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 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게리 베커는 남편과 아내의 성별 분업에 기초한, 순수 경제학적 의미에서의 가족을 제시했다. 남성은 시장노동에, 여성은 가정생산(가사노동)에 비교우위를 갖고 있으므로 부부가 기능적으로 자기 영역을 전문화할 때 가족의 효용이 극대화된다는 논리다. 남편은 바깥에 나가 돈을 벌고 아내는 집에 들어앉아 집안일을 하는 ‘신가족경제’ 모델이다. 그러나 신가족경제는 이미 붕괴되고 있다.
우리나라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기혼여성은 2008년 현재 764만 명이다. 1980년 379만 명, 1990년에는 541만 명이었다. 기혼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2008년 49.8%다. 1980년에 40.0%였는데, 80년대 후반에 큰 폭으로 증가해 1990년 46.8%에 도달한 뒤 지금까지 큰 변화 없이 49%대를 보이고 있다. 764만 명, 이들 기혼여성 경제활동인구의 노동 세계(시장노동과 가사노동)로 들어가보자.
우선 기혼여성의 취업을 둘러싼 인식은 크게 바뀌고 있다. 통계청의 를 보면, “자녀 수와 결혼 등 가정 조건과 관계없이 여성이 취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응답은 1988년 조사에서 여성 16.7%, 남성 8.4%에 그쳤으나, 2006년 조사에서는 여성 50.8%, 남성 43.3%로 높아졌다. “여성의 시장노동이 집안 살림을 엉망으로 만들고 결국 가족 해체나 이혼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는 전통적 가부장주의라는 딱지를 달고 옛날이야기가 돼버린 지 오래다. 남성들의 머릿속에서는 분명히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사노동 분담에서도 극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을까?
통계청의 를 보면, 2004년 기혼여성의 평일 가사노동 시간은 하루 3시간18분인 반면, 기혼남성의 총 가사노동 시간은 26분에 불과했다. 맞벌이 가구는 아내의 총 가사노동 시간이 하루 3시간29분, 남편은 하루 32분이었고, 비맞벌이 가구에서는 집안일에 사용하는 시간이 아내는 하루 6시간25분, 남편은 30분이었다. 맞벌이 남편과 비맞벌이 가구 남편 사이에 가사 분담 차이는 고작 2분이다. 기혼여성이 노동인구로 대거 이동하고 있지만, 다른 조건들은 별로 바뀌지 않은 채 기혼여성만 홀로 변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2007년 9월부터 2008년 2월까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실시한 ‘여성가족패널 1차 조사’(전국 성인여성 1만31명 면접 설문조사) 결과는 놀랍다. 이 조사에서 “평일에 남편이 가사노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가 5396명(69.8%)에 달했다. 평균적으로 평일 가사노동 시간은 여성 4시간21분, 남성은 21.6분에 불과했다. “일요일에도 남편이 전혀 가사노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3769명(45.8%)에 달했다. ‘취업 중인 기혼여성’만 따로 보면, 이들의 가사노동 시간은 평일 3시간4분, 토요일 3시간23분이었다. 반면 ‘취업 중인 기혼남성’은 평일 29분, 토요일 35분을 가사노동에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일이든 휴일이든 집안일을 하는 시간은 별 차이가 없다. 즉, 취업여성은 여전히 ‘주부’라는 자신의 오랜 역할과 결합되는 반면, 취업남성은 ‘주부’라는 새로운 역할을 외면한 채 살고 있는 것이다.
미국 쪽을 보면, 1965년 당시 하루 중 가사노동 소비 시간은 기혼 취업여성 3시간42분, 기혼 취업남성 50분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75∼76년 조사에서는 취업아내의 가사노동 시간은 하루 2시간18분∼4시간, 취업아내를 둔 남편은 하루 36분∼1시간54분 정도 가사노동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요즘 한국 남편들의 가사 분담 시간은 40여 년 전 미국 가정 남편들의 가사 분담 시간에도 훨씬 못 미친다.
사실 남자들이 집안일을 한다 하더라도 자녀를 공원 등에 데려가 ‘놀아주기’ 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살림’에 더 많은 시간을 쓰는 건 항상 아내들이다. 맞벌이 남성이 좀더 평등한 가사노동 분담으로 점차 이동하고 있는 듯 보일지라도, 자신의 시장노동을 방해하지 않는 수준에서만 가사에 시간을 할애할 뿐이다. 특히 남편들은 “나 없다고 해요”라고 말하는 회사 사장처럼 가정에서 시간을 자유롭게 쓰는 반면, 아내는 항상 집안일을 위해 비서처럼 24시간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여성은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남성은 느리게 변하거나 좀체 변하지 않는 ‘지체된 혁명’이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경제활동 속으로 역사적인 이동을 하고 있는 기혼여성들은 좀더 지속적으로 노동시장에 남아 있으려는 ‘강한 애착’을 보이고 있다. 첫아이를 더 늦게 가져 노동시장에 더 오래 남거나, 첫 자녀와 둘째 자녀의 나이 터울을 짧게 하는 경향도 강하다. 노동시장에서 경력 단절 기간을 줄이기 위해서다. 사실 동료 남성과 여성, 또는 여성끼리 경쟁하는 직장은 ‘집안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게임’이다. 가정일의 일부에서 해방되지 못한 여성일수록 노동시장에서 쉽게, 또는 끝내 탈락하게 된다. 그동안 여성이 집에 들어앉아 남편을 도왔다면 이제는 누가 ‘주부 노동자’들의 사회경제적 이행을 뒷바라지할 것인가? 여성주의 사회학자 혹실드는 에서 “이제는 한 세대 남성 전체가 집안일 속으로 역사적 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집안에서 남편들이 ‘설거지’는 얼마나 돕고 있을까? ‘여성가족패널 1차 조사’에서 남편이 설거지를 일주일에 1번 한다고 응답한 여성은 11.6%, 남편이 2∼3번 한다는 응답은 9.5%였다. ‘식사 준비’도 남편이 일주일에 1번 한다는 10.5%, 2∼3번 한다는 7.7%로 설거지와 엇비슷한 비율을 보였다. 남편이 식사 준비와 설거지를 동시에 할 때가 간혹 있지만 ‘밥은 아내가 차리고, 설거지는 남편이 맡는’ 가정은 거의 없음을 알 수 있다.
문현아 서울대 강사는 (2008 겨울호)에서 “노동의 여성화(여성 노동인구 증가)로 현실이 변화고 있지만 ‘가족의 남성화’는 진행되지 않고 오히려 ‘가족의 재여성화’로 이어지고 있다”며 “맞벌이 부부한테 집안일은 △직장일을 하는 아내의 이중 부담 △또 다른 여성의 저임금 △확대가족의 무임금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또 다른 여성’은 주로 가사도우미 노동자들이다. (여성) 가사도우미의 월평균 수입은 2008년에 61만2천원으로, 여러 사회서비스 일자리 중 가장 낮다. 또, ‘확대가족의 무임금노동’을 대표하는 부류는 할머니들이다. 임옥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편집주간은 “여성은 할머니가 되면 직접적인 재생산은 마감한다. 하지만 다른 여성들이 재생산한 존재(손자·손녀 등)를 보살펴줌으로써 끝까지 재생산 의무를 충실히 수행한다. 가족과 사회 전체적으로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또 다른 여성인) 할머니들”이라고 말했다.
자녀 돌봄뿐 아니라 ‘노인 돌봄’ 노동을 주로 담당하는 쪽도 기혼여성들이다. ‘여성가족패널 1차 조사’에서 “편찮은 친정 부모님을 돌보는 사람”은 아내의 다른 형제자매(44.5%), 환자의 배우자(22.6%), 아내 자신(11.6%)이었다. 반면, “편찮은 시부모님을 돌보는 사람”은 남편의 다른 형제자매(29.3%), 아내 자신(24.8%), 환자의 배우자(16.7%)로 나타났다. 즉, 형제자매든 배우자든 아내 자신이든 대부분 ‘여성’이다. 이렇듯 자녀·노인에 대한 돌봄 사회서비스 제공이 지체되고 있는 현실에서 맞벌이 여성은 1년에 열세 달을, 즉 한 달 더 덤으로 일해야 한다.
일요일·평일 학습 투입 시간 ‘0분’2006년에 남성의 43.3%가 아내의 취업을 원했듯, 남편들은 전업주부가 아니라 일터에 나가는 배우자를 좀더 매력적으로 보면서도 정작 새로운 현실에는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맞벌이 부부 가정 안에서 갈등이 불거질 때 남성은 이를 아내의 취업 탓으로 돌리고, 아내 스스로도 자신의 취업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사실 기혼여성들이 시장노동에 뛰어들면서 가족의 생활 속도와 리듬은 빨라지고 있다. 그러나 빨라지는 속도를 흡수하는 쪽은 여전히 여성이다. 시간 빈곤에 쫓기면서 가정일을 뒤로 미루게 되고, 자연히 주말 가사노동량이 더 늘어나게 된다. 맞벌이 속에서 기혼여성은 조용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럼 일하는 여성은 자신의 24시간을 어떻게 배분해 쓰고 있을까? 2004년 통계청의 를 보면, 주당 36시간 이상 직장일을 하는 기혼여성의 경우 평일에 △수면 등 개인 유지 9시간58분 △직장일 6시간43분 △학습 0분 △가정관리 2시간14분 △가족 보살피기 26분 △참여 및 봉사활동 2분 △교제 및 여가활동 2시간51분 △이동 1시간 31분 △기타 14분이었다. 일요일에는 밀린 가사 때문에 가정관리 시간이 1시간가량 늘어나는데, 여전히 ‘직장일’로 3시간4분을 사용하고 있었다. 할인점 등 판매·서비스 직종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기혼여성 취업자가 그만큼 많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특히 평일이든 일요일이든 취업 기혼여성이 학습에 투입하는 시간은 ‘0분’이었다.
그동안 가정 바깥에서 남성의 일이 더 가치 있고 중요한 것처럼 보였지만, 가정 바깥에서 ‘성공적으로 일하는 아내’ 역시 전체 가족에게 그리고 아내 자신에게 좋은 효과를 가져다준다는 건 분명하다. 남편은 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자녀와 지내면서 또는 아내의 직업적 성취를 보면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남편들이, ‘성공적이고 가치 있는 일자리 경험을 갖는, 그래서 좀더 행복한 아내’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흥미롭게도 여러 연구들은 어머니가 취업노동에서 성공적일 때 학령기나 조금 더 나이든 아이들에게 좋은 효과를 가져다준다고 보고하고 있다. 즉, 딸들은 역할모델로서 어머니를 수용하고 아들은 성평등을 선호하는 경향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혹실드는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이란 커다란 변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남성들은 가사노동 영역에 여전히 진출하지 않는 ‘지체된 변화’ 속에서 일하는 여성에게도 아내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취업 기혼여성들은 말한다. “저에게 지금 정말 필요한 건 아내입니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20·30대 ‘가사분담’ 인식
<font size="3"><font color="#006699">부부 문제가 아니라 세대 문제?</font></font>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실시한 ‘여성가족패널 1차 조사’(전국 성인여성 1만31명 면접설문· 2007년 9월∼2008년 2월)에서 부부간에 말다툼하는 원인을 물어본 항목이 있다. 경제적 문제, 자녀 교육 문제, 시부모와의 관계, 가사 분담 문제 등 8가지를 제시한 뒤 3가지를 순위에 따라 복수 응답하도록 했다. 조사 결과 말다툼 원인 1위가 ‘가사 분담 문제’라고 응답한 기혼여성은 1.1%에 불과했다. 가사 분담을 이유로 다툰 일이 있다는 응답을 모두 합쳐도 13.2%에 그쳤다. 기혼여성들 스스로 불평등한 가사 분담을 꾹 참고 견디고 있다는 뜻일까?
이와 관련해 또 다른 흥미로운 조사 결과가 있다. 통계청의 (2006)를 보면, 15∼19살의 경우 남자의 55.9%, 여성의 73.8%가 ‘남녀가 가사를 공평 분담해야 한다’고 답했다. ‘공평 분담해야 한다’는 응답은 남자의 경우 20대 42.8%, 30대 21.8%, 40대 15.5%로 나이가 들수록 현저히 낮아졌다. 그런데 여성의 경우에는 ‘공평 분담해야 한다’는 응답이 20대에서 61.2%였으나 30대에서는 32.7%로 뚝 떨어졌다. ‘결혼한 30대’가 되면 여성 스스로 이제 더 이상 공평 분담을 요구하지 않는 쪽으로 돌아서는 것일까?
‘가사 분담을 주로 부인이 해야 한다’는 응답은 20대 여성의 36.4%, 20대 남성의 53.1%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런데 연령층이 높아지면 30대 여성의 64.9%와 30대 남성의 69.0%가, 40대 여성의 67.8%와 40대 남성의 71.0%가 “주로 부인이 해야 한다”고 답했다. 20대에 비해 30·40대에서는 이견이 크지 않은 것이다. 결혼한 뒤에는 주로 아내가 담당해야 할 몫이라고 여성 스스로 체념하고 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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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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