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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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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의 집보다 무서워

‘대학’ 명의 보정
현금 흡수기 겸 빚쟁이 제조기 겸 저자세 교육장 및 스펙 플루 발원지
등록 2010-03-17 15:22 수정 2020-05-02 04:26

한때 상아탑이 우골탑으로 불렸다지만, 팔 소도 없는 사람들은 뭘 팔아야 할까. 팔 게 없는 대학생은 등록금 걱정을 견디다 못해 자살했고, 뭐라도 팔기 위해 몸을 판 여대생은 아버지에게 들켜 목 졸려 죽었다. 붙지도 못할 사립대 대학원 시험을 쳐봤다가 700만원에 달하는 한 학기 등록금에 혀를 내두르며 이제는 장기라도 팔아 대학 갈 시대도 머지않았나 싶었는데, 정말로 대학은 죽어서라도 가야 하는 곳, 아니 죽어서도 졸업하지 못하는 곳이 되었다. 무사히 목숨을 보전한 채 졸업한다 한들 환한 미래가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대학 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 중인 학생들. 한겨레 이종근 기자

대학 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 중인 학생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최근 한 명문대생이 자퇴의 뜻을 전하는 대자보를 붙이고 대학을 나갔다. 대한민국 부모라면 소든 말이든 차든 팔아서라도 보내고 싶을 대학이었다. 그 학생의 말대로 “친구들을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일단 그 대학 들어가면 투자한 만큼 수익도 내야 한다. 수익이고 뭐고 일단 넉넉한 부모를 두지 못한 학생들은 등록금이나 생활비 댈 길이 없으니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과외를 여러 건 잡아, 내 학생이 다른 애들 넘어뜨리도록 지원사격을 하는 것으로 자의든 타의든 사교육의 길에 투신한다. 잔디밭에서 막걸리 병을 따면서 낭만을 외치는 대학생이란 ‘자기계발’에 익숙한 야무진 아이들이 보기에는 그저 ‘루저’일 뿐이다. 좋은 대학 들어온 건 시작일 뿐, 졸업 뒤의 미래를 위해 학점 관리도 소홀할 수 없다. 그런 와중에 인터넷으로 하는 수강 신청 창이 열리자마자 재빠르게 클릭해서 수강 신청을 완료한 다음 인기 있는 과목의 수강을 원하는 학생과 거래하는 똑 부러진 장사 수완도 익히니 신자유주의 시대에 어찌 좋지 아니한가. 좋은 학교에 못 간 청춘들은 12년 동안 뒤떨어진 죗값을 치르느라 온갖 ‘스펙’ 쌓기에 열중해서 따라잡는 수밖에 없다. 이게 요즘 신종 유행병인 ‘스펙 플루’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역전을 이룬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라에서는 너그럽게 졸업 뒤에 직업을 갖게 되면 갚으라고 돈을 꿔주겠다고 한다, 단 ‘복리’로.

복리든 뭐든 돈 갚게 졸업 뒤에 직장이라도 순조롭게 가지면 큰 다행이다. 그러니 어디서 인턴이라도 구한다, 대학생 기자단을 구한다, 뭘 구한다 하면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추가할 경력이 되니 일단 들이밀고 보는 것이 거침없는 청춘의 도전이다. 허울 좋은 인턴제는 젊고 빠릿빠릿한 애들을 공으로 잘도 부려먹지만, 그렇다고 얼굴을 찡그릴 수는 없다. 어른들 신경을 거슬리지 않을 만큼만 도전적이고 혁신적이고 창의적이면서 똑똑하기도 하고 싹싹하기도 해야 하는 젊은이들은 ‘적자 세대’ 겸 ‘저자세대’ 다. 일하게 해주십사 일단 저자세로 나가야 한다. 그렇게 쌓은 온갖 스펙을 크리스마스트리의 장식처럼 주렁주렁 달고 이렇게 블링블링한 나를 간택해주십사 선보인다. 요즘 애들은 꿈도 작다고 비난하는 건 쉽지만, 이들이 철저히 학습당한 두려움을 안다면 쉽게 그러지는 못할 것이다. 가난한 루저가 되는 건 죄악인 세상에서, 실제로 마구 가난해보거나 루저의 실생활을 경험해볼 틈도 없이 선후배와 동급생끼리, 혹은 인터넷에서 서로 나누는 이야기로 두려움을 끝없이 재생산하고 부모님이 이야기하는 엄친아·엄친딸에게 기가 죽으면서 저자세가 안 된다면 그거야말로 참 이상한 일이다.

대학이 참 여러 가지 한다. 현금도 쭉쭉 흡수하고 빚쟁이도 펑펑 생산하고 저자세도 교육하고 스펙 플루도 감염시킨다. 말해놓고 보니 이거 귀신의 집보다 무섭다.

김현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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