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그룹 비자금 수사는 재점화될까?
10월29일치 일부 신문은 청와대 핵심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효성 문제는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 검찰이 이미 내사를 시작했는데 완전히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어떤 식으로든 매듭을 지어야 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효성의 비자금 의혹들은 양파를 까듯, 고구마 줄기를 캐듯 연이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검찰의 칼날은 오너 등 핵심 관계자들은 그냥 피해갔다. 대신 효성의 몇몇 임원들이 오너의 허락도 받지 않고 수십억~수백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발표만 나왔다. ‘대통령 사돈 기업 봐주기’ ‘꼬리 자르기’ ‘부실’ 등이 ‘수사’ 단어 앞에 붙어나왔다. 서울중앙지검·대검찰청·법무부 국정감사는 ‘효성 감사’로 불릴 정도였다.
검찰의 소극적인 수사로 흐지부지되던 효성 비자금 사건에 불이 붙은 건 효성 3세들의 호화 부동산 문제가 불거지면서였다. 재미 블로거 안치용씨가 10월 초 조석래 회장의 장남 조현준 효성 사장과 3남 조현상 효성 전략본부 전무가 모두 수백억원대의 미국 호화 부동산을 매입한 사실을 폭로했다. 효성이 유령회사를 통해 비자금을 만들어 호화주택을 구입했다는 의혹도 나왔다.
구입자금 출처 놓고 의혹 증폭서울중앙지검 외사부가 내사에 들어간 조석래 회장 아들들의 해외 부동산은 4~5건이다. 조현준 사장이 2002년 구입한 미국 로스앤젤레스(LA) 고급 별장(480만달러), 2004년 사들인 샌프란시스코 콘도(180만달러), 2006년 매입한 샌디에이고 고급 빌라 2채(95만달러)와 조현상 전무가 2008년 7월 구입한 하와이 콘도(262만달러)다. 조장래 전 효성아메리카 LA지사장도 LA에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가 한국인에게 팔았다. 이들 부동산의 구입 가격만 모두 976만3천달러(약 115억원)에 이른다. 안치용씨는 “효성 일가가 보유한 부동산이 더 있다”고 주장해 총액은 늘어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효성 쪽은 “미국 직장에서 받은 소득과 은행 대출, 개인 보유 자금 등으로 매입했으며 선대로부터 증여받은 돈은 들어가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박지원 민주당 의원이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검찰 범죄첩보 보고서에는 “자금 창출 능력이 없는 조현준 등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아들 3명이 2000년부터 2006년까지 거액을 개인적 용도로 사용했다. 자금 출처가 효성 및 효성 계열사인지, 조 회장으로부터 증여받은 돈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막대한 부동산 구입 자금의 출처는 물론 세금 납부 여부가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은 것도 의혹을 키우고 있다. 게다가 해외 부동산 매입이 집중된 2001~2005년 효성은 분식회계를 통해 적자를 흑자로 속인 뒤 대주주 일가가 170억원의 현금과 주식을 배당으로 챙겼다.
해외 부동산 매입 당시 외환 반출 규모는 30만달러로 제한돼 있었다. 이와 관련해 로우테크놀로지(로우테크)가 주목받고 있다. 로우테크는 효성아메리카와 거래하며 대금을 부풀리는 방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효성 3세의 해외 부동산만큼이나 효성 비자금과 맞닿아 있다.
로우테크는 효성그룹 계열사인 동양나이론에서 분리된 회사다. 이 업체는 1998년부터 육군에서 발주한 ‘소대·대대급 마일즈(다중 통합 레이저 교전 장치) 사업’과 ‘야간 표적지시기 사업’을 수주했다.
효성 계열사에 포함되지 않아 겉으로는 효성과 무관한 듯 사업을 벌여왔지만, 실제로는 조석래 회장의 일가친척이 깊숙이 개입한 회사다. 이 업체는 조석래 회장의 막내동서인 주관엽씨가 실제 소유주다. 주씨는 효성의 미국법인 효성아메리카에서 마일즈와 관련된 부품을 납품받는 과정에서 대금을 부풀려 비자금을 조성한 의혹을 받고 있다.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2007년 6월 계좌추적과 압수수색을 통해 이듬해 5월 주씨를 비롯한 5명을 조세범처벌법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송치했다. 하지만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사부는 다른 사건이 밀렸다는 이유로 조사를 제대로 벌이지 않다, 올 3월 마일즈 납품 과정에서 임가공 업체들과 짜고 허위 매출 세금계산서 64억원치를 발행·교부한 혐의로 대표이사 이아무개씨 등 2명을 불구속 기소하고 주씨를 기소 중지했다. 검찰은 주씨가 미국에 있다는 이유로 기소 중지만 해둔 채 범죄인 인도 요청을 시도하지 않았다.
검찰이 수사를 끝낸 효성물산 비자금 사건 역시 여전히 의문투성이다. 효성 일본법인 비자금 사건은 2007년 효성 고위 임원 출신의 내부자가 국가청렴위원회(현 국민권익위원회)에 제보하면서 시작됐다. ‘효성그룹이 2000년께 일본 현지법인 수입부품 거래 과정에서 납품단가를 부풀리는 방법으로 200억~3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내용이었다.
효성 일본법인 비자금 사건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내부 제보에서 수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과거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도 내부자 제보로 수사가 착수됐고, 현대차 비자금도 내부 제보로 수사가 시작됐다. 이런 경우 검찰 수사의 성공률이 높다. 두 사건 모두 최태원 회장과 정몽구 회장의 구속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검찰은 수사를 차일피일 미뤘다. 1년을 끌던 수사는 올 1월 효성중공업이 일본 현지법인을 통해 발전설비 단가를 부풀려 조성한 300억원의 부외자금(장부에 기재되지 않은 자금)을 찾아 관련 임원들을 사기 혐의로 구속 기소하는 선에서 끝났다. 의혹의 핵심이던 조 회장의 이름은 수사 결과에 오르지 않았다.
효성건설 비자금 조성 사건 역시 흐지부지 끝났다. 이 사건은 2006년 7월 금융위원회 산하 금융정보분석원이 효성건설의 수상한 자금 흐름을 포착하고 검찰에 넘기면서 수사가 시작됐다. 하지만 검찰은 지난 9월 효성건설 송아무개 고문과 안아무개 상무가 1998~2007년 노무비를 과대 계산하는 수법으로 77억원의 불법 비자금 조성했다는 수사 결과를 내놓고 임직원 두 명만 불구속 기소하는 선에서 사건을 일단락지었다. 비자금과 조 회장 일가가 연관된 의혹은 규명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효성은 “검찰이 사돈 기업이라서 봐준다는 말은 적절치 않다. 비자금과 관련해 지난 3년 동안 경영진 120여 명이 조사를 받았고, 임직원의 40여 개 계좌가 추적당했으며 해외거래 자료까지 샅샅이 조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대통령 사돈 앞에 무기력한 검찰홍희덕 민주노동당 의원은 또 다른 의혹도 제기했다. 그는 “진흥기업은 도급 순위 42위로 효성건설(97위)보다 토목건설에 강점이 있는 속칭 대운하 수혜주로 주목받고 있는 중견 건설사였다. 지난해 효성은 이를 경영권 프리미엄도 없이 주식시장에서 형성된 주가보다 낮은 931억원에 인수했다. 그 뒤 진흥기업은 한강르네상스·경인운하·상암DMC·우면산2지구 공사 등 정부의 주요 건설사업을 잇따라 수주했다”고 말했다. 홍 의원은 “효성으로 경영권이 넘어간 진흥기업의 주가는 2008년 1월22일 1050원에서 2월13일 3305원으로 220% 가까이 급등했다”며 “효성이 진흥기업을 주가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인수할 수 있었던 배경과 정부의 주요 건설사업을 수주하는 데 사돈 기업이라는 프리미엄이 작용한 것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검찰은 지난 4월 조석래 회장을 참고인 자격으로 몰래 불러 비자금 사건에 대해 물은 뒤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되돌려보냈다. 당시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강도 높은 검찰 수사가 진행되던 때였다. 김준규 검찰총장은 지난 10월23일 이례적으로 박지원·박영선 민주당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효성 일가의 해외 부동산 소유관계와 자금관계를 확인해 혐의점을 찾으면 수사하겠다”며 “서울중앙지검장에게 확실히 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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