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좌파 주지’ 발언으로 불거진 불교계 외압 논란이 천안함 침몰 사고와 함께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다. 불교계 외압 논란은 3월21일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이 봉은사 직영 전환의 배후로 안상수 원내대표를 지목한 뒤 본격화했다. 명진 스님은 안 원내대표로부터 ‘좌파 주지’로 지목된 주인공이다.
안상수 원내대표의 발언이 전해진 뒤 불교계는 발칵 뒤집혔다. 3월25일 봉은사 신도회가 기자회견을 열어 안 원내대표의 책임을 물었다. 재가연대 등 12개 불교단체로 구성된 ‘불교단체 연석회의’도 하루 뒤인 26일 한나라당을 방문해 ‘불교단체 결의서’를 제출했다. 결의서에는 “안상수 원내대표는 모든 공직에서 즉각 사퇴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천안함 침몰 참사가 일어난 시점은 불교단체 연석회의까지 움직이기 시작한 바로 그날 밤이었다. ‘좌파 주지’ 발언 파문 이후 거짓 해명과 침묵으로 일관하던 안상수 원내대표에게 천안함 침몰 참사는 소나기 비판으로부터 몸을 피할 기회가 된 셈이다.
“안 대표 발언만큼은 넘어갈 수 없다”불교계 외압 논란은 이렇게 잦아드는 것일까? 이번 논란의 원인과 결과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불교계 관계자의 답변은 대체로 ‘그렇지 않다’는 쪽이다. 봉은사 명진 스님이 제기한 문제는 두 가지였다. 봉은사가 조계종 직영사찰로 전환된 것이 결과라면 안상수 원내대표의 외압은 원인이다.
불교계 일각에서는 이런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자승 스님 등 조계종 총무원이 대표적이다. 봉은사의 직영 전환은 ‘서울 강남 지역 포교 확대’라는 조계종 종단의 필요와 의지에 따라 추진됐다는 주장이다.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바꾸더라도 명진 스님의 정해진 주지 임기는 보장하겠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안상수 원내대표의 ‘좌파 주지’ 발언과 봉은사 직영 전환 사이의 인과관계를 부정한다 해도 안 원내대표의 발언은 남는다. 신혁진 기자는 “봉은사 직영사찰 전환의 배경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지만, 이와는 별개로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부적절한 발언만큼은 그대로 넘어갈 수 없다는 분위기가 불교계에 형성돼 있다”며 “특히 실천불교승가회나 재가연대 등을 중심으로 이번 기회에 불교와 정권의 ‘부적절한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고 전했다.
3월26일 한나라당을 방문해 안상수 원내대표의 사퇴를 촉구한 불교단체 연석회의도 결의서를 통해 “불교계 제 단체는 안상수 원내대표의 발언이 조계종의 봉은사 직영사찰 지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여부와는 관계없이 안상수 대표가 총무원장 스님에게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의 거취를 거론한 자체를 우리 종단의 자주성을 훼손하고 불교를 능멸한 망언으로 규정하고 이를 규탄한다”고 밝혔다.
자승 스님, 정권 인사들과 잦은 접촉봉은사가 직영사찰로 바뀐 배경도 여전히 석연치 않다. 실제로 안 원내대표의 ‘좌파 주지’ 발언이 나온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과 안 원내대표, 고흥길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장의 회동 이후, 고 위원장이 국회 예산 심의 과정에서 불교계 예산의 증액을 요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교계와 한나라당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의혹이 한층 증폭됐다. 안 원내대표가 불교 관련 예산을 미끼로 명진 스님의 거취에 대해 압력을 넣었다는 가설이다. 봉은사 직영 전환은 문제의 ‘3자 회동’ 직후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봉은사 직영 전환과 안상수 원내대표의 ‘좌파 주지’ 발언의 인과관계를 강하게 의심하는 쪽에서는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이 안 원내대표와 고 위원장을 직접 만난 것부터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불교계 핵심 관계자는 “조계종 총무원장이 직접 집권 여당의 원내대표와 국회 상임위원장을, 그것도 조계사가 아니라 시내 호텔에서 만난다는 것은 전례에 비춰볼 때 대단히 이례적”이라며 “여당과 조계종 사이에 예산 관련 협의가 있을 수 있지만, 조계종 부장 스님들이 있는데 총무원장이 직접 쫓아다니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의 최근 행보도 아울러 입길에 오르고 있다. 전임 지관 스님이 2008년 8월27일 종교 차별 철폐를 위한 범불교대회 이후 이명박 정권과 냉랭한 관계를 유지한 반면, 2009년 11월5일 취임한 자승 스님은 최근 몇 달 사이 현 정권 인사와 잦은 접촉을 해왔다. 문제가 된 11월13일 안상수 원내대표 등과의 회동 이후인 12월15일 자승 스님은 청와대를 찾아 이명박 대통령과 조찬을 함께한 뒤 독대했다. 이날 조찬 직후 언론은 “그동안 소원했던 정부와 불교계 관계가 풀리는 실마리”가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두 사람은 3월12일 법정 스님 분향소에서도 만났다. 법정 스님 조문을 위해 찾아온 이 대통령을 자승 스님이 맞이한 자리였지만 봉은사 명진 스님은 이 역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명진 스님은 3월28일 일요법회에서 이 대통령이 법정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길상사를 방문한 사실을 거론하며 “그 자리에 자승 총무원장이 있었다. 자승 총무원장은 이미 조문을 하고 갔다. 그런데 이명박 장로가 온다니까, 다시 무릎이 깨져라고 쫓아갔다”고 꼬집었다.
총무원-봉은사 토론회가 사태 해결의 관건
지난해 12월23일 자승 스님이 충남 천안의 한 식당에서 박형준 청와대 정무수석을 만난 것도 적절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었다. 당시 만남에 대해 언론은 일제히 “박형준 수석이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 등에게 세종시 문제에 대한 정부 입장을 설명한 뒤 협조를 구했다”라고 보도했다. 자승 스님이 박 수석과 만나기 직전 총무원 일각에서는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제기됐으나 묵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임 총무원장인 지관 스님이 이명박 정권의 종교 차별 정책 등을 문제 삼으며 2008년 하반기 이후 청와대 쪽과 거리를 둔 사실에 비춰볼 때 자승 스님의 최근 행보에 눈길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3월26일 천안함 침몰 참사 이후 불교계 외압 논란이 가라앉으며 자승 스님과 현 정권의 관계에 대한 공방도 주춤한 상태지만 논란이 완전히 해소될지는 알 수 없다. 외압 논란의 두 축인 조계종 총무원과 봉은사가 사태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토론회에서 어떤 결과를 얻느냐가 관건이다. 토론회에서도 총무원이 봉은사 직영 지정의 배경을 더 명쾌하게 설명해내지 못하면, 석연치 않은 ‘결과’를 부른 ‘원인’에 다시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황찬익 봉은사 문화사업단장은 “총무원이 어떤 자세를 갖고 토론회에 임하느냐가 문제가 될 것”이라며 “만약 토론회 제안만 수용해놓고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거나 토론회 결과를 일방적으로 무시한다면 사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말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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