라 아이템 선정에서도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윗선에서 일방적으로 내려보낸 ‘오더(order)성 아이템’으로 프로그램이 제작되기도 한다. 김인규 사장 취임 뒤 생방송으로 진행된 헌혈 방송 캠페인, 천안함 모금 방송과 특집 방송이 그 예다. 지난 5월22일 민·군 합동조사단의 천안함 조사결과 발표를 앞두고 한국방송 심야토론팀에는 특별좌담을, 스페셜팀에는 서해교전을 주제로 한 천안함 다큐를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갑작스러운 주제와 프로그램 형식 때문에 곤란을 겪던 스페셜팀 PD들이 당시 제작본부장에게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프로그램 제목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서해교전’이라는 주제가 내려왔을 때 제작진이 반발하자 ‘긴장의 서해’라는 제목으로 ‘서해의 북방한계선(NLL)’을 주제로 다루라는 지시가 다시 내려왔다. 더는 반발하기 어려웠던 제작진이 제목에 ‘평화 공존을 위한 조건’을 넣겠다고 했으나 이마저도 거부당했다.
금지된 아이템도 생겼다. 용산 참사나 4대강 등 현 정권에 부담이 되는 사안은 다룰 수 없었다. 지난해 강을 주제로 특집을 준비했던 환경스페셜팀은 윗선의 지시로 제작을 중단했다.
‘윗선’의 지시는 독립성과 공정성이 최우선이 될 보도국에도 닿았다. 보도국의 한 젊은 기자는 “현 정부가 임명한 이병순 사장 이후로 보도의 자율성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5월, 박재완 당시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의 논문 이중 게재 보도나 최근의 서울 양천경찰서 고문사건,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등이 간판 뉴스인 에서 누락되거나 비중 없이 다뤄진 것을 근거로 들었다. “회사 쪽의 게이트키핑이 심해지자 기자들 스스로 반복되는 다툼을 피하기 위해 자기 검열을 한다”고 했다.
블랙리스트 파문이 확산되며 속속 드러나고 있는 한국방송 제작자율권 침해 문제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불씨가 됐다. 프로그램 제작자율권을 지키고, 공공재인 방송이 정권의 사유재처럼 이용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을까? 김미화씨를 고소하고 〈TV, 책을 말하다〉의 폐지 논란에도 적극 해명하고 나선 한국방송은 “블랙리스트 논란을 불러온 진행자 교체 문제 등은 MC선정위원회라는 기구에서 공정하게 다뤄질 것이기 때문에 현재 논의되는 다른 방지책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PD는 “MC선정위원회는 제작실무자 없이 국장급 간부들이 모여서 논의하는 허울뿐인 기구”라며 “블랙리스트 파문에서 드러난 시스템 문제를 해결할 순 없다”고 반박했다.
기존에 제작자율권을 보장하는 규제 장치가 없던 건 아니다. 한국방송 편성 규약은 한 달에 한 번씩 편성위원회를 열어 논란이 된 프로그램의 제작실무자와 편성책임자가 시비를 가리도록 하고 있다. 김미화씨의 내레이션 문제, 윤도현씨의 프로그램 하차 등도 이 회의를 통해 다뤄졌다. 편성위원회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회사와 노조 쪽 대표가 참여하는 2차 회의기구인 공정방송위원회에서 다시 논의되도록 돼 있다. 그러나 프로그램과 관련한 문제제기에 소극적인 기존 노조와 단체협상 대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새 노조가 회사 쪽을 견제하지 못하는 사이 제작자율권을 보장하도록 만들어진 편성위원회는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구성원 대부분이 새 노조에 속한 라디오센터의 경우 김인규 사장이 새 노조를 인정하지 않아 6개월 동안 편성위원회가 열리지 못하고 있다.
독립성의 제도적 보장이 해결책
공정방송 쟁취를 내건 새 노조가 단체협상 대상자로 우뚝 서지 않는 한 회사 쪽의 게이트키핑을 견제할 세력은 없어 보인다. 한 라디오 PD는 “새 노조가 준비 중인 공정방송위원회가 꾸려지면 제작자율권을 침해하는 각종 외압을 막는 조항들이 우선 마련될 계획”이라며 “김인규 사장 취임 뒤 캠페인 방송국으로 전락한 한국방송이 국민의 방송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연우 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는 “블랙리스트 풍토가 사라지려면 연예인의 사회적 발언과 참여를 자연스럽게 보는 의식 전환과 독립성·공정성을 지키도록 제작진의 자율권을 보장하는 시스템 마련이 필요하다”면서 “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결국 방송의 정치적 독립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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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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