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28)는 학원 강사다. 동생 둘과 살고 있다. 스스로 낭비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물건을 살 때의 마음이 괴상해졌다. 예전엔 “없으면 죽나, 하고 먼저 물어보자”고 생각했는데 가끔 “아니 나한테 이 정도도 못해줘?”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요즘에는 이 스스로에게 상을 주려는 생각이 딱히 잘한 것이 없는 때도 생겨난다. 이런 자신에게 채찍을 휘두르기 위해 3월 중순께 ‘노쇼핑’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그리고 6월 초 갈등의 날이 왔다.
이 시대를 살려면 사라어떤 분께 선물로 드리려고 명품 가방을 둘러보았다. “어떤 걸 원하든지 사줘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이분이 명품을 원하셨거든요.” 둘러본 결과는 이랬다. “나도 갖고 싶다.” 영향은 또 있었다. 자주 만나는 친구가 명품을 챙겨 입는 사람이었다. 명품 세일 매장에서 친구가 전화를 하자 부모가 자동차를 끌고 왔다. 충격적이었다. 이렇게 명품에 올인하는 사람도 있는데… 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끼면 살 수 없는 가격은 아니다. 몇 달 할부면 된다. 그런데 살 수는 없었다. “한쪽 손은 얼음 위에, 한쪽 손은 숯불 위에 얹어놓은 혼란스러운 마음”이었다. P 명품이 40% 세일에 들어간 밤에는 잠도 오지 않았다.
블로그에 고백한 글에 충고의 댓글이 쏟아졌다. 지나가는 객들의 반응은 이랬다. ‘질러라’파. “세일할 때 좋은 상품 건져라.” “왜 잠도 못 자고 고민하냐. 질러라. 명품은 나중에 중고로 팔면 된다.” “디립다 지르고 진하게 후회하라” “사놓고 포장 뜯지 말고 기다려라. 그러면 내가 왜 샀나 싶을 것이다. 그때 가서 반품해라.” ‘왜 그런 걸 고민하나’파. “40대가 넘으면 그런 거에서 자유로워지는데….”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저축이나 해라.”
레오는 사지 않았다. 며칠 지나고 나니 괜찮아졌다. “당시에는 사람들을 보면 매직아이처럼 가방만 불룩 튀어나와 보였는데, 이젠 전처럼 무덤덤한 상태가 됐어요.” 고민의 중심은 그렇다. 나는 괜찮은데 사회가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다. “이런 소비를 할 수밖에 없고 해야만 하는 (돈을 벌기 위해 먼저 써야만 하는) 분위기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옷차림이나 소비를 사회 흐름에 통제당하고 싶지 않아요.”
올초부터 프로젝트에 참여한 ‘송송책방’(34)도 비슷했다. 강원도에서 회사 전체 MT를 마친 뒤 귀경길에 경기 여주의 명품 아웃렛에 들렀다. 누군가는 결혼 상대자에게 줄 명품 가방을 샀고, 누군가는 40% 할인 명품 셔츠를 샀다. 송송책방은 50% 할인하는 캔버스화를 샀다. 캔버스 운동화가 다 떨어져서 버릴 참이었다. 버릴 거니 하나 괜찮겠지, 신발은 생필품이니까. 일주일 뒤 예기치 않게 언니가 샌들을 선물했다. “여름은 샌들로 나고 캔버스는 가을에나 신어야지” 하며 캔버스는 신발장 안으로 들어갔다.
‘buy’와 ‘live’가 모두 한국어의 ‘산다’인 것은 운명인가. ‘뭔가를 산다는 것’은 ‘그 시대를 산다’는 것과 비슷하게 돼간다. 명품 아웃렛에 볼일이 없는 사람도 가게 만드는 게 현대 소비사회다. 명품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가격의 상품들도 ‘아우라’를 만들어 소비자를 끌어들인다. “이 시대를 살려면 사라.”
제품의 질보다 브랜드 이미지가 먼저?
1993년 ‘말버러 금요일’은 브랜드 전략에서 새로운 전기가 된 날이다. 그해 4월2일 말버러는 담배 가격 20% 인하를 발표한다. 말버러는 10억달러가 넘는 광고비를 쏟아부으며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쌓아올린 유명 브랜드였다. 말을 탄 ‘진짜 미국 남자’를 강조하는 말버러 광고는 1954년 시작된 가장 오래된 ‘브랜드 이미지 광고’다. 그런데 그 이름값을 포기하고 가격경쟁력을 내세운 것이다. 가격 인하를 단행한 날 거의 모든 기업의 주가가 폭락했다. 하지만 살아남은 기업이 있었다. 여전히 브랜드를 중시하는 기업들이었다. 라이프스타일을 제품과 결합시키는 브랜드, 광고하는 옷조차 등장하지 않는 광고를 하는 브랜드, 브랜드 이미지를 매장 등의 콘셉트를 통해 인지시키기에 광고가 필요 없는 브랜드였다. 그리하여 “이제 제품은 진정한 제품이라 할 수 있는 브랜드 뒤로 물러났다.”(나오미 클라인, )
한국에서도 브랜드는 자신의 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알리는 데 열중한다. 월드컵 광고에는 누구도 상품을 내세우지 않는다. “우리도 당신과 같은 한마음이다”라는 이미지만 준다. 카드회사는 예쁜 디자인의 카드를 판다. 아파트는 밋밋한 이름 대신 더 높은 질의 삶과 결합돼 보이는 이름으로 바뀐다.
상품에서 브랜드를 빼보라. 필요가 남는가.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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