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북동부 누리스탄주의 동쪽 끝에 자리한 캄데시 지역은 힌두쿠시 산맥의 남사면을 타고 흐른다. 그곳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지금 탈레반이 호령하고 있다. 캄데시에 주둔해온 외국군이 지난 10월9일부로 전면 철수했기 때문이다. 등 외신의 보도를 종합하면, 사연은 대충 이렇다.
지난 10월3일 캄데시에 주둔 중인 미군 전진기지 2곳이 소총과 로켓유탄발사기(RPG) 등으로 무장한 탈레반 300여 명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6시간여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탈레반은 기지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미군 8명과 아프간군 3명이 목숨을 잃었다. 2001년 10월 개전 이래 단일 전투에서 이 정도로 많은 미군 사상자가 난 일은 없었단다. 처절한 패배였다.
격렬한 교전 속에 철군 목소리 커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주도하는 국제안보지원군(ISAF)이 즉시 현장으로 증강 배치됐고, 전투 끝에 기지를 재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ISAF 쪽은 “탈레반 조직원 100여 명을 전투 중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불과 며칠 만에 상황이 돌변했다. ISAF가 대변인 명의로 낸 성명에서 “캄데시에 주둔 중인 (미군을 포함한) 외국군 전원을 ‘재배치’한다”고 발표한 게다. “탈레반의 공세 때문이 아니라, 이미 한 달 전 병력을 빼기로 결정돼 있었다”는 게 ISAF 쪽의 부연이었다.
실제 스탠리 매크리스털 아프간 주둔 미군사령관은 “대테러 작전의 초점을 인구 밀집지역에 맞춰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캄데시 주둔 외국군이 철수한 것도 이런 지침에 따른 것이란 게 ISAF 쪽 설명이다. 철수는 즉각 이뤄졌고, 훈련이 덜 된 아프간 경찰이 외국군이 떠난 자리를 메웠다. 탈레반으로선 ‘승리’를 주장할 만했다.
미군이 사용하던 기지는 어떻게 됐을까? 탈레반이 아무런 저항 없이 ‘접수’했다. 아랍 위성방송 는 11월10일 현장 화면과 함께 보도한 기사에서 “빈 기지를 장악한 탈레반은 그곳에 남겨진 미군의 무기까지 손에 넣었다”고 전했다. 미군 당국은 즉각 “철수 전에 남은 무기류를 남김 없이 파괴했다”고 주장했지만, 파루크 칸 누리스탄주 경찰국 대변인은 캐나다 일간 와 한 인터뷰에서 “미군이 남겨놓고 간 각종 탄약과 무기가 탈레반의 수중에 들어갔음을 확인했다”고 반박했다. 뭐가 그리 급했던 걸까?
매크리스털 사령관의 병력 4만 명 증파 요청을 놓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두 달을 넘겨가며 ‘장고’를 이어가는 사이, 아프간 전황은 시시각각 나빠지고 있다. 대담해진 탈레반은 곳곳에서 크고 작은 공격을 퍼부으며 미군과 NATO군을 괴롭히고 있다. 탈레반의 ‘재래식 전술’ 앞에 외국군의 최첨단 무기는 무용지물이기 일쑤다. 뉴스 신디케이트 는 11월5일 인터넷판에서 “탈레반은 사제폭탄에 장착하는 폭약의 양을 대폭 늘리는 손쉬운 방법으로 1대에 100만달러를 호가하는 미군의 ‘고성능 장갑차’(MRAPs)를 무력화했다”고 전했다. 워싱턴 정가에서 ‘철군’ 목소리가 커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2950일, 348조원, 5109명 사상“의장님, 지난 2001년 10월7일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했을 때 10살이던 미군 장병의 자녀는 어느덧 18살이 돼 있을 겁니다. 대학에 진학했든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적인 삶을 막 시작했을 겁니다. 군인 신분인 부모는 그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곁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아프간에 주둔한 미군 장병 중에는 벌써 다섯 번째 파병을 기다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늘은 미국이 아프간에서 전쟁을 시작한 지 꼭 29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천, 구백, 오십일~!”
지난 11월4일 미 의회 본회의장. 미 (C-SPAN)이 중계한 화면을 보면, 자유발언에 나선 에릭 머서 하원의원(민주당)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해군사관학교 출신인 머서 의원은 레바논 전쟁과 제1차 이라크 전쟁, 보스니아 전쟁 등에 참전한 경험이 있다. 24년간 복무해온 해군에서 중령으로 예편한 그는 하원 국방위 전문위원을 거쳐, 지난해 11월 선거에서 뉴욕주 제29선거구에서 공화당 출신 현역 의원을 꺾고 당선된 초선 의원이다.
미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총 584일간 전투를 치렀다. 아프간 전쟁 기간은 이미 그 5배를 넘어섰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1365일간 전투에 참여했다. 이 역시 아프간 전쟁의 절반에 그치는 날수다. 머서 의원은 미리 준비한 표를 가리키며 열변을 이어갔다. “최근 의회조사국(CFR)은 지금까지 아프간 전비로 무려 3천억달러(약 348조2100억원)의 예산을 쏟아부었다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추적 가능한 예산만 따진 수칩니다. 일부에선 실제 전쟁 비용이 이보다 2배 이상 많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공개된 예산 외에도 상당한 규모의 자금이 불투명하게 전용됐기 때문입니다.”
3천억달러를 2950일로 나누면 1억169만4915달러25센트가 나온다. 지난 8년여 동안 미국은 하루 평균 약 1억100만달러(약 1172억3천만원)를 아프간 전비로 사용한 게다. 머서 의원은 “달리 말해 지금까지 미국의 모든 가정이 평균 3947달러(약 458만원)를 아프간 전쟁 비용으로 내놓았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이날 5분 남짓한 발언을 마무리하면서 그가 ‘철군’을 입에 올린 것은 당연했다.
“오늘까지 아프간에서 숨진 미군 장병은 모두 911명에 이릅니다. 중상자도 4198명에 이릅니다. 아프간 전쟁에 참전했던 수많은 장병들이 평생을 짊어지고 갈 정신적 상처는 헤아릴 수조차 없는 형편입니다. 이제 충분합니다. 우리 장병들을 집으로 데려올 때가 됐습니다.”
머서 의원의 이날 발언은 1963년 9월 현역 정치인으로는 처음으로 미 상원에서 베트남전 반대 연설을 했던 조지 맥거번 전 의원(1972년 민주당 대선 후보)을 연상시켰다. 앞서 맥거번 전 의원도 지난 11월1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인터넷 매체 주최 토론회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진 채 임기를 마친 린든 존슨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않기 바란다”며 “지금 당장 아프간에서 철군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시민사회의 움직임도 심상찮다. 노벨평화상 수상단체인 ‘미국친우봉사회’(AFSC)와 여성평화단체 ‘코드핑크’ 등 10개 단체가 여론을 모아내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이들 단체는 별도의 웹사이트(noescalation.org)를 꾸리고, 지역구 의원들에게 아프간 증파 반대와 출구전략 마련을 촉구하는 전화 걸기와 전자우편 보내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미 아프간 주둔 미군 병력 증강 배치를 금지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법안(HR 3699)과 국방장관이 아프간 주둔 미군의 ‘출구전략’(철군안)을 마련해 의회에 보고하도록 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법안(HR 2404)을 민주당 바버라 리 의원과 제임스 맥거번 의원이 각각 발의해놓은 상태다.
남의 전쟁에 섣불리 발 담글 때 아니다오바마 대통령이 아프간 증파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까진 앞으로도 몇 주가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는 11월12일치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병력 증파의 효력이 언제쯤 나타날지, 그래서 언제쯤 미군이 철수할 수 있을지에 관심의 초점을 두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정부 내부에서조차 증파 반대 의견이 만만찮다. 아프간에 두 차례나 주둔했던 3성 장군 출신의 칼 아이켄베리 아프간 주재 미 대사도 최근 워싱턴으로 보낸 ‘전문’에서 증파 반대론을 폈다. 부패하고 무능한 하미드 카르자이 정부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게 이유다. 미국도 흔들리고 있다. 애먼 남의 전쟁에 섣불리 발 담글 때가 아닌 게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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