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문(90) 노인에게는 남은 소원이 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긴 인생이었다.
이 노인과 국가보훈처의 기나긴 싸움은 이제 35년째로 접어든다. 그는 1944년부터 45년까지 일본군이 점령한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근무했던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 ‘고려독립청년당’이라는 비밀 결사단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해달라며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긴 싸움을 벌이고 있다. 노인은 “1976년부터 수차례 공적심사신청·이의신청·재심신청, 어떤 때는 진정서와 탄원서도 냈지만 보훈처는 꿈쩍도 안 한다”고 말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나도 죽을 텐데, 내가 지옥에 가서 그때 친구들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
명령 거부하고 일본군 사살한 ‘암바라와 의거’
1942년 5월 이 노인은 남방(동남아시아·남태평양)에서 잡힌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는 군속 시험에 합격했다. 월급 30엔을 받고 고흥군청 고원으로 일하며 전쟁 이후 혹독해진 황민화 정책에 질려 있던 때다. 노인은 한 달 뒤인 6월12일 부산 서면 임시군속교육대(일명 노구치 부대·지금의 하일리야 터)에 입소해 훈련을 받고 1942년 8월19일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배에 오르게 된다.
타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포로수용소 곳곳에 배치된 조선인 군속 3223명의 조직력은 남방을 경영하던 일본 16군도 두려워하는 세력으로 커져 있었다. 일본 16군은 1944년 11월25일부터 한 달 동안 자바에서 문제아로 꼽힌 포로감시원 200명을 웅카랑 산록의 스모노 연병장에서 재교육했다.
그해 12월29일 밤이었다. “우리보다 좀 연배가 위인 이억관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이 우리를 모아놓고 카이로선언에 대해 들어봤느냐고 하는 거야. 루스벨트·처칠·장제스가 모든 피압박 민족은 수탈자의 질곡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서명했다는 얘길 하더라고.”
‘이활’이라는 이름을 쓰던 이억관은 1912년생으로 경기 파주 출신이었다. 중국어를 잘했던 그는 현지 화교들을 통해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조선 청년 10명은 즉석에서 ‘고려독립청년당’(이하 청년당)을 조직했다. 총령은 이억관, 군사부장은 김현재, 이상문은 스마랑 지부 책임자가 됐다. 그러나 1945년 1월4~6일 청년당 혈맹당원인 손양섭·민영학·노병한 등이 싱가포르로의 전출 명령을 거부하고 일본 군인·군속 12명을 사살한 뒤 자살한 이른바 ‘암바라와 의거’ 이후 청년단은 일망타진됐다. 이 노인은 같은해 7월21일 군법재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일본군이 패전 사실을 말해주지 않아 해방 소식은 그해 9월에야 알았다.
노인의 외침에 대해 보훈처는 “공적을 증명할 객관적 자료가 없다”며 서훈 신청을 반려했다. 노인은 당시 군법회의 검찰관이었던 오니쿠리 노리마사 변호사를 수소문해 “군은 이억관 이하 9명에 대해서 1945년 7월21일 군법회의 재판에서 치안유지법 1조 위반으로 형을 선고한 사실이 있다”는 증언을 얻었다. 그러나 2007년 2월22일 노인이 손에 쥔 것은 다시 한번 “입증 자료가 미비하다”는 보훈처의 통보문이었다.
서훈 거부해놓고 증언은 보고서에 수록
흥미로운 것은 노인의 호소를 거부한 보훈처가 2005년 편에서 노인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수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인은 “정말 보훈처가 해도해도 너무하다“며 ”결국 돈이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밖에 안 든다“고 말했다.
이 노인은 1975년 곡성군수와 76년 구례군수를 지낸 뒤 1981년 8월 퇴임했고, 지금은 광주에서 소일하고 있다. 암바와라에서 숨진 세 의사의 유해는 이 노인의 주선으로 그리던 고향 언덕에 묻혔다.
광주=글·사진 길윤형 기자 한겨레 일제강점 100년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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