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을 살리겠습니다.”
2009년 12월 결성된 한국방송 새 노조(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방송본부)가 지난 7월1일부터 파업에 들어갔다. ‘단체협약 쟁취’와 ‘공영방송 사수’가 이들의 구호다. ‘눈사람’ 박대기 기자, 〈KBS 8 뉴스타임〉을 진행하던 정세진 아나운서 등 900여명의 노조원이 파업에 동참했다. 노조 파업 때마다 제작 일정상의 이유로 파업에 참여하지 못했던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 PD도 이례적으로 제작 중단을 선언하고 파업에 참여했다. 새 노조의 이번 파업은 사실상 ‘김인규호’ 한국방송에 대한 첫 정면 도전이다.
주요 구성원이 PD와 기자인 새 노조가 파업에 들어가면서 방송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일부 프로그램이 하이라이트 재방송으로 대체되자 회사 쪽은 “새 노조의 ‘불법 파업’으로 인해 재편집분을 방송한다”는 자막을 프로그램 화면 하단에 흘렸다. 합법 파업을 불법으로 호도한 것이다. 또 회사 쪽은 사내 게시판에서 파업을 반대하는 사원들의 글을 모아 보도자료로 배포하기도 했다. 기존의 한국방송 노동조합도 이번 파업을 우려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어둠을 밝히려 켠 촛불을 끄려는 바람이 계속 불었다.
그럼에도 파업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를 묻기 위해 지난 7월7일 파업 현장에 동료들과 함께 선 나영석 PD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일개 조합원일 뿐인 자신이 전면에 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면서도 어떤 질문도 회피하지 않았다.
- 파업 분위기는 어떤가.
= 기존 파업과 비교하면 더 열정적인 것 같다. 방송은 시청자와의 약속이란 측면 때문에 방송사에서는 파업 기간에도 노조원이 일을 한다. 그러나 이번 파업 참가자들은 모든 제작 업무를 중단했다.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이런 결정은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이번 파업이 중요하다는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다.
- 파업 참여도가 얼마나 되나.= 새 노조 조합원은 주로 기자와 PD로 구성됐다. 900여 명 정도로 많진 않다. 3천여 명인 한국방송 노동조합에 비하면 적은 인원이어서 더욱 단결해서 투쟁하고 있다.
- 이번 파업에서 얻으려는 것은 뭔가.= 새 노조가 생긴 이유가 될 듯하다. 새 노조를 통해 기존 노동조합이 하지 못한 것을 해보려는 거다. 한국방송이 공영방송임에도 공정하지 못하다는 시선을 받고 있지 않나. 그런 시선을 어떻게 바꿀 수 있나 고민하다 만들어진 게 새 노조다. 그렇게 만들어진 새 노조가 끼우려는 첫 단추가 단체협상이었다. 하지만 회사 쪽은 새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불성실하게 응했다. 협상 테이블이 없는데 어떻게 공정방송을 위한 규칙을 만들어갈 수 있겠나. 공영방송의 공정성을 찾으려는 싸움이다.
- 경영진은 ‘수신료 인상’에 올인해야 할 때 새 노조가 파업에 나섰다며 더 강경하게 대응하는 것 같다.
= 수신료 인상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준조세 성격을 가진 수신료를 더 올려 받으려면 한국방송이 국민이 내는 수신료에 합당한 책임과 의무를 져야 한다. 수신료 인상을 미끼로 한국방송이 외부 압력에 흔들릴 수 있는 구조라면 이는 합당하지 않다. 영국의 〈BBC〉처럼 자본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공정한 방송을 하겠다는 명목으로 수신료를 걷는 건데, 우리 실정은 권력의 눈치를 보는 상황으로 가고 있어 제동을 건 것이다.
- 경영진과 기존 노동조합은 마치 새 노조가 수신료 인상을 반대하는 것처럼 몰아가는 분위기다.
= 20년째 동결된 수신료를 인상하는 것은 다 같이 노력하는 부분이다. 다만 지금 회사 쪽이 하는 것처럼 자본에 휘둘릴 수 있는 상황에서 빨리 인상하고 도장 찍자가 아니다. 새 노조는 절차적인 정당성을 찾자고 얘기한다.
- 회사 쪽이 조직개편에 참고한다며 24억원을 들인 보스턴컨설팅그룹(BCG) 컨설팅 자료가 사내에서 논란이 된 것으로 안다.= 방송사는 콘텐츠를 만드는 곳이다. 콘텐츠는 상품과 등가로 비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거액의 돈을 들인 컨설팅 자료는 마치 물건을 생산하는 공장을 재단하는 듯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돈이 되지 않는 조직과 사람을 잘라내는 거다. 공영방송은 돈이 안 되더라도 당위성이 있는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를 위한 조직과 사람이 필요한데, 돈으로 치환되지 않는다고 잘라내려 하니 문제가 됐다.
- 이번 파업에 맞선 회사 쪽 대응이 강경하다. 하이라이트 재방송분에 ‘불법 파업’이란 자막 안내를 내보내기도 했다. 봤나.= 기사로만 접했다. 참담하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회사 쪽이) 이것밖에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창피하더라. 유치했다.
- 노동조합이 두 개여서 회사 쪽과의 협상이 더 어렵진 않나.
= 다 같은 노동자인데 두 조합의 노동자가 함께하지 못하니 아쉽다.
-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국방송은 요동쳐왔다. 공영방송사의 직원으로서 자랑스러울 때가 있을 텐데, 한국방송이 ‘정권의 나팔수’라는 얘기를 들을 땐 어떤 기분인가.
= 뉴스가 공정하고 양심 있게 나가는 게 자랑스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은 그게 안 되고 있으니까 자괴감이 드는 거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생각해보면 여러 과정이 있는데… 자괴감은 쉽게 오더라.
- 앞서 YTN과 문화방송도 파업을 했으나 끝은 흐지부지였다. 이번 파업의 결과에 대한 걱정은 없나.
= 자동차는 생산자가 손을 놓으면 소비자가 다른 제품을 사거나 원하던 상품이 출시되기를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방송은 그냥 뿌려지는 것이니 다르잖나. 노동자의 권리가 파업이고 당연히 제작에서 손을 떼는 것이라는 걸로 위안하기엔 마음이 아프다. 내 손으로 만든 제작물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 하이라이트 방송이나 어떤 방식으로 다시 만들어져 방송되는 걸 봐야 한다. 그런 부분을 참아내면서 파업을 지속하는 게 가장 힘들다. 파업 참가를 결정하면서도 난감했고, 방송은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난감하다. 하지만 이미 나선 길이니까 조합원인 나로서는 파업이 잘 마무리되길 바랄 뿐이다.
- 일각에선 성과 없이 파업이 끝나면 새 노조가 어려워지는 것 아니냐고 우려한다.= 파업이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면 자괴감이 클 것 같다. 하나 된 노동자의 파업이 아닌 신생 노조의 파업이라 이게 잘못되면 앞으로 새 노조가 조합원을 이끌 명분이나 동력을 찾는 게 힘들 수도 있다. 현재 파업에 함께하는 노조원 모두 그걸 알기에 평소보다 더 열심히 파업에 참여하는 것 같다.
- 방송 차질로 불편을 겪는 시청자에게 한마디.= 죄송한 마음이 제일 크다. 비난하는 분에게도, 기다려주는 분에게도 하고 싶은 말은 지금은 잠깐 손을 떼는 것일 뿐이라는 거다. 좋은 방송을 지속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좋은 방송을 다시 보여줄 수 있다면 시청자도 이해해주시지 않을까. 지금 당장은 보고 싶은 방송을 보지 못해 불편하겠지만 좋은 방송을 만들기 위한 과정임을 알아주셨으면 한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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