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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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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과거로 돌아갈 순 없게 됐다

30년 전 초유의 정치 실험이 낳은 기이한 쌍생아가 ‘분열’의 바탕…
“이란혁명 제2단계의 서막”
등록 2009-07-02 02:26 수정 2020-05-02 19:25

‘알라후 아크바르~!’
테헤란의 거리에 땅거미가 내리면, 어둠에 기대 사람들이 외치기 시작한다. ‘알라후 아크바르, 신은 위대하시다.’ 신실한 무슬림이라면 하루 다섯 번 성지 메카를 향해 올리는 기도, 마그립(해질 녘)과 이샤(밤)의 기도 소리는 어느새 비통한 울부짖음으로 바뀌어 있다. 이란에선 낯설지 않은 일이다. 꼭 30년 전, 부패한 팔레비 왕조를 지탱하던 마지막 ‘샤’(국왕)의 정치적 숨통을 끊어놓은 것도 지붕 위에 올라앉은 테헤란 시민들의 똑같은 외침이었다. 종국에, 그 외침은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이슬람 공화국’ 탄생으로 이어졌다.

‘말하라, 혁명의 후예.’ 지난 6월23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집회에서 한 이란인 남성이 이란 현지의 억압적 상황을 상징하기 위해 입 주위에 반쯤 열린 지퍼를 붙인 채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REUTERS/ JOHN KOLESIDIS

‘말하라, 혁명의 후예.’ 지난 6월23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집회에서 한 이란인 남성이 이란 현지의 억압적 상황을 상징하기 위해 입 주위에 반쯤 열린 지퍼를 붙인 채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REUTERS/ JOHN KOLESIDIS

내부자 ‘호디’, 외부자 ‘게이르 에 호디’

지난 6월20일 테헤란의 거리에서 또다시 꽃다운 젊음이 피를 뿌렸다. 네다 아가 솔탄(26), 시위대 속에 뒤섞여 있던 그이의 가슴을 바시지 민병대의 흉탄이 꿰뚫었다. 그는 차마 눈조차 감지 못했다. 허공을 향해 치켜뜬 눈 그대로 스러져간 그를 기리며 사람들은 이렇게 목을 놓았다. “네다, 너는 두 눈 부릅뜨고 숨을 거뒀지. 그러니 살아남은 우리, 어찌 눈을 감을 수 있겠니.” 건국 30주년을 맞은 이슬람 공화국의 수도 테헤란이 그렇게 오열하고 있다.

‘독립, 자유, 그리고 이슬람 공화국’을 기치로 내건 1979년 이란 혁명은 그 자체로 작은 기적이었다. 서구 열강의 강점으로 중세의 그늘에 머물러 있던 무슬림들은 이란 땅에 들어선 ‘이슬람 공화국’을 통해 이슬람식 근대제도의 역할모델을 만났다. ‘이슬람’은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으로 제자리를 지켰고, 정치는 오롯이 ‘공화국’에 맡겨졌다. 이슬람의 가르침과 세속적 민주주의를 동시에 지향한 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동을 휩쓸었던 아랍민족주의도, 아랍식 사회주의도 완성시키지 못한 새로운 대안이었다.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지난 6월19일 테헤란대학 금요성일 예배에서 이를 ‘종교 민주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네다, 혁명의 증언자.’ 지난 6월20일 테헤란 중심가에서 네다 아가 솔탄이 시위 진압에 나선 바시지 민병대의 총격을 받고 쓰러진 장면을 담은 동영상은 인터넷을 타고 삽시간에 지구촌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사진 REUTERS

‘네다, 혁명의 증언자.’ 지난 6월20일 테헤란 중심가에서 네다 아가 솔탄이 시위 진압에 나선 바시지 민병대의 총격을 받고 쓰러진 장면을 담은 동영상은 인터넷을 타고 삽시간에 지구촌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사진 REUTERS

문자 그대로 ‘초유의 정치 실험’이었다. 쉬울 리 없었다. ‘이슬람’과 ‘공화국’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종교’와 ‘민주주의’ 둘 사이에서, 파열음은 쉽게도 터져나왔다. 30년 세월을 거슬러 갈등의 골이 켜켜이 패었고, 반목의 단층도 쌓여만 갔다. 지난 6월12일 대선 이후 테헤란의 거리에서 터져나온 분노의 외침은 그래서 이중적이다. 이슬람과 공화국, 종교와 민주주의, 보수와 개혁파…. 중동 지역 권위지인 은 최신호에 실은 ‘이란, 분열된 나라’란 제목의 기사에서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갈등의 배후에 혁명이 낳은 ‘기이한 쌍생아’가 있다고 분석했다. 귀담아들을 만하다.

은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이란에선 새로운 인간의 전형이 만들어졌다”고 지적한다. 신심이 깊은 시아파 무슬림으로, 혁명의 대의에 충실하며, 최고지도자의 인도에 따르고, 국가의 정책을 적극 옹호하며, 이슬람 공화국의 문화·과학·정치적 발전에 앞장서는 ‘혁명의 총아’다. 이들은 흔히 ‘호디’(Khodi), 곧 내부자로 불린단다. 비슷한 시기, 전혀 다른 인간 군상도 잉태됐다. 혁명의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회의하는 이들, 이른바 ‘게이르 에 호디’(Gheyr-e Khodi·외부자)다. ‘호디’가 체제를 상징한다면, ‘게이르 에 호디’는 반체제의 발현일 터다.

하타미-라파산자니 16년간 깊은 틈새

‘게이르 에 호디’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혁명 초기부터 이란 당국이 택한 방식은 겁박이었다. 검열과 단속, 정치적 차별과 배제의 논리가 횡행했다. 팔레비 왕조의 모진 세월도 견뎌낸 이들이다. 통할 리 없었다. 되레 ‘외부자’들이 느끼는 좌절감과 분노만 키유워놓고 말았다. 1997년 개혁파 성직자 모하마드 하타미가 압도적 지지 속에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게이르 에 호디’의 오랜 절망에 대한 해원이었을 터다.

하타미 대통령은 집권 초부터 ‘호디’와 ‘게이르 에 호디’ 사이의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조금 더 자유로운 문화, 조금 더 개방적인 정치로 가는 문을 열어나갔다. ‘공화국’ 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호디’ 쪽이 반발하는 건 당연했다. 하타미 대통령 집권 기간 8년 내내 보수와 개혁파로 갈린 이란 사회는 요동을 멈출 줄 몰랐다. 극한 대립의 굵은 선이 그어졌다. 그 끝에서 치러진 2005년 대선에서 ‘호디’의 전형이라 할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무난히 집권에 성공했다.

기다렸다는 듯, 다시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검열이 한층 강화됐고, 언론에도 예의 재갈이 물려졌다. ‘게이르 에 호디’들의 분노는 차츰 노도가 돼갔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 개혁파 후보인 미르 호세인 무사비 전 총리의 선거 유세장을 뒤흔든 ‘초록의 물결’이 이를 방증했다. 그러니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압승이란 선거 결과는 애초부터 쉽게 삼켜내기 어려운 터였다. 게다가 선거부정 의혹이 도처에서 터져나왔으니, 성난 민심이 질풍처럼 거리로 쏟아져나온 건 당연했다. 예견할 수 있었던, 예견했어야 할 일이었던 게다.

‘호디’와 ‘게이르 에 호디’의 갈등은 정치 상황과 긴밀히 연계돼 있다. 이란의 혼돈을 이해하려면 다른 한 축, 곧 경제적인 측면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돌이켜보자. 막 걸음마를 뗀 이슬람 혁명은 이내 전쟁이란 늪으로 빠져들었다. 이웃나라 이라크와 벌인 8년여 전쟁은 신생 혁명의 생장을 가로막았다. 전후 재건을 진두지휘한 것은 1989년부터 97년까지 두 차례 거푸 집권한 악바르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이다. 전시경제로 무너진 살림을 일으켜세우기 위해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은 개발지상주의에 몰입했다.

6월23일 테헤란의 영국 대사관 앞에서 열린 반미·반영국 집회에서 보수 성향의 시민들이 성조기를 불태우고 있다. 사진 REUTERS/ FARS NEWS

6월23일 테헤란의 영국 대사관 앞에서 열린 반미·반영국 집회에서 보수 성향의 시민들이 성조기를 불태우고 있다. 사진 REUTERS/ FARS NEWS

급격한 경제성장은 중산층과 자산가 계층을 살찌웠지만, 성장의 과실은 고루 나눠지지 않았다. 빈부격차가 늘어가는 새 특혜와 연고주의, 부패가 판을 쳤다. 이란판 오렌지족이라 할 ‘아카자데’가 출연한 것도 이 무렵이다. 민심은 흉흉해졌다. 성장의 뒤안길로 내몰린 빈손뿐인 이들의 분노가 쌓여갔다. 하지만 개혁파 하타미 대통령도 라프산자니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를 뒤흔들지 않았다. 두 사람의 임기를 합친 16년 동안 이란 사회에 거대한 틈새가 만들어졌다.

미래 모색, 네 가지 지표

이는 2005년 대선에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1차 투표의 부진에도 결선투표에서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을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당선된 배경이기도 하다. 독점과 부패로 얼룩진 세월에 대한 민심의 견제였던 게다. 혁명의 대의, 곧 정의와 평등을 부르짖었던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실제 지난 4년 임기를 값싼 점퍼로 버텨냈다. 선거부정을 규탄하는 시위대를 쫓아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지지자들이 이란 국기를 들고 거리로 몰려나온 것도 아예 이해 못할 바는 아닌 게다. 그러니 이제, 이란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건가?

“이란은 이슬람 공화국이다. 이슬람 학자들이 최고 통치권력을 이루는 국가다.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하메네이는 이미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했다. 선거부정 의혹도 일축했다. 그리고 거리시위를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그럼에도 이튿날 다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그리고 시위대가 목숨을 잃었다.” 미 시사주간지 는 6월20일 인터넷판에서 새삼 이렇게 지적했다. 는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권위는 이미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며 “이제 최고지도자의 뜻도 거스를 수 있다는 점이 명확해졌다”고 강조했다. 이번 시위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든, 이란이 이전과 같은 상황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얘기다.

향후 이란 정국에 놓고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는 두 가지로 좁혀진다. 먼저 이란 당국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시위를 무지르는 데 성공하는 경우다. 압력에 굴하면 더 많은 압력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20년째 권력의 정점에 버티고 선 아야톨라 하메네이도 이를 잘 알고 있을 터다. 시위가 주춤하는 양상을 보이는 지금으로선 이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럼에도 의 지적처럼 이미 ‘최고권력’에 쉽게 식별 가능한 생채기가 났다. 전과 같을 수는 없게 됐다.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정치적 미래마저 불투명한 상황이니,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가 무기력할 것이란 점은 당연해 보인다.

6월25일 독일 베를린에서 현지에 거주하는 이란인들이 시위 진압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 REUTERS. THOMAS PETER

6월25일 독일 베를린에서 현지에 거주하는 이란인들이 시위 진압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 REUTERS. THOMAS PETER

가능성이 낮아 보이긴 하지만 시위가 상당 기간 계속되는 상황도 아예 배제할 순 없다. 거리의 동력만 유지할 수 있다면, 선거부정에 대한 단순한 분노 표출을 넘어 이슬람 공화국의 미래에 대한 모색으로까지 지평을 넓혀갈 수도 있을 게다. 가능한 일일까? 은 “네 가지 지표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 잘 조직된 풀뿌리 운동이 전개돼야 한다. 둘째, 사회 각계각층의 폭넓은 참여를 이끌어내야 한다. 셋째, 정부의 탄압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시위 진압부대와 집권층 내부에서 분열의 조짐이 보여야 한다. 하나씩 따져보자.

보수파 아성 마즐리스에서도 불협화음

오랜 기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무사비 전 총리가 풀뿌리 조직망을 갖췄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거리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고학력 젊은 층이다. 시위의 주무대도 대도시로 한정돼 있는 듯하다.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강경한 발언과 뒤이은 무자비한 진압 이후 시위 열기는 일단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 주어진 상황을 종합하면, 시위대의 승산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권력 내부에서 조금씩 파열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눈여겨볼 대목이다. 시아파 성지 곰의 성직자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6월25일 열린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재선 축하 행사에 초대된 마즐리스(의회) 의원 290명 가운데 모습을 드려낸 것은 105명에 불과했다는 점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전체 의원의 3분의 2가량이 불참했다는 얘기다. 개혁파 의원이 50명 남짓에 불과할 정도로 현 마즐리스는 보수파의 아성이다. 보수파인 알리 라리자니 마즐리스 의장은 선거 결과 발표 직후부터 부정선거 의혹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를 촉구해온 바다. 모종의 ‘변화’가 감지된다.

“이미 최고지도자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다. 거리의 시위대가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명령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시위대 누구도 ‘엔켈랍’(혁명)이란 낱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카림 사드자드포어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연구위원은 지난 최근 미 외교관계협회(CFR)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무사비 전 총리도 일찌감치 이슬람 공화국의 근간을 뒤흔들 의도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누구도 ‘파국’을 원치 않는다는 얘기다.

아무 일 없었던 듯 ‘과거’로 돌아갈 순 없게 됐다. 지난 보름여 벌어진 시위는 30년 된 이란혁명이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30년 전 부패한 친미 왕정을 무너뜨리고 사상 최초의 이슬람 공화국을 건설했던 그 혁명이, 바야흐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모습이다. 폐쇄적인 정치·사회 현실에 대한 반발은 이미 숨길 수 없게 됐다. 이슬람 공화국 체제를 유지하면서, 이를 어떻게 받아안을 것인가? 새로운 정치 실험이 시작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유달승 한국외대 교수(이란어과)는 “조금 더 자유롭고, 조금 더 개방적인 사회로 이행해나가는 과정을 밟을 수밖에 없게 됐다”며 “이슬람 공화국의 뼈대를 지키되, 최고지도자 선출 방식을 포함해 지금보다 조금 더 국민의 대표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변화를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유 교수는 이를 두고 “이란 혁명 제2단계의 서막이라 부를 만하다”고 말했다.

게이르 에 호디 vs 게이르 에 호디

무사비 전 총리의 지지자들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게이르 에 호디’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지지자들은 경제적으로 소외된 ‘게이르 에 호디’로 볼 수 있다. 엇갈린 채 맞서고 있지만, 두 집단은 기실 현실에 대한 절망과 분노를 공유하고 있다. 섣불리 ‘혁명’을 말하기 전에, 먼저 이란의 ‘분열’에 눈길을 둬야 하는 이유다. 두 ‘외부자’가 서로의 아픔을 나눌 수만 있다면, 30년 전 시작된 초유의 정치 실험은 다음 단계로 진화해갈 수 있을 터다. 탄압을 멈춰라. 총질을 거둬라. 또 다른 혁명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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