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연씨가 끝내 사망했다. 향년 23. 삼성반도체 온양공장 노동자였던 그가 급성 골수성 백혈병 판정을 받은 지 2년6개월 만이다. 힘겨운 항암 치료를 견뎌오던 그는 3월의 마지막 날, 피고름을 토하다가 저 세상으로 갔다.
4월1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울성모병원. 입관식이 치러졌다. “우리 새끼 불쌍해서 어떡하냐!” 어머니는 오열했다. 식당일을 하며 키운 딸이었다. 풍족하게 먹이고 입히지 못해도 끔찍이 사랑한 딸이었다. 집안에 보탬이 되겠다고 고등학교 3학년 때 조기 취업을 해 돈을 벌어온 착한 딸이었다. 오열하는 어머니와 외가 식구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아버지도 고개를 떨궜다. 술로 보낸 세월, 이렇게 어린 딸을 보낸 것이 자신의 탓만 같다.
장례식장 밖에서 ‘삼성 산재 피해자 가족’들도 울었다. 박씨와 같은 나이에 같은 병으로 숨진 딸을 생각하며 황상기씨는 망연자실했다.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근무하던 남편을 백혈병으로 잃은 정애정씨는 “무균 장갑 때문에 딸의 맨살도 만져보지 못한 채 보냈다고 박씨 어머니가 슬퍼했다”며 “나 역시 남편에게 입맞춤조차 하지 못하고 보냈다”며 슬피 울었다. 면역 능력이 떨어진 백혈병 환자들에게는 보호자라 할지라도 맨살을 갖다댈 수 없다.
이날 기자회견을 연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이하 반올림) 소속 이종란 노무사는 “살아생전에 명예회복을 못 시켜줘 원통하다”고 했다. 집안 병력도 없고 평소 감기도 잘 앓지 않던 박씨였는데, 세상은 그의 백혈병을 산재가 아닌 ‘개인 질병’으로 치부했다. 홍희덕 민주노동당 의원은 “산재 판정을 해야 할 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 모두가 삼성 손아귀에서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고 비판했다.
박씨는 18살 때부터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도금용 플럭스 용액과 고온의 납 용액에 반도체 본체를 핀셋으로 집어넣었다 꺼내는 작업을 했다. 방사선 기계를 이용한 특성검사 업무도 했다. 작업량이 많을 때면 방사선 기계를 켠 상태로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2년9개월 만에 하얀 방진복 바지에 시뻘겋게 하혈을 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화학약품 만지는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었다.
근무 중에 발병했지만 산재로 인정받지 못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역학조사 결과 발암물질에 노출된 증거를 찾기 힘들다”며 “방사선 기계는 켠 상태로는 뚜껑이 안 열린다더라”고 했다. 삼성 쪽의 설명만 반영한 결과였다. 방사선은 대표적인 발암물질로, 노출이 증명되면 산재 인정이 가능하다. 박씨를 포함해 지금까지 백혈병과 림프종 등 혈액암이 발병한 삼성 반도체·LCD 공장 노동자 7명이 모두 산재를 인정받지 못했다. 이들은 근로복지공단의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삼성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지난 1월, 박지연씨는 과의 인터뷰에 이렇게 말했다. 지친 목소리였다. “삼성이 ‘도움을 줄 테니 더 이상 인터뷰하지 말라’고 하더라”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도 굳은 의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체력이 다할 때까지 인터뷰를 했다.(795호 이슈추적 ‘삼성이 가린 백혈병 진실, 법정에서 가린다’ 참조)
“내 아내도 죽었다” 추가 제보 잇달아박씨는 죽음으로 ‘삼성 백혈병 투쟁’에 불씨를 댕겼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박씨의 사연이 ‘삼성 백혈병 소녀’라는 키워드로 알려지면서 관련 제보가 쏟아지고 있다. 3월31일부터 4월1일까지 이틀간 반올림에 접수된 산재 피해 의심 사례만 7건이다. 이 중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2라인에서 근무하던 김경미씨가 지난해 11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사실이 남편의 제보로 확인됐다. 이로써 반올림이 파악한 삼성 백혈병 사망자 수는 9명으로 늘었다.
지난 1월 박씨는 삼성에 이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이제 깨끗이 인정하시죠, 산재라는 것을.” 삼성은 현재까지 백혈병 산재와 관련해 “특별한 의견이 없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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