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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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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사람들 탄 배가 가라앉다

해방 뒤 ‘부관연락선’ 타고 돌아온 안차순 노인의 증언…
조난선 조사는 강제동원규명위 보고서 한 편뿐
등록 2010-02-25 17:45 수정 2020-05-03 04:26
안차순 노인은 이제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일본에서 고생하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고 말했다.

안차순 노인은 이제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일본에서 고생하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고 말했다.

안차순(84) 노인은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취재진을 맞았다. 60년이 더 지난 일이지만, 노인은 그때 일을 비교적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일 때문에 우리 집이 초상집 같았어요. 내일이면 돌아올 줄 알았던 사람들이 허무하게 죽어버렸으니까.”

‘공출’ 기한 안 채워 다시 일본으로

안 노인은 1926년 강원도 춘천시 동면 장학리에서 5남1녀의 둘째로 태어났다. 안 노인의 부친에게 ‘공출’을 나가야 한다는 소집장이 날아온 것은 1943년 봄이었다. “아버지에게 소집장이 날아왔어요. 집안이 난리가 났죠. 아버지가 없으면 농사는 누가 짓고, 학교에 다니던 동생 셋은 어떻게 해요. 그래서 아버지께 ‘그냥 내가 가겠다’고 했어요.” 이제 갓 열일곱이던 노인은 1차로 함북 길주의 철로 공사장에 끌려갔다가 “배가 너무 고파” 집으로 도망쳐왔다. 구장(지금의 이장)이 “기한을 안 채우고 돌아왔다”는 이유로 노인을 면사무소에 고발해 노인은 그해 음력 9월 부산을 통해 일본행 배에 오르게 된다.

안 노인은 “나는 일자무식이라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다. 배를 타고 도착한 규슈는 온통 조선 사람 천지였다. 도착하자마자 탄광에서 돌과 탄을 골라내는 ‘센탄바’(選炭所)에서 일했다. 기억나는 것은 ‘홍코’(발음으로 봐 본광(本鑛)으로 추정되며 특정한 지명이 아니라, 노인이 일한 광산에서 가장 큰 갱도나 탄광이었던 것으로 보임)라는 이름밖에 없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이하 강제동원규명위)는 안 노인의 증언을 토대로 그가 일한 곳이 일본의 전 총리 아소 다로의 증조부 아소 다이키치(1857~1933)가 창업한 아소광업의 가미미오탄광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갱도에 불이 나서 수십 명씩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이곳저곳에서 잦았다.

다른 조선인 노무자들과 마찬가지로 안 노인에게 해방은 갑작스레 닥친 휴가였다. “어느 날 아침 일을 나갔더니 사람들이 ‘일을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일본 천황 폐하가 미국 사람들에게 손을 들었다는 거야.” 그날부터 놀고 먹는 시간이 이어졌다. “놀아서 좋았냐고? 좋기는…. 안남미에 보릿겨를 넣어 밥을 해주는데, 도저히 배고파서 살 수가 없어.”

1945년 8월 조국은 해방을 맞았지만 안 노인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배편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다림은 해를 넘긴 1946년까지 이어졌다. 6~7개월을 기다린 끝에 안 노인은 드디어 ‘하카다로 이동하라’는 통보를 받는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건 조선인들로 북적대던 후쿠오카현 하카다항의 풍경이다. “하카다가 배턱(항구)이에요. 넓어요. 여기 춘천 벌판만 해. 어찌나 넓은지 배가 수천 척이에요. 여기서 보면 배가 손톱만 하게 작게 보여. 하 참…, 조선 사람이 얼마나 많던지.”

일제 시기 일본과 조선을 잇는 교통편은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잇는 ‘부관연락선’이었다. 1905년 첫 운항을 시작한 부관연락선은 전황이 불리해져감에 따라 연합군 함대의 표적이 됐고, 결국 1945년 6월 운행이 중단되기에 이른다.

전쟁은 끝났지만 뱃길은 복구되지 않았다. 배가 부족했을 뿐 아니라, 시모노세키 등 주요 항구 주변에 미군이 투여한 부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고심 끝에 시모노세키의 대체항으로 하카다와 야마구치현의 작은 어촌 마을 센자키를 귀국항으로 선택했다. 일본인 연구자 모리타 요시오의 연구를 보면, 귀국길에 오른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이용한 항구는 하카다(42만5713명)였고, 그 다음이 센자키(32만517명)였다. 귀환선은 일본 사람이 부산에서 배를 타고 항구에서 내리면, 조선 사람들이 다시 그 배를 타고 부산으로 건너가는 식으로 운영됐다.

홍코로 찾아왔던 두 고향 아저씨
해방 이후 조선인 귀향 경로

해방 이후 조선인 귀향 경로

하카다의 혼란 속에서 안 노인은 고향 아저씨 윤종백과 정동섭을 만났다. 둘 다 안 노인보다 연배가 높은 30대 젊은이였다.

“전에 홍코에서 일할 때 그 양반들이 ‘안차순이가 여기 있다’는 소리를 듣고 한번 찾아왔어요. 타향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니까 어찌나 좋던지. 그런데 귀국길에 그 양반들을 만난 거예요. 생각을 해봐요. 내가 얼마나 반가웠겠어.”

출발을 앞둔 일행은 급히 춘천의 고향 집으로 전보를 쳤다. 지금 조선에 들어가려고 배를 타러 나왔으니 사나흘 기다리면 어머니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란 내용이었다. “3년 동안 집에 딱 한 번 편지를 썼어요. 집에서는 생사를 모르는 거죠. 이제 고향이라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어요. 열일곱에 떠난 집인데, 이제 스물이 됐잖아.”

안 노인의 배는 1937년 1월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준공돼 부관연락선으로 투입된 7103t급 여객선 ‘고안마루’(興安丸)였다. “그 배에 3천 명이 들어가. 그 한 배에 들어가요. 그래서 그걸 부산에서 타면 일본 하카다까지 8시간이 걸리더라고, 8시간. 그거 빠르더라고. 배멀미를 하면서 토하는 승객도 많고.” 승객 정원은 1746명이었지만 65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큰 배였다.

윤종백과 정동섭은 그 다음 배를 탔다. 안 노인은 “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더라고. 우리 배는 잘 가는데, 그 배는 자꾸만 뒤로 처져. 부산에 도착해서 보니까, 그 배가 가라앉았다는 거야. 죽었겠죠 뭐. 주검이나 건졌나 몰라.”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낡은 ‘똑딱선’이나 ‘야미선’을 타고 돌아오다 조난당한 조선인들의 정확한 통계는 잡히지 않는다. 숨진 이들의 주검이 조류를 타고 규슈 해안이나 이키와 쓰시마 등에 와닿았다는 기록이 많은 것으로 보아 꽤 많은 조선인이 숨졌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한국 정부가 이들에 대해 진행한 조사는 지난해 11월 강제동원규명위가 내놓은 보고서 한 편뿐이다.

안 노인은 “부산에서 아저씨들을 기다리다 혼자 춘천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 집이 아주 초상집이 됐어요. 돌아가신 아저씨들 가족이 우리 집으로 몰려와 ‘왜 너 혼자 돌아왔느냐’고 하는 거야. 아휴, 그때 일을 지금 다 말을 못해요.”

살아 왔지만, 노인의 남은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곧바로 전쟁이 이어졌다. 노인은 6·25전쟁에 참전해 충북 제천에서 차가 뒤집히는 사고를 당해 의병제대했다. 몇 해 동안 자리보전하고 누워 일을 하지 못했다. 이후 75살까지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다. 하우스 농사를 크게 지었지만 새로 길이 뚫리는 바람에 농토 2천 평을 수용당해 지금은 엉망이 됐다.

“왜 너 혼자 돌아왔느냐”던 이웃

노인이 일본에서 돌아온 것은 올해로 64년째다. 일본 땅은 다시 밟지 못했다. “내가 일본 가서 고생했던 얘길 하도 많이 하니까, 아이 엄마가 둘이서 한번 여행이나 다녀오자고 나 몰래 적금을 부었어요.” 그랬던 부인 정영섭(1929~2005)씨는 이제 노인의 곁에 없다. “그 사람 죽어서 들어온 돈으로 저 북산면 산에다 땅을 사서 공덕비를 세웠어요. 그때 참 고생이 많았어요. 내가 못 배우고, 일자무식이어서. 그땐…, 그랬죠.”

춘천=글·사진 길윤형 기자 한겨레 일제강점 100년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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