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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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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을 떠나지 못한 일본인

조선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전쟁 뒤 귀환 제외된 고작순 할머니…
또 한 번 기회 때는 남편 반대로 정착 선택
등록 2010-02-25 17:55 수정 2020-05-03 04:26
고작순 노인(오른쪽 의자에 앉은 이)와 사할린 동포 조영재 노인의 인연은 60년이 넘는다. 조 노인은 “어릴 때 아주머니한테 신세를 많이졌다”고 말했다.

고작순 노인(오른쪽 의자에 앉은 이)와 사할린 동포 조영재 노인의 인연은 60년이 넘는다. 조 노인은 “어릴 때 아주머니한테 신세를 많이졌다”고 말했다.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차분한 느낌의 한국어였다. 고작순(89) 노인을 만난 곳은 러시아 사할린의 주도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북서쪽으로 400여km 떨어진 탄광마을 보시냐코보(일본 지명 니시사쿠탄)였다. 눈 덮인 마을과 유즈노사할린스크를 잇는 간선도로는 겨우내 쏟아진 눈에 꽁꽁 얼어붙었고, 이 길을 통해 석탄을 나르는 5t짜리 수송 트럭들은 사정없이 몰아치는 풍설에 밀려 자주 전복 사고를 낸다고 했다. 취재진의 안내를 맡은 사할린 동포 조영재(78) 노인은 “이 오지까지 한국에서 누가 찾아오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오지까지 한국인이 찾아오긴 처음

지금까지 한국에서 진행된 사할린에 대한 논의는 패전 이후 일본의 무성의한 대처와 이후 소련 점령으로 고향길이 막혀버린 조선인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세상사는 우리 생각보다 더 복잡하며, 중층적이고, 광범위한 상처를 남기게 마련이다.

고작순 노인은 1921년생으로, 고향은 일본 동북부에 자리한 야마가타현이다. 야마가타는 위로 의 열풍으로 한국 관광객이 폭증했다는 아키타현, 밑으로는 1959년 처음 출항한 북송선의 출발지인 니가타현과 살을 맞대고 있다. 노인의 본명은 다카하시 사쿠에(高橋作江)지만, 해방 이후 남편 윤윤덕(1919~80)이 한국식으로 이름을 바꿔 고작순(高作順)으로 불린다고 했다. 주름진 얼굴에 공처럼 오그라든 육신이 선한 인상을 풍기는 노인이었다.

사할린은 몽골어 ‘사할랸 울라’에서 유래한 말로, ‘검은 강으로 들어가는 바위’를 뜻한다. 일제시대 지명인 가라후토(樺太)는 아이누어로 ‘자작나무의 섬’이라는 뜻이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영토 분쟁이 있던 이 섬은 러시아 영토로 정리됐다가,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북위 50도선 이남인 남사할린을 차지하게 된다.

일본 정부는 석탄 등 풍부한 지하자원에 주목하게 된다.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일본 본토와 조선에서 노무자들을 동원했다. 조선총독부 재무국이 작성한 1939~43년 조선인 노무동원 통계에 따르면, 사할린 송출 조선인은 1만6113명이고, 1944년 7월 말 현재 가동 중인 26개 탄광 가운데 25개 탄광에서 조선인 7801명(탄광부 6120명)이 근무한 것으로 확인된다.

“옛날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모집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여기가 돈벌이가 좋다고 해서 왔지.”

노인은 대단할 것도 없다는 투로 말을 이어갔다. “어머니가 내 나이 네 살 때 세상을 버려서 힘들게 살았어요. 아버지는 새엄마랑 결혼을 하고….” 그는 일본에서는 한 달을 일해 겨우 10엔을 벌었는데, “가라후토는 돈벌이가 좋다”는 말을 듣고 과감하게 집을 나섰다고 했다.

사할린으로 이주한 조선인 모두가 강제동원 피해자인 것은 아니다. 조선에서 강제동원이 시작된 것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 실시된 이후로, 전황이 나빠지면서 ‘모집→관 알선→징용’ 등 점점 강제성이 커지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이는 1938년 이전에 일본이나 사할린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좇아 이동한 자발적 이주자라는 뜻이다. 사할린은 상대적으로 고임금이 보장된 땅이었다. 일본 연구자 나가사와의 연구를 보면, 일본인과 조선인의 임금 격차는 조선에서는 100 대 50이었지만, 일본 본토에서는 100 대 80, 사할린은 100 대 87로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군대 안 가는 조선 남자가 인기

“여기서 여자는 하루 일당으로 2엔 받았어요. 그런데 나는 일을 좀 잘해서 2엔20전을 받았지. 한 달이면 60엔이에요. 탄에서 돌을 골라내는 작업을 했죠. 일본에서 사람들이 와서 ‘야, 여기 탄은 참 좋다’ 그렇게 말해요. 탄이 좋아서 반짝반짝 윤기가 흐른다고.” 노인이 일한 곳은 미쓰비시광업의 나요시 탄광으로, 탄부로 일하던 남자들은 한 달에 250엔까지 벌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노인에게도 혼기가 찾아왔다. 1941년 주변의 소개로 만난 사람은 충남 천안 출신의 스즈카와 인도쿠, 바로 윤윤덕이었다. 노인은 “일본 젊은이들은 전쟁에 끌려가는데, 조선 남자들은 군대에 안 가도 되고, 여자들에게 잘해준다는 얘기가 있어서 인기가 좋았다”고 말했다. 조선인 강제징집이 시작된 것은 1924년 갑자생부터였기 때문에 남편은 사실상 병역 면제자였다.

노인의 결혼 생활은 어땠을까? 1944년 9월에 큰아이를 낳은 뒤의 일이다. “꿈에 여자 두 명이 하얀 소복을 입고 나와요. 아이를 안고 ‘이 아이는 우리 아이다’ 그러는 거예요. 자꾸 그런 꿈을 꾸니까 무서워서 남편에게 물었죠. 그랬더니 한숨을 푹 쉬면서 ‘실은 내가 조선에 부인과 아들이 있다’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뭐 어떻게 해요. 이미 애까지 낳았는데.”

독신으로 사할린에 나와 있던 조선 젊은이들은 노름도 하고 술도 마셔 서로 다투는 일이 많았다. 성실했던 남편은 그런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우리 영감보고 ‘가미사마’(하느님)라고 했어요. 잘해줬냐고? 처음에만 잘해주지, 나중에는 무덤덤하던걸….”

일본인이었던 노인에게 패전의 특별한 기억은 없다. 소련이 남사할린을 점령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끊겼을 뿐이다. 당시 일본을 통치하던 미 군정은 1946년 11월27일 소련과 ‘소련지구 송환 미-소 잠정협정’을 맺은 뒤 돌아오지 못한 일본인들을 고향으로 불러오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더 이상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들은 예외였고, 차마 남편과 아이들을 버릴 수 없었던 일본인 여성들도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고 노인은 “고민은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나도 어릴 때 어머니 없이 자랐는데, 내가 아이들만 데리고 일본에 가면 아이들이 커서 ‘아버지는 어디 있느냐’고 그럴 거 아니야.” 일본 정부는 1957년 8월부터 3년 동안 고 노인처럼 남겨진 일본인 여성들을 상대로 다시 귀환사업을 벌였다. 그때 일본인 여성 766명과 그들과 결혼한 한인 남성 등 가족 1541명이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고 노인의 가족은 남편의 반대로 사할린 정착을 선택했다.

아이들만 데리고 귀환할 수 없어서

이제 노인의 사할린 생활은 70여 년에 접어드는 중이다. 남편과는 3남2녀를 낳았다. 큰아들은 지난해에 숨졌고, 둘째(1946년생)와 셋째(1949년생)는 유즈노사할린스크, 큰딸은 서울에서 일한다고 했다. 노인은 “남편의 고향인 천안에는 셋째아들이 한 번 다녀왔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바라는 거 없어요. 어차피 이렇게 돼버린 인생인데.”

사할린(러시아)=글·사진 길윤형 기자 한겨레 일제강점 100년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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