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노동단체의 수장이 국회에 나가 ‘사유재산권’을 없애자는 말을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빨갱이로 몰리거나 여론의 질타로 치유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을지 모른다. 반대로 한국의 노사관계·고용 등 노동 문제를 연구하는 국책연구기관장이 국회에서 노동3권(단결권·단체행동권·단체교섭권)을 헌법에서 빼는 게 자신의 ‘소신’이라고 밝히면 어떻게 될까?
발제문 때문에 세미나 무산되기도박기성 한국노동연구원장이 지난 9월17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자신의 소신을 당당히 밝혔을 때, 노동 담당 기자들은 오히려 무덤덤했다. 그의 강한 ‘어록’은 이미 노동계에서는 많이 알려져 있던 터라,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지난해 8월 새로 부임한 그의 ‘소신’은 두 달 뒤인 10월 이미 한 차례 사고를 친 바 있다. 국책연구기관들을 관장하는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가 연 ‘새로운 발전 전략 모색을 위한 국정과제 세미나’에서 박 원장은 ‘비정규직법의 효과와 개선 방향’에 대해 발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가 준비한 발제문의 내용이 문제가 돼 세미나 자체가 취소됐다. 그는 발제문에서 “비정규직법은 부정적인 효과가 너무 커서 개선할 필요가 있다”며 “(현행 2년인) 기간제 근로자의 사용기한 제한을 아예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그러자 토론자로 참여하려던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은 발칵 뒤집혔고, 세미나 전날 한국노동연구원을 방문해 거세게 항의했다. 박 원장은 그 다음날 한국노총을 방문해 사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가치관의 차이는 인정할 수 있지만, 노동연구원장의 자리는 다르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사실 박 원장은 억울할 수도 있다. 그는 지난 대선에서 ‘뉴라이트 지식인 100인 시국 선언’에 참여한 경제학자다. 그는 올해 노동연구원이 파업 등으로 뒤숭숭한 가운데도 스웨덴에서 열리는 자유주의자들의 모임인 몽페를랭협회(The Mont Pelerin Society)에 가려고 했을 정도로 ‘소신파’다. 신자유주의의 신봉자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가 1950년대에 만든 이 모임은 사회주의와 노조를 적대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그가 아무런 거침 없이 개인의 소신을 편다는 데 있다. 유원일 창조한국당 의원이 밝힌 자료를 보면, 그는 노동연구원 안에서 “노조에 주어진 노동3권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내 소신이자 학자적 양심”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모든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만들어야 한다”거나 “노동연구원을 공공부문 구조조정의 모범사례로 만들겠다”라고도 했다.
노동연구원의 한 연구위원은 “노·사·정 모두에 균형적인 시각을 가져야 하는 노동연구원의 수장으로서 직책보다는 학자적 견해를 여과 없이 내보이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박 원장은 지난 7월 기자간담회에서 “내가 추구하는 것은 국민경제 중심의 노동정책”이라며 “정권이 바뀌면 그때그때 필요에 맞춰야 연구원 존속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경영계 인사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말을 노동연구원장이 속 시원하게 해준 셈이다. 반면 그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연구위원들이 외부 토론회에 나가거나 언론에 기고하는 것을 막아왔다.
20여 년 역사상 처음으로 전면 파업상황이 이렇게 되자 노동연구원의 박사급 연구위원들은 박 원장의 일방적인 경영에 항의해 올해 7월 노조 조직을 시도하기도 했다. 연구원의 다른 연구위원은 “사실 보수적인 연구위원도 많은데, 이들까지 노조에 들어온 것을 보면 박 원장(이 어떤 인물인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한국 노사관계를 연구하는 노동연구원은 올해 20여 년 역사상 처음으로 전면 파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동안 수많은 파업 현장에서 한 발짝 물러나 연구를 했던 연구원들이 박 원장 덕분에 ‘노동자 교육의 장’인 파업을 체험으로 공부한 셈이다. 올해는 박 원장 탓에 노동연구원의 연구 실적이 예년보다 적은 편이라고 한다. 내년부터는 파업이라는 ‘산 교육’을 한 노동연구원이 어떤 보고서를 낼지 궁금하다.
이완 기자 한겨레 사회정책팀 w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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