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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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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비정상적인 정상회담 논의

이명박 대통령 “조건 없어야” → “원칙 충족돼야” 말 바꾸기에 주무부처 혼선도…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 나올 수밖에
등록 2010-02-11 18:49 수정 2020-05-03 04:26
이명박 대통령이 1월28일(현지시각) 세계경제포럼(WEF)이 열리는 스위스 다보스 알렉산더호텔에서 〈BBC월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명박 대통령이 1월28일(현지시각) 세계경제포럼(WEF)이 열리는 스위스 다보스 알렉산더호텔에서 〈BBC월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찰스 프리처드 지음)라는 책이 있다. 미국 민주·공화 두 정권에 걸쳐 북핵 관련 일을 했던 저자의 책에는 부시 전 대통령의 리더십에 관한 일화가 실려 있다. 당시 국무장관이던 콜린 파월은 부시 대통령의 말과 행동이 자주 오락가락해서 힘들어했다. 알고 보니 부시는 직전에 만났던 사람에 따라 달라졌다.

서울 여의도 정가에서는 이를 빗대 이명박 대통령 얘기가 돌고 있다. 청와대 사람들이 주중에 이어지던 기조가 일요일 이후에 바뀌어 힘들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주일에 ‘목사님’들을 만나고 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확실한 철학 대신 각종 ‘설’만 난무

남북 정상회담 얘기가 난무한다. 정상회담은 대통령이 한다. 이 때문에 대통령이 어떤 철학과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말로 표현되는, 그래서 일이 성사되느냐 마느냐에 큰 영향을 끼치는 대통령의 발언이 외부에 비치기는 오락가락하고 있다. 정상회담에 대해 조·중·동 등 보수 언론을 자처하는 일부 신문들은 기정사실화하고 4월·6월·8월·연내 등 시기와 관련한 온갖 설을 유포하고 있는데도, 정작 남북관계 전문가들이 이 대통령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이유다.

은 북핵 혹은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해 이 대통령의 말을 살펴봤다(상자기사 참조). 이 대통령은 1월28일(현지시각)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연내에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본다. 화해와 협력을 위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사전에 만나는 데 대한 조건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홍보 라인의 ‘마사지’(이동관 청와대 홍보수석은 “마치 지금 뭐가 진행돼서 곧 될 것 같다는 오해를 살 수 있어서 조금 마사지를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라며 이 대통령의 발언을 왜곡한 경위를 해명했다)를 거치기 전의 실제 그대로의 발언이 알려지자, 집권 이후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한 가장 전향적인 발언이어서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불과 사흘 뒤 이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위한 대가는 있을 수 없다는 대전제하에 만나야 한다. 그 원칙이 충족되지 않으면 (남북 정상회담은) 성사될 수 없다”고 말했다. “조건이 없어야 한다”와 “원칙이 충족되지 않으면 성사될 수 없다”는 하늘과 땅 차이다. 정상회담에 관해 이 대통령이 ‘온탕’과 ‘냉탕’을 오가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09년 6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쪽이 가장 민감해하는 ‘흡수통일론’을 공동성명에 포함시켰고, 그 이전에도 북핵 문제 해결 없는 남북 정상회담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남북관계 관련 이명박 대통령의 주요 발언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남북관계 관련 이명박 대통령의 주요 발언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최근의 남북 정상회담 관련 발언은 북쪽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이북 해상에 포를 쏘고 남쪽은 벌컨포로 맞대응을 하는 가운데 나온 말이다. 여기에 이명박 정부 각료들의 말까지 더해지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외신기자클럽 초청 간담회에서 이 대통령의 연내 정상회담 가능성 언급에 대해 “우리의 희망사항을 얘기한 것으로 아직은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다”고 말했다. 김태영 국방부 장관은 ‘선제타격론’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거론해 북쪽이 “선전포고”라고 발끈하고 나선 일도 있었다.

남북관계 전문가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일련의 일들은 당혹스럽다. 입으로는 남북 정상회담을 거론하면서 실무 접촉이 진행되는 것 같은데, 실제 정상회담을 할 의지와 진정성이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실 없는 상태에서 지나친 자신감은 ‘독’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은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철학과 인식인데, 북한 문제를 바라보는 대통령의 기본 철학과 인식이 없다 보니 부처 간 혼선이 빚어지는 것은 당연하다”며 “북핵을 돈을 주고 살 수 있다고 보는 이명박 대통령의 인식이 문제”라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남북관계 업무를 맡았던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2월4일 문화방송 라디오 에서 “남북이 실제 추진하는 것이 없으면서 이렇다면(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면) 정부가 정상회담 카드를 뭔가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이고, 남북 협의가 있다면 요즘처럼 당국발로 얘기가 많이 나오는 건 협상에 전혀 도움도 안 되고 너무나 부주의하고 무책임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남북이 정상회담을 진행하고 있다면 보안을 유지하면서 정상회담에서 이룰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와 협상안을 만들고 다듬어야 하는데, ‘구호’만 난무하는 현실이 전례에 비춰 지나치다는 얘기다.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 관료들의 이런 말잔치는 지나친 자신감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는 남쪽이 조바심을 내면서 북쪽을 설득도 하고 인센티브도 주고 했지만, 현재는 북쪽이 몸이 달아 있다는 것이다. 남북관계를 그대로 두고서는 북-미 관계 개선이 이뤄지기 힘들고 식량·비료 문제도 심각하기 때문에 정상회담에 나오지 않고서는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얘기를 정부 당국자들의 입을 통해 자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정상회담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북핵이나 정상회담에 관한 얘기는 남과 북, 그리고 국제사회가 모두 듣는다. 자신의 핵심 지지층, 극우 성향의 보수 세력을 의식한 듯한 발언은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접시를 깨뜨릴 수도 있다. 또 지금 당장은 ‘시간은 우리 편’일지 몰라도 남북관계와 북핵 문제는 미·일·중 등 주변국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할 가능성이 크다. 남북 정상회담은 정치이면서도 정치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남북 민중 7천만 명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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