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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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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만을 위한 ‘백년대계’

MB의 행정도시 뒤집기는 성장지상주의와 신종 지역주의가 만난 정치적 결정
등록 2009-10-26 15:21 수정 2020-05-02 04:25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정책에는 적당한 타협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정권에는 도움이 안 될지라도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한때 오해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택해야 한다.”
행정중심복합도시 논란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대답이다. 이 대통령은 9월17일 장·차관 워크숍에서 ‘백년대계’를 거론하며 사실상 행정도시 축소 의지를 밝혔다. 또 이 대통령은 최근 청와대 참모들에게 세종시가 포항과 구미처럼 생산기반을 갖춘 자족도시로 건설돼야 한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이 대통령의 생각은 9부2처2청 규모의 정부 부처가 내려가는 행정중심복합도시특별법 원안과는 분명한 거리가 있었던 셈이다.

행정도시 건설 계획은 박정희 정권 때 처음으로 마련됐다. 사진은 박정희 정권 후반기에 나온 ‘행정수도 계획안’. 그때 계획했던 행정수도는 마치 날개를 편 새의 모양으로 새의 몸과 머리 부분에 입법·사법·행정 3부의 중심지구가 배치되고 양 날개 방향으로는 주거지역이 자리잡는 방안이었다.

행정도시 건설 계획은 박정희 정권 때 처음으로 마련됐다. 사진은 박정희 정권 후반기에 나온 ‘행정수도 계획안’. 그때 계획했던 행정수도는 마치 날개를 편 새의 모양으로 새의 몸과 머리 부분에 입법·사법·행정 3부의 중심지구가 배치되고 양 날개 방향으로는 주거지역이 자리잡는 방안이었다.

이 대통령이 행정도시 원안에 부정적 견해를 거듭 밝힘에 따라 행정도시 건설을 향한 희망과 좌절의 역사는 또다시 반복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행정도시가 포항과 구미처럼 첨단도시를 지향하든, 국제과학기술도시로 방향을 잡든 ‘행정 부처 이전을 통한 지역 균형발전’이란 목표는 달성하기 어렵게 됐다.

박정희도 고민했던 수도권 집중

서울이 아닌 지역에 행정도시, 혹은 행정수도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은 사실 참여정부 이전에도 꾸준히 추진됐다. 그때마다 행정도시 건설의 이유는 조금씩 달랐지만 큰 틀에서 보면 정책적 목표는 일정했다. 바로 수도권 과밀화 해소와 국토 균형발전이었다.

행정수도 이전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1971년 신민당 대선 후보로 나선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대전을 찾은 자리에서 “집권하면 대전을 행정 부수도로 정하겠다”고 약속했다. 1단계로 행정부 외청을 옮긴 뒤, 2단계로 일부 행정부를 옮기겠다는 구체적 계획도 내놓았다. 행정 부처 가운데 9부2처2청을 충남으로 옮긴다는 지금의 행정도시 원안과 유사한 개념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행정도시’ 계획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이어졌다. 박 전 대통령은 1977년 2월10일 서울시 연두순시에서 통일이 될 때까지 정부 기능을 수도권 남부 지역으로 이전한다는 ‘임시 행정수도’ 계획을 밝혔다.

박 전 대통령이 행정도시 계획을 결심한 배경은 두 가지였다. 1970년대에 서울은 이미 주택과 환경, 교통 등 분야에서 심각한 인구 집중 부작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시 동아시아 정세도 고민이었다. 70년대 들어 캄보디아가 공산화된 데 이어 베트남과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반도 3국이 차례로 같은 길을 걸었다. 인구 집중 해소와 안보 불안 해소, 이 두 개의 목표로 박 전 대통령은 임시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했다. 박 전 대통령의 생각은 1977년 마련된 ‘행정수도 이전을 위한 백지계획안’에 담겼다. 계획안을 보면 박 전 대통령이 행정수도 후보지로 꼽은 곳은 충남 공주시 장기면 일대였다.

2009년 10월15일 저녁 충남 연기군 조치원역 앞에서 연기군 시민단체 회원들과 지역 주민들이 모여 촛불집회를 열었다. 행정도시 계획을 원안대로 추진하라는 것이 이들의 일관된 요구다. 사진 한겨레 신소영 기자

2009년 10월15일 저녁 충남 연기군 조치원역 앞에서 연기군 시민단체 회원들과 지역 주민들이 모여 촛불집회를 열었다. 행정도시 계획을 원안대로 추진하라는 것이 이들의 일관된 요구다. 사진 한겨레 신소영 기자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교수는 에서 “애초 박 대통령의 서울 인구 분산책은 한강 이북에 많은 인구가 모여 살면 북한의 남침시 한강을 건너 피난하기 어렵다는 안보상의 이유에서 비롯된 생각이었으나 당시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 도미노 현상과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보유로 1975년 4월쯤부터는 ‘강북만이 아니라 서울 및 수도권 인구 전체가 억제돼야 한다’는 쪽으로 전환됐다”고 소개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노력은 당대에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18년 장기 집권의 말기로 치닫던 탓에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할 만한 동력을 확보하기 쉽지 않았다. 제2차 석유파동이 터지는 등 국내외 경제 여건도 좋지 않았고, 지금처럼 폭넓은 사회적 논의를 거친 계획도 아니었다. 행정수도 이전은 유야무야됐다.

탱크 동원해 막겠다던 이명박 시장

중앙행정기관 이전 계획은 1980년대 들어서도 이어졌다. 1985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행정기관 일부를 대전으로 옮기는 ‘중앙행정기관 및 외청배치계획안’을 추진했다. 문제는 부처 간 갈등이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행정부처 이전을 위해서는 부처 간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강력한 기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989년 4월 ‘지역균형발전기획단’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노 전 대통령의 의지는 1990년 11개 청 단위 기관의 대전 이전 계획안 탄생으로 결실을 맺었다. 대전 청사는 문민정부 시절인 1997년 완공됐고 1998년 병무청과 통계청 등 일부 정부기관이 이전을 완료했다. 이어 김대중 정부는 중앙행정부서 권한을 지방으로 넘기는 방안을 추진했다.

역대 정부의 부처 이동을 통한 인구 분산 시도는 분명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98년 11개 중앙행정기관 이전을 마쳤을 때도 그랬다. 정부 조사 결과를 보면, 해당 공무원 가운데 가족과 함께 대전으로 이사한 비율은 30% 안팎에 그쳤다.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중앙행정부서 권한의 지방 이전도 마찬가지였다. 애초 목표와 달리 이양 대상 사무 625개 가운데 138개만 넘어갔을 뿐이다. 이래서는 인구 분산 효과나 중앙권력 분산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역대 정부의 행정도시 건설 실패의 경험을 모아 가장 강력한 대책을 내놓은 것이 참여정부의 신행정수도 건설 계획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03년 4월14일 신행정수도건설추진기획단을 띄우며 신행정수도 건설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역대 정권의 수도권 과밀방지 정책

역대 정권의 수도권 과밀방지 정책

이때 반대의 목소리를 가장 높였던 쪽이 야당인 한나라당과 서울시였다. “수도 이전은 탱크를 동원해서라도 막겠다”는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의 발언도 이때 나왔다.

역대 정부의 행정도시 추진론이 수도권 과밀화 해소와 지역 균형발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명박 정부가 내세우는 반대론의 핵심은 ‘행정의 비효율‘과 ‘행정도시 효과에 대한 의문’이다. 정부 부처의 일부만 행정도시로 옮길 경우 해당 공무원들이 서울과 세종시를 오가야 한다는 점에서 효율적이지 않다는 지적이다. 특히 공무원 가족 전체가 세종시로 이사하지 않을 경우 세종시는 자족기능을 갖추지 못한 유령도시에 그칠 것이라는 이야기다.

행정도시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 등 여권의 부정적 시각을 한 꺼풀 더 벗겨보면 문제는 좀더 복잡하다. 지금의 행정도시 논란이 단순히 국가 발전전략에 대한 견해의 충돌로 빚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도 얽혀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과 자유선진당 등 야권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주요 지지 기반이 지역적으로는 영남과 수도권, 계층적으로는 부유층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상민 자유선진당 정책위의장은 “지금까지의 지역주의는 흔히 영남과 호남의 대립 구도로 전개됐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경제적 이해관계에 민감한 수도권 주민을 지역주의에 활용하고 있다”며 “이를 활용해 정권을 잡은 이 대통령은 지금 행정도시를 반대하는 일부 수도권의 목소리에만 귀기울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지역발전 정책을 들여다보면 수도권 과밀화 해소 등 수도권 정책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일례로 국가균형발전위원회는 2008년 하반기 ‘상생 도약을 위한 지역발전 정책 기본 구상과 전략’에 이어 ‘광역경제권 활성화를 위한 지역발전 기반 구축’ 방안을 연이어 내놓았다. 이 방안에는 수도권 과밀화 해소에 대한 고민이 거의 담기지 않았다.


과밀화 억제 아닌 개발 가속화로

오히려 현 정부에서 지역발전이나 국가경쟁력 강화를 책임지는 인사들의 주요 발언은 지역 균형발전보다 수도권 경쟁력에 좀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역발전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최상철 위원장은 2008년 8월 “수도권의 경쟁력이 곧 국가경쟁력”이라고 발언했다(경기도 국회의원 조찬 간담회).

사공일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 역시 2008년 10월11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수도권 규제가 지방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느냐는 것을 짚어봐야 한다. 수도권에서 (기업과 공장을) 밀어내면 반드시 지방으로 간다는 보장이 없다”고 말했다.

수도권을 국가경쟁력의 발판으로 삼는다는 이명박 정부의 방침은 ‘2020년 수도권 광역도시계획변경안’에 좀더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계획안을 보면, 이명박 정부는 수도권을 저탄소 녹색성장의 거점으로 육성하고, 동북아 국제 비즈니스 중심국가 실현을 위해 수도권의 국제 기능을 강화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게다가 서울과 가까운 인천과 수원을 2차 거점도시로 육성한다고도 밝혔다.

수도권 과밀화 억제가 아니라 오히려 수도권 개발을 가속화하겠다는 이야기다. 이쯤되면 이명박 대통령이 최근 언급한 백년대계의 실체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행정도시에 대한 어떤 계획이 자리잡고 있을까?




행정수도 입안 주도했던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
“국토 균형발전, 현 정부의 큰 그림은 뭐냐”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지금의 행정도시 논란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것은 2002년 9월이었다.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충청권 신행정수도 건설을 약속했다. 그의 약속은 우여곡절 끝에 2005년 3월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노 전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을 공약으로 내세울 때 큰 역할을 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었다. 김 전 실장은 노 전 대통령이 1992년에 만든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이사장을 지낸 최측근 정책참모로, 참여정부에서 지방분권위원장, 청와대 정책실장 등을 거치며 국가 균형발전 정책의 입안과 추진을 주도했다.
김 전 정책실장은 과의 인터뷰에서 최근 정부에서 거론되고 있는 ‘국제과학기술도시’ 방안과 관련해 “충청권을 달래기 위해 부처 몇 개 내려보내고 공장 몇 개 지어주는 식의 단편적 논의로는 지역 불균형을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다”며 “이명박 대통령은 국토 이용에 관한 보다 큰 그림을 내놓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여권에서 행정도시에 부처 이전을 최소화하는 대신, 포항이나 구미 같은 첨단산업단지를 만들겠다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은 기본적으로 국민과의 약속이고 법으로도 정해진 것이다. 정치권에서도 모두 합의가 되지 않았나. 당연히 합의를 존중해야 하지만, 현 정부가 그런 정치적 부담까지 안고서 하지 않겠다면 그럴 수 있다. 대신 어떠한 경우에도 국토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전체적으로 고려한 합리적 대안이 제시돼야 한다. 충청권 민심을 달래기 위해 이걸 가져간다, 저걸 가져간다 그런 식이라면 이도저도 안 될 가능성이 있다. 정부는 국토 균형발전에 대한, 국토 이용에 관한 기본적 입장을 밝혀줘야 한다.
-여권에서는 오히려 참여정부가 충청권을 겨냥해, 정치적 목적으로 행정중심복합도시 계획을 추진했다고 주장한다.
=충청권 표를 의식한 게 아니었다. 수도권 과밀화 해소와 국가 균형발전에 대한 참여정부의 철학과 합리적 판단이 깃든 계획이었다.
-정치적 판단은 없었나.
=국토 균형발전을 통해 국토 이용의 생산성을 높인다면 장기적으로 충청권 민심만이 아니라 전체 민심의 지지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정도의 정치적 판단은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노무현 전 대통령도 농담처럼 ‘표 의식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는 말을 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경쟁력을 동시에 높이겠다는 의도였다. 충청권 표심을 의식했다는 지적이 있지만, 반대로 서울과 수도권 표심을 생각했다면 못했다.
-정부가 행정도시 계획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족도시 기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행정중심복합도시 형태로 성립되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따라가 자족도시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지하철역이 하나 생기면 역을 중심으로 상업시설이 새롭게 들어서지 않나. 행정도시가 ‘핵’의 역할을 할 것이다.
-현 정부가 행정도시 계획에 반대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나.
=공연히 시빗거리가 될 것 같아 그 부분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분들 판단이 있을 거라고 본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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