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29일 낮 12시30분 최상재 언론노조 위원장이 드디어 1만 배를 마쳤다. 말이 1만 배지 온몸을 1만 번 굽혔다 펴는 동작의 반복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최 위원장은 “7천 배를 넘어서면서 몸의 고통을 잊었다”고 말했다. 그의 두 손목에 붙은 파스는 이미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였다.
헌법재판소를 향해 절을 올리며 빌고 또 비는 전근대적 기원이 언론관련법 권한쟁의 사건 처리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물론 논리적 방식으로 설명한다면 성립되지 않는 질문이다. 최 위원장은 그저 해볼 수 있는 것을 다 해보겠다는, 간절함의 표현이었다고 했다. 최 위원장은 “지금까지 1년 이상 시민과 함께 싸우며 여기까지 왔다”며 “시민과 많은 언론인, 언론학자는 이미 언론관련법 날치기 처리가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담담하게 결과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노조원들이 10월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헌법재판소 결정 내용을 전하는 이동멀티미디어방송(DMB)을 시청하며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경호 기자
이날 오후 2시, 헌법재판소는 최 위원장의 기대를 외면했다.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언론관련법에 반대한 ‘60%’ 국민의 바람도 비껴갔다. 문제는 결론보다 내용이었다. 한나라당과 김형오 국회의장의 언론관련법 처리에 대한 권한쟁의심판 청구사건에서 헌재는 언론관련법 처리 절차에서 법적 하자가 발견됐지만, 그렇다고 이미 통과된 법을 무효로 볼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한 민주당 등 야 4당과 시민사회단체가 즉각 반발했다. 헌재 대심판정에서 결정을 직접 지켜본 조배숙 민주당 의원은 법정을 빠져나오며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결정”이라며 반발했다. 조 의원은 불과 10분 전 “방송법안 가결 선포 행위가 청구인의 심의·표결권을 침해했다”는 이강국 헌재소장의 결정문 낭독에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하지만 조 의원은 언론관련법의 유효성을 인정한 헌재의 ‘비논리적’ 결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헌재를 떠났다. 한 방청객이 “헌법재판소는 조·중·동의 충견이다”라고 소리쳤다.
여야가 헌재에서 다툰 쟁점은 세 가지였다. 대리투표와 일사부재의 논란, 그리고 그 결과가 낳은 언론관련법을 인정해야 하느냐 여부였다. 헌재 결정 직전까지 1만 배를 올린 최상재 위원장이, 비슷한 시각 의원직을 내놓은 채 서울 수유리 화계사에서 2만 배 정진을 마다하지 않은 최문순 민주당 의원 등이 기대한 것은 언론관련법의 무효 결정이었다. 대리투표와 일사부재의 원칙 등 절차적 민주주의를 거스른 언론관련법은 폐기돼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요구였다.
헌재는 이 가운데 대리투표와 재투표, 즉 일사부재의 논란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권한이 침해당했다는 야당 주장에 무게를 실어줬다. 그러면서도 국회의장이 내린 언론관련법 가결선포 행위의 무효 여부에 대해서는 ‘기각’ 결정을 내렸다.
야당과 언론단체는 “헌재의 결정은 모순”이라고 주장했다. 헌재 결정 직후 이종걸 민주당 의원은 헌재 앞에서 “일사부재의 원칙 등을 지키지 못하는 등 미디어법 처리 과정이 적법하지 않다고 해놓고 법의 효력은 국회에서 다시 알아서 판단하라고 떠넘겼다”고 말했다.
한국헌법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승환 전북대 교수(법학)는 헌재 결정에 대해 “놀랍고도 충격적인 결정”이라고 말했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파괴한 국회의 행태가 헌재 결정을 통해 사실상 정당화됐다는 지적이다.
위법에마저 무릎 꿇은 헌법의 치욕“헌재는 대리투표의 존재를 인정했다. 형법상 대리투표는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에 해당하는 범죄 행위다. 헌재 결정대로라면 국회의 법률안 표결에 ‘범죄 행위’가 개입돼 있다 하더라도 법률안의 효력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번 결정을 통해 대한민국 국회가 더 이상 법치주의 원칙이 지배하는 공간이 아니라 힘의 원칙이 지배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헌재가 확인시켜줬다.”
김 교수는 “대리투표와 재투표로 처리된 법률안도 무효라고 할 수 없다면 과연 무효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중대한 절차상 하자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헌재에 반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헌재의 결정이 ‘논리적 모순’ 시비를 낳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결정은 흔히 1997년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파동과 비교된다. 1996년 12월26일 신한국당은 새벽 6시 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에게만 본회의 개최 사실을 알려 단독으로 날치기 처리했다. 민주당이 즉각 헌재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다. 헌재는 그때도 국회법 절차를 무시한 위법 행위는 있었으나, 처리된 법안의 효력은 인정된다고 결정했다.
2004년 10월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 위헌 소송도 비교 대상이다. 당시 헌재는 참여정부의 신행정수도 건설 움직임에 대해 “서울이 수도라는 관습헌법에 위배되므로 위헌”이라며 제동을 걸었다. 김승환 교수는 “사법부가 아무리 보수와 극우의 논리를 대변한다고 하더라도 일단 법 논리는 성립돼야 하는데, 당시 헌재는 세계 헌법에 유례가 없는 관습헌법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고 지적했다.
언론관련법 날치기 처리 직후 의원직을 사퇴한 천정배 민주당 의원도 10월30일 문화방송 라디오에서 “헌재의 이번 결정은 ‘관습헌법’이라는 신행정수도 위헌 결정과 더불어 가장 수치스러운 폭거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언론관련법 권한쟁의심판 청구사건에서 헌재는 내용 면에서는 야당의 손을, 결과적으로는 여당의 손을 들어주며 적절한 타협을 고민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후유증은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당장 야당과 법조계 일부에서 헌재 폐지론을 거론하고 나섰다. 물론 폐지론이 얼마나 힘을 받을지는 미지수지만 이미 헌재의 권위에 적잖은 생채기가 났다는 평가다.
권한쟁의 청구인 대리인단을 이끈 박재승 변호사는 10월30일 과의 인터뷰에서 “국회가 국회법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다수 국민의 의사가 왜곡된 것은 물론 국민의 기본권까지 침해됐다는 것이 사건의 본질”이라며 “헌재가 사건의 위헌·위법성을 지적하면서도 (이를 바로잡는 것은) 국회의 자율에 맡긴다고 주장하는 것은 헌재 스스로 존재의 이유를 말살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권한쟁의 결정 권한 포기한 헌재김선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부회장 역시 헌재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포기했다고 지적했다. 김 부회장은 “국회의원의 표결권 침해도 인정하고, 국회법 위반도 명백히 인정하면서 가결 선포 자체를 무효로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헌재 스스로 주어진 헌법적 권한을 포기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심지어 헌법재판관 가운데 조대현·송두환 재판관도 결정문에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두 사람은 결정문에서 “(언론관련법의) 가결 선포 행위의 심의·표결 권한 침해를 확인하면서, 그 위헌성·위법성을 시정하는 문제는 국회의 자율에 맡기는 것은, 모든 국가 작용이 헌법질서에 맞추어 행사되도록 통제하여야 하는 헌법재판소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위법은 있었지만 위법적 절차를 거쳐 만들어진 법이 무효는 아니다’라는 나머지 7명의 의견보다 훨씬 이해하기가 쉬운 이야기다. 하지만 이 두 헌법재판관의 의견은 2009년 10월29일 언론관련법 권한쟁의심판 청구사건 결정문에서 단지 ‘소수 의견’으로 남아 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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