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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셔츠와 광주항쟁의 오버랩

탁신 정부에서 난생처음 국민 대우 받은 레드셔츠, 주체적 민중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등록 2010-05-27 15:48 수정 2020-05-03 04:26
정부 통계로만 14명이 사망한 5월19일 진압 이후에 포로 취급을 당하는 레드셔츠 시위대. REUTERS/ SUKREE SUKPLANG

정부 통계로만 14명이 사망한 5월19일 진압 이후에 포로 취급을 당하는 레드셔츠 시위대. REUTERS/ SUKREE SUKPLANG

광주항쟁을 다룬 가장 빼어난 소설인 홍희담의 은 누가 끝까지 남아서 싸우는가를 질문한다. 가장 앞장서서 항쟁을 선동하던 인물들은 정작 싸움이 벌어지자 ‘어차피 지는 싸움’이라며 패배를 기정사실화하고 도망친다. 남아 싸우는 사람들은 내 친구와 이웃의 죽음에 가장 구체적으로 분노한, 체제의 일상적인 폭력에 시달리던 하층 계급이었다. 이들에게는 도청에서 도망가 숨을 나라는 바깥에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도청에서 자신들의 나라를 세웠다. 독재자의 눈에는 이 불법적인 나라, 광주가 무법천지였겠지만 이들의 눈에는 전두환이 군림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무법천지였다. 그래서 우리는 전두환이 집권하던 무법천지의 한국을 나라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것은 다만 폭력 기구였을 뿐이다.

집권 세력, “너희가 우리를 뽑을 때까지”

요즘 타이는 무법천지다. 탁신을 지지하는 ‘레드 셔츠’들이 도심 한가운데 바리케이드를 치고 타이어에 불을 지르기 때문에 무법천지가 아니다. 5월20일의 살인 진압 이후 방송사와 지방의 정부청사, 그리고 타이 쇼핑관광의 상징인 센트럴월드가 불타올랐기 때문이 아니다. 법을 정지해 나라를 무법천지로 만든 것은 오히려 현 집권 세력이다. 이들은 민중에게 말한다. 너희는 투표로 너희의 대표를 선출할 권리가 있다. 단 그 대표는 우리여야만 한다. 너희가 우리를 너희의 대표로 뽑을 때까지 우리는 법의 이름으로 법을 정지한다. 그리하여 타이는 이미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부터 법이 정지된 무법천지였다.

혹자들은 묻는다. 하지만 타이 민중이 지지하는 것은 부패하고 반민주적인 신자유주의 독재자 탁신이 아니냐고. 탁신의 나라도 그를 위해 목숨을 던진 가난한 사람들의 나라는 아니었으며, 그의 법이 가난한 이들의 법은 아니지 않느냐고 묻는다. 맞다. 탁신 역시 법을 정지시킨 독재자였다. 그가 집권하는 기간에 벌어진 ‘마약과의 전쟁’에서도 영장 없는 체포와 구금, 그리고 살해가 밥 먹듯이 이루어졌다. 남부의 종교분쟁에 대해서도 탁신은 대화보다는 무자비한 탄압으로 일관했다. 이처럼 그의 법도 무도하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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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소한의, 결정적인 차이는 있다. 탁신은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그들이 나라를 만들 권리를 빼앗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무법한 나라가 가난한 사람들의 나라인 것처럼 포장하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였다. 이처럼 탁신은 빈민의 요구를 듣는 척이라도 했으며 난생처음으로 이들이 병원 문턱을 넘어 치료를 받고 약을 구할 수 있게 했다. 가난한 이들이 여기에 매수되고 속았을지언정 그들은 탁신의 ‘독재’ 아래에서 난생처음으로 왕의 자비에 의존하는 신민이 아니라 국민으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

비극을 뚫고 빼앗긴 권리를 되찾겠다

가난한 이들의 정치적 투쟁은 언제나 비극적이다.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려면 지지하는 정치인의 가면이 필요하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번 타이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그 가면은 대부분 부패한 정치인일 경우가 많다. 필리핀에서도 빈민은 자신들의 ‘영웅’이던 대통령 에스트라다가 부정부패 혐의를 받아 중산층의 시위로 쫓겨난 다음 그를 위해 피를 흘리며 봉기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가면 아래로 흐르는 낮은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즉각적인 총선을 요구한 레드 셔츠의 주장은 이미 그 말 자체에 탁신에 대한 지지 이상을 담았다. 그것은 빼앗긴 나라에 대한 권리를 되찾겠다는 의지다. 설혹 돈에 매수되고 선동에 넘어갔더라도 그것을 감수하고 책임지고 고쳐나가는 것도 자신들이어야 한다는 선언이다. 30년 전 광주를 통해 비로소 한국이 시혜 대상이 아닌 정치의 주체로 ‘민중’을 발견했듯이 말이다.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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