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9일 오후 언론관련법 권한쟁의심판 청구사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오자마자 박재승 변호사는 “헌법재판소가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다”며 역정을 냈다.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낸 박 변호사는 민주당 등 야 4당이 청구한 언론관련법 권한쟁의 청구소송을 맡아 225명의 초대형 변호인단을 이끌어왔다.
헌재 결정이 나오기 전부터 박 변호사는 “헌재가 언론관련법에 제동을 걸어주지 않으면 국민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고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그는 “같은 법조인인데 왜 이렇게 다른 것인가”라며 헌재 결정을 성토했다.
헌재 결정이 나온 다음날 오전 박재승 변호사를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결정으로 헌법재판소는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말살해버렸다”고 말했다. 헌법재판관들에 대해서는 ‘배신자’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헌재 결정을 어떻게 지켜봤나.=부끄럽고 창피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내가 법률가로서 그동안 헛공부를 한 것 아닌가 생각했다. 내 상식에 반하는 해괴망측한 결정이었다.
-어떤 부분이 해괴망측했나.=해괴망측하다는 것이, 하도 이상해서 그 뜻을 헤아릴 수 없다는 뜻 아닌가. 헌재는 신문·방송법 처리가 위헌·위법적으로 이뤄졌다고 인정하지 않았나. 특히 신문법 입법 과정에 대한 헌재 결정문을 보면 이강국 등 5인의 헌법재판관이 ‘피청구인(국회의장)의 신문법 수정안의 가결선포 행위는 헌법 제49조 및 국회법 제109조의 다수결 원칙에 위배되어 청구인들의 표결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했다. 위헌·위법이라면서 왜 무효확인 청구는 기각하나. 이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이유가 있으면 대보라고 하고 싶다. 아무런 설명도 논리도 없다.
-이강국 헌재소장 등은 권력분립과 국회의 자율권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심의표결권 침해만 확인하고 시정은 국회의장에게 맡기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말이 되나. 날치기를 주도한 사람이 국회의장이다. 그런 국회의장의 자율에 맡긴다는 이야기다. 헌재는 자율이라는 용어를 오해하고 있다. ‘방자할 자’자가 아니지 않나. ‘자율’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국회의 자율이지 ‘국회의장의 자율’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국회법 자체가 국회의 자율을 위한 것이다. 국회법을 벗어나면 자율이 무너진 것이다. 헌법재판관들이 그걸 모른다. 차라리 토론이라도 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말이 안 되는 결정을 했다. 그래서 분하고 창피한 거다.
-헌재는 그런 절차적 하자가 일부 있지만 이미 통과된 법률을 무효라고 결정할 권한이 헌재에 없다는 주장인데.=아니, 권한이 없으면 헌법재판관을 그만두고 내려와야지! 왜 권한을 줬는데 권한이 없다고 하는가. 그러면 헌법재판소법과 권한쟁의심판은 쓰레기인가. 그런 논리를 펴는 사람은 헌법재판소에서 나와야 한다. 왜 거기 앉아 있으면서 그런 결정이나 하고 있나. 참새 가슴만도 못한 사람들이다. 배신자들이다.
-헌재가 기각과 인용 사이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서 정치적 부담을 국회로 넘길 것이라는 예측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았나.=떠넘긴 게 아니라 완전히 정권의 손을 들어준 결정이다. 비유를 해보자. 대표적 날치기가 소매치기다. 헌재 결정은 타인의 물품을 훔친 사람에게 절도 혐의를 지적하면서도 장물의 처분은 알아서 하라고 맡겨놓은 격이다. 돌려주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것 아닌가. 국회에서 빚어진 전형적 날치기에 대해 국회의장에게 알아서 하라고 맡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공개변론 과정에서도 이미 그 부분을 지적했다. 이쪽저쪽에 떡 하나씩 주는 식으로 하지 말라고 강하게 요청했는데, 딱 그렇게 했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서는 이런 결정이 나올 수 없다.
-어쨌든 헌재 결정은 이미 나왔고 번복은 불가능하다.=그래서 기가 막힌다. 대법원이 됐든 헌법재판소가 됐든, 사법부는 국민 편에 서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왜 국민의 의사와는 동떨어진 결정을 내리며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다. ‘사법권 독립’이라는 철통 같은 보호막 안에 안주하고 스스로 사법정의를 무너뜨리고 있다.
-헌법재판소 존재의 이유가 사라졌다고 보는가.=사라진 게 아니라 헌재 스스로 말살했다. 국회에서 다수당의 횡포에 의해 다수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결정이 나왔다. 언론관련법에 반대한 대다수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된 것이다. 국회가 난장판 속에서 만든 부당한 결정도 구제하지 않는데 국민은 어디를 보고 사나. 날치기한 사람에게 장물은 알아서 하라는 결정을 하는 곳에 뭘 기대할 수 있겠는가.
-헌재가 왜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보나.=사법부가 권력에 ‘얼병’든 역사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박정희 정권 때 빚어졌던 인혁당 사건을 보라. 당시 대법원은 사형이 선고된 8명의 상고를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내세워 기각했다. 곧바로 다음날 8명의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 주심 대법관을 맡았던 이아무개 대법관이 뒤늦게 무릎을 치며 ‘이렇게 빨리 집행할지 몰랐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때도 정권이 판사를 붙잡아놓고 고문하거나 때리지 않았다. 전화 한마디에 알아서 굽실거리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판사로 있는 동안 적당히 눈치 봐가며 편히 좀 지내보자’ 하는 사심 때문에 정의감을 버리는 행태는 여전하다.
-김형오 국회의장은 어떻게 해야 하나. 야당은 김 의장 사퇴를 주장하고 있다.=(김 의장이) 날치기 주범이니까 당연히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 헌재 결정은 국회의장이 국회의원의 심의표결권을 침해했다는 것 아닌가. 심의의결권을 침해했다는 것은 국회의원을 무력화한 것인데, 그러고도 국회의장이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나.
-언론관련법 자체에는 위헌적 요소가 없는가.=언론관련법이 문제가 된 이유는 조·중·동의 방송 진출을 허용한다는 부분 때문이었다. 정부·여당은 일자리 창출과 여론의 다양성을 내세우며 언론관련법을 밀어붙였는데, 실제 그렇게 되고 있나. 일자리가 그렇게 많이 만들어지지도 않을뿐더러, 무슨 여론의 다양성인가. 김제동·손석희씨 사례를 보라. 천편일률적인 목소리가 나온다면 정부·여당이 내세우는 대로 방송 100개가 만들어진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게다가 신문사가 방송에 진출하려면 대개 자본과 결합해야 한다. 언론권력과 자본이 결합하면 경제력의 남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헌법 제119조 2항에는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 중요한 대목이다. 언론관련법은 필연적으로 이 조항에 배치되는 상황을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위헌적 요소가 다분하다고 봐야 한다.
-야당과 시민사회단체가 너무 헌재 결정만 기대했던 것 아닌가. 헌재 결정 이후의 대책이 없는 것 같다.=나 자신도 그렇다. 막막한 무력감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다. 국민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세금을 내면서 왜 이런 불쾌감을 겪어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언론관련법에 대한 위헌 소송이 가능할까.=지금의 헌법재판소 구조라면 위헌 소송을 해본들 되겠나. 택도 없다. 그러니까 나도 국민도 절망하는 것이다. 헌법은 펄펄 살아 있지만 헌법재판소가 이렇게 ‘얼병’ 들어 있어서 (위헌 소송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언론관련법에 반대한 60% 이상의 국민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1997년 1월20일 취임식 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정부가 문제가 아니고 정부가 해결책도 아니다. 우리 미국인, 우리가 해결책이다.”(Government is not the problem, and government is not the solution. We, the American people, we are the solution.) 결국 국민이 문제이고 국민이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 깨어 있는 국민이라면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이다.
글 최성진 기자 csj@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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