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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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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에 담긴 ‘재건축 복마전’

서울 공덕 18구역 재건축 추진위원장-정비업체 대표 돈거래 대화…
‘운영비 대주고 사업 따는’ 음성적 거래의 첫 단추
등록 2010-02-26 15:15 수정 2020-05-03 04:26

재개발·재건축은 복마전이다. 몇몇 주민이 “우리 동네 재건축하자”고 시동을 거는 시점부터 검은 돈이 흘러든다. 재건축 복마전의 첫 단추다. 이를 기점으로 부패 유발 요인이 커진다. 주민들은 불신하고 갈라선다. 재건축 추진 과정은 더뎌지고, 그 비용은 고스란히 주민들 몫이 된다.

서울 공덕동은 낡은 마을이다. 비좁은 골목 사이로 지붕 낮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2월 현재 공덕동 7개 구역에서 재건축·재개발·도시환경정비사업이 추진 중이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서울 공덕동은 낡은 마을이다. 비좁은 골목 사이로 지붕 낮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2월 현재 공덕동 7개 구역에서 재건축·재개발·도시환경정비사업이 추진 중이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추진위 승인 전부터 정비업체에 자금 요청

서울 마포구 공덕동의 한 재개발 구역이 재건축 추진 초입부터 몸살을 앓고 있다. 공덕 18구역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주민들로 구성된 ‘가칭 추진위’가 정비업체에 돈을 요구하는 과정이 녹취 됐다. 해당 정비업체 대표가 “추진위원장 자질이 너무 안 좋다”며 녹취록을 마을 주민들한테 공개했다.

공덕 18구역은 ‘15-117’을 대표 번지로 하는 450여 세대의 터전이다. 전아무개씨 등 주민 두셋이 재건축을 추진하려고 뜻을 모은 게 2003년이다. 이후 가칭 추진위를 만들었다. 지난해 2월 서울시 정비기본계획안이 심의 통과됐다. 그동안 활동했던 두 개의 가칭 추진위가 지난해 6월30일 통합했다. 이렇게 하나 된 재건축조합설립 추진위는 가칭 추진위 시절부터 ㅈ정비업체로부터 활동자금을 받아왔다. 2008년부터다. 사무실 임대비, 식비, 행정업무 비용 등의 용도다. 물론 차용증을 작성했다.

지난해 11월5일, ㅈ정비업체 이아무개 대표는 추진위에 500만원을 또 건네면서 그 과정을 몰래 녹음했다. 지금의 박아무개 재건축조합설립 추진위원장과 추진위원 2명이 이 대표의 사무실을 찾았다. 이 입수한 녹취를 들으면, 박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그간 빌린 돈을 모두 갚은 것으로 하는 가짜 영수증을 써달라고 이 대표에게 요구한다. 3천만원어치다. 이 대표는 취재진에게 “그전부터 비슷한 요구를 해와 불안해서 (그날 대화를) 녹음했다”고 말했다.

녹취록에 담긴 박 위원장의 요구 사항은 많았다. “서로 살자고 하는 거예요. 지난번에 500(만원)씩 두 번 준 거 이제 우리가 갚았다는 영수증 2장 써주시고….” “(이후) 절대 민형사상 이의제기를 안 하겠다 해주셔….” 이 대표는 각서도 쓴다. 그리고 봉인이 된다. 박 위원장은 이런 말도 덧붙였다. “(다른 추진위원 2명에게) 두 분은 절대… 말이 나가면은 우리 세 사람이 나가는 거야.”

녹취록엔 ‘지원금’이 적다는 박 위원장의 성토도 있다. “이번달 이걸(추진위 회의) 하는 데 근 100만원 넘게 들어갔어요.” “우리가 밥 먹는데 주민이 먹으면 5천원짜리 돼요. (그러나) 구의원이나 시의원이나 그 이상 사람들하고 밥 먹으면 최하가 3만5천원이에요.” “그 다음에 솔직히 얘기해서 (주민들) 애경사 있죠? 얼굴도 생전 안 보는 사람들이 와요.”

“구·시의원과 밥 먹고, 애경사도 챙기려면”

이런 요구는 결국 ‘공생관계’를 무너뜨렸다. 이 대표는 “지난해 7월부터 500만원씩 하던 월 대여금을 12월 전후로 1천만원으로 올려달라 해서 더는 자금 여력이 안 돼 못 버티고 정리하게 됐다”고 말한다. 추진위는 올 1월10일 5천만원을 이 대표에게 돌려줬다. 그동안 ‘빌린 돈’을 모두 갚은 셈이다.

이 대표의 목표는 물론 정식 사업권을 따내는 것이었다. 녹취록에서 박 위원장은 “나를 믿으세요”라면서도 “지금 (정비업체로 선정)해준다고는 못한다”고 여러 차례 못박았다. 도시정비법(도정법)은 구청의 추진위 승인 이전 정비업체 선정은 불법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박 위원장은 의 통화에서 “가칭 추진위가 합쳐지기 이전 다른 쪽 추진위가 돈을 빌려썼고 그게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 같아 서류상 청산해달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통합 이후 빌린 돈에 대해서도 자신은 보증만 섰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5일 건네졌다는 돈을 받거나, 재건축 문제로 구의원·시의원과 식사를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 2월6일 예정됐던 이 구역 주민총회는 결국 연기됐다. 추진위의 지출 결산 및 예산안을 승인하고, 정비업체 선정 위임건 등을 승인키로 한 자리다. 박 위원장은 주민총회 연기 사유를 공지하면서 “일부 주민들이 녹음 내용을 편집해 주민들에게 들려주며 조직적으로 주민총회 개최를 방해하고 있다”며 “ㅈ사로부터 자문과 운영비의 대여를 구두상으로 협의하고 도움을 받은 바 있으나, 투명한 사업 추진을 위해 대여받은 금액을 전액 상환했고 해당 업체와의 모든 업무 관계를 청산했다”고 밝혔다.

문제를 제기한 주민 쪽은 대여금이 아닌 금품 수수로 본다. “추진위 승인 이전에 ㅈ사를 정비업체로 사실상 선정했다는 증거”라고도 주장한다. 하지만 불법이라 단정하기엔 이견이 많다. 법이 성긴 탓이다. 현행 도정법을 보면, 추진위가 경쟁 입찰로 주민 동의에 의해 정비업체를 선정해야 한다는 규정만 담고 있다. 정비업체가 돈을 건네도 되는지에 대해선 명문 규정이 없다.

정소홍 변호사는 “사인 간 금전 거래로 볼 수 있기 때문에 형법상 배임수재를 따진다면 몰라도, 도정법상 불법으로 판단하긴 모호하다”고 말한다. 나눔과미래의 이주원 지역복지사업국장도 “빌린 돈을 추진위 운영자금으로 사용하고 이후 승인 과정을 요식적으로라도 밟았다면 문제 삼기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박 위원장은 “대여받은 운영비는 재건축사업 추진 경비로 사용했으며, 이 금액은 결산자료에 포함돼 현재 주민총회 안건으로 상정돼 있다”고 설명한다.

결국 문제는 부패의 여지를 방치하는 제도에 있다. 곳곳의 재건축·재개발 초입 단계에서부터 크고 작은 금전 거래가 이뤄진다. 부실한 법 체계로 인해 일련의 돈 거래는 합법과 불법의 선을 오간다. 이주원 국장은 “주민들이 사업을 추진할 자금을 갖고 있지 않으니, 재건축·재개발 추진위원회의 99.9%가 정비업체의 돈으로 운영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비업체가 대가 없는 ‘자금 봉사’를 할 리 없다.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목을 맨다. 연면적 4만 평 정도의 재개발 구역에서 정비업체가 받아갈 용역비는 10억~15억원에 이른다. 공덕 18구역도 12억원가량의 용역수익이 예상된다.

하지만 ‘갑’은 추진위다. 정비업체는 ‘갑’에게 끌려간다. 추진위가 과도한 대여금을 요구해 정비업체가 중도에 포기하는 일도 다반사다. 한 정비업체 대표는 “악명 높은 추진위가 있는 구역 리스트가 정비업체 사이에서 떠돈다”고 말한다. 서울의 ㅈ동, ㅊ동, 또 다른 ㅈ동 등이 ‘정비업체의 무덤’으로 꼽힌다. 추진위는 비리에 노출되고, 주민들은 더 큰 비용을, 정비업체는 부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아수라’다.

기금 마련·정보 공개 확대 등 대안 시급

국가청렴위가 지난 2006년 제도개선안을 냈다. △사업 초기 비용 지원을 위한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기금 마련 △조합 등 주민대표기구에 대한 정보 공개 확대 등이 포함된다. 이주원 국장은 “서울시가 지난해부터 추진하고 있는 ‘공공관리제’의 성패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도시정비 계획 수립 단계부터 사업 완료까지 사업 진행 관리를 공공기관(구청)에서 지원한다는 취지다. 기초자치단체가 추진위의 초기 자금을 지원한 뒤 정비업체·시공사 등이 선정되면 구상권을 행사하는 식이다.

시는 이 제도의 핵심 기반으로 지난 1월 도시 정비사업 진행 정보를 공개하는 클린업 시스템 홈페이지(cleanup.seoul.go.kr)를 구축했다. 용역업체 선정 계약서, 의사록, 회계감사 보고서 등 7개 항목의 정보를 제공한다. 더불어 조합의 월별 자금 유출입 명세와 사업비 변경 내용 등 8개 항목도 공개하도록 권고했다. 하지만 ‘클린업 시스템 홈페이지’에서 공덕 18구역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박 위원장의 인사말만 올라 있다. 대안으로 제시된 제도가 제 자리를 잡고 확대되려면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공덕 18구역 추진위는 지난해 11월11일 구청의 승인을 받았다. 두 달 만인 1월22일 검찰에 고발됐다. 빌린 돈의 성격이 무엇인지, 정비업체 선정 약속 등 대가성은 없는지 검경이 가려야 할 일이 됐다. 박 위원장과 이 대표 모두 이면계약은 없었다고 말한다.

공덕 18구역 주민들만 불신과 혼란의 수렁에 빠졌다. 정작 정비업체를 정식 선정해야 하는 단계에서 난항을 겪고 있다. ‘재건축’이 마을을 살리는지 죽이는지 모를 일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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