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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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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은 듯 다른 아르헨 언론법 파동

거대 언론기업의 독과점 깨뜨리는 방송법 통과로 법정싸움 예고
등록 2009-11-06 12:46 수정 2020-05-03 04:25

지구 반대편에서도 ‘언론관련법’ 논란이 한창이다. 지난 10월10일 난상토론 끝에 아르헨티나 상원이 ‘방송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직후부터 거대 언론기업은 위헌 소송을 포함한 법정싸움을 벼르고 있다. 오는 12월10일 소집되는 새 의회에서 대거 의석을 늘린 야당 쪽에선 폐기법안을 제출하겠다고 공언하고 나섰다. 낯익은 풍경이다.
하지만 한국과 아르헨티나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언론관련법 논란에는 한 가지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한국에선 거대 신문과 재벌에 방송 진출의 길을 터준 게 법 개정의 핵심이라면, 아르헨티나에선 거대 언론기업이 장악하고 있는 여론시장의 독과점을 깨는 게 입법의 목적이다. 아르헨티나의 현 상황이 ‘오래된 미래’이자 ‘임박한 과거’로 보이는 이유다.

“아르헨티나는 민주공화국이다. 아르헨티나의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지난 10월10일 새벽 아르헨티나 의회 밖에서 시민-사회단체 회원과 활동가들이 방송법 개정안 통과를 축하하는 집회를 벌이고 있다. 사진 연합/AP

“아르헨티나는 민주공화국이다. 아르헨티나의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지난 10월10일 새벽 아르헨티나 의회 밖에서 시민-사회단체 회원과 활동가들이 방송법 개정안 통과를 축하하는 집회를 벌이고 있다. 사진 연합/AP

“언론의 자유가 ‘왜곡의 자유’까지 보장하는 건 아니다. 언론의 자유는 상업언론 사주의 자유일 수 없다.” 지난 8월27일 방송법 개정안을 의회에 공식 제출한 직후,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대통령궁에서 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2007년 대선에서 방송법 개정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시민사회의 강력한 지지 속에 지난 3월 말부터 이를 본격적으로 추진해왔다. 그 과정을 더듬어보자.

인쇄·영상매체 싹쓸이, 여론 다양성 질식

남미 대다수 국가와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의 여론 독과점은 심각한 수준이다. 문제의 뿌리 역시 이웃 나라와 다르지 않다. 암울했던 군부독재가 만들어낸 괴물인 게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는 군부독재자 호르헤 라파일 비델라의 군홧발에 짓눌려 있었다. 비겁한 군부는 어디서고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일에 가장 민첩하게 움직인다. 반대 여론은 철저히 짓밟혔다. ‘더러운 전쟁’의 잔혹극을 알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인 언론인들은 끌려가고, 쫓겨가고, 죽어갔다. 시사주간지 는 지난 6월4일치에서 “(군부독재 6년여 동안) 아르헨티나 언론인 500명이 망명길에 올랐고, 80여 명이 투옥됐으며, 68명은 ‘실종’됐다”고 전했다.

현실을 외면한 주류 언론은 군부의 단물에 취해갔다. 1980년 군부가 제정한 방송법은 거대 언론기업에 경쟁 없는 무제한의 ‘자유’를 안겼고, 이를 바탕으로 인쇄매체에서 텔레비전과 라디오까지 문어발식으로 몸집을 불릴 수 있게 했다. 단적인 사례가 아르헨티나 여론시장을 주무르고 있는 최대 언론기업 ‘그루포 클라린’이다.

“클라린은 텔레비전 방송사 3곳, 라디오 방송사 2곳, 인쇄매체 11개, 아르헨티나 케이블텔레비전 방송사의 50%를 장악하고 있으며, 통신과 인터넷 사업에까지 진출해 있다.” 인터넷 대안매체 (FSRN)는 지난 10월9일 부에노스아이레스발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자세히 따져보자.

1945년 8월 창간한 아르헨티나의 ‘1등 신문’인 일간 은 발행부수 50만 부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신문시장의 44%를 장악하고 있다. 스포츠신문 와 여성지 , 석간 도 성가를 날리고 있다. 최대 상업방송인 과 아르헨티나 최대 케이블 업체인 역시 클라린 소유다. 이 업체는 지난 1999년 말 미국의 거대 금융사 골드만삭스의 투자를 받아 자본력까지 막강해졌다. ‘밤의 대통령’이란 소리가 나올 법하다. 은 “클라린을 중심으로 텔레콤·아메리카·물티카날, 그리고 스페인계 자본이 소유한 그루포 프리사와 텔레포니카 등이 사실상 아르헨티나 여론시장을 완벽히 장악하고 있다”고 전했다.

포클랜드 전쟁 패배의 여파 속에 군부가 실각한 뒤 1983년 알폰신 라울 대통령 취임과 함께 민주화가 이뤄졌지만, 거대 언론기업의 여론 독과점은 흔들릴 줄 몰랐다. 1995년 집권한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언론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인수·합병을 허용해 거대 언론의 공룡화를 부추겼다. 여론의 다양성은 질식돼갔다. 그렇게 연방방송위원회(COMFER)가 정보부의 지휘를 받도록 규정해놓은 군부독재의 방송법은 30년 가까운 세월을 버텨왔다.

시민단체 노력으로 방송법 개정

기다림에 지친 시민사회가 직접 발을 벗고 나선 것은 지난 2008년 초다. 수난을 상징하는 보랏빛 머릿수건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5월광장 어머니회’를 필두로 한 인권단체와 노동조합, 언론인단체 등 300여 시민사회단체가 나서 ‘방송민주화연맹’(CDB)을 구성하기에 이른 게다. CDB는 각계의 여론 수렴 작업을 거쳐 여론 독점 철폐와 시민사회의 채널 접근권 보장 등을 뼈대로 하는 21개항의 방송법 개혁 과제를 정부 쪽에 제시했다. 지난 3월18일 시작된 페르난데스 정부의 방송법 개정 작업은 이런 노력의 산물이었다.

지난 6월 중간선거에서 집권 승리전선당(FRV)은 상원 72석 가운데 34석, 하원 256석 가운데 110석을 얻은 데 그쳤다. 상원에서 4석을, 하원에서 19석을 잃으면서 정국 장악력이 떨어진 게다. 새 의회는 12월10일 공식 개원한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여론 수렴 절차를 마무리하고 지난 8월27일 방송법 개정안을 전격 의회에 넘긴 것도 이 때문이다.

논쟁 한 달여 만인 지난 9월 말 야당의 불참 속에 하원은 200여 문구를 수정한 방송법 개정안을 표결에 부쳐 찬성 146표(기권 3표)로 통과시켰다. 그로부터 2주여 만인 지난 10월10일 새벽, 20시간에 걸친 마라톤 논쟁 끝에 상원은 찬성 44 , 반대 24로 개정 법안을 원안 그대로 통과시켰다. 밤새 의사당 밖을 지킨 시민사회단체 회원과 활동가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한 고비를 넘어선 게다.

개혁 법안의 핵심은 방송주파수 3분할에 있다. ‘공공재’인 방송주파수를 상업방송과 공영방송, 그리고 대학과 교회를 포함한 시민사회에 3분의 1씩 고루 나눠줘 여론 독과점을 막고 방송의 공공성을 높이는 게 핵심이다. 인터넷매체 는 지난 10월12일치에서 프랑크 라뤼 유엔 표현권 특별보고관의 말을 따 “(아르헨티나의) 새 방송법은 사회 모든 구성원에게 미디어 접근권을 보장해줌으로써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나라의 모범이 됐다”며 “법안 통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지속적으로 강화돼온 여론 독점을 깨는 데 한 걸음 다가설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공영·상업방송·시민사회에 주파수 3분할

주파수 3분할을 위해선 기존 거대 언론기업이 보유한 주파수를 내놓아야 한다. 개정 법안은 12개월 안에 과도하게 채널을 많이 확보하고 있는 방송사에 이를 처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주파수 분할 실무를 맡기기 위해 채널 허가권을 관장하는 ‘방송위원회’를 정부 산하에 신설하기로 했다. 개정 방송법의 규정에 따르지 않는 거대 언론에 대해선 방송면허를 취소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거대 언론이 극렬히 반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클라린 쪽은 지난 10월11일 법안 통과 직후 와 한 인터뷰에서 “정부가 자회사 매각 시한으로 정한 1년은 너무 짧아 적절한 값을 받고 넘기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이는 명백한 재산권 침해이며, 법안의 위헌성 여부를 법정에서 다툴 것”이라고 밝혔다. 야권도 “12월 새 의회 임기가 시작되는 대로 새 방송법을 폐기하는 법안을 제출할 것”이라며 공세를 펴고 있다. 는 10월10일 인터넷판에서 “새 의회가 폐기 법안을 내놓으면,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르헨티나 헌법은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력화하려면 의회 3분의 2가 찬성해야 한다. 지난 선거에서 의석이 줄긴 했지만, 집권 승리전선당은 새 의회에서도 원내 제1당이다. 싸움은 쉬이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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