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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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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몸살, 가면을 벗고 앓아라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이 말하는 ‘중년의 사춘기’ 현명하게 나는 법
등록 2009-06-26 13:43 수정 2020-05-03 04:25

“인생의 롤모델이 없어 더듬더듬 살아가는 세대.”
남성사회문화연구소 이의수 소장은 ‘40대 남자’를 이렇게 정의한다. 따르고픈 아버지 역할도, 노년의 인생 2막을 열어가는 모범적인 인생 선배도 없어 일과 삶에서 돌다리 두드리며 길을 건너가야 하는 세대라는 의미다. 공자는 나이 마흔을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됐음을 뜻하는 말로 ‘불혹’(不惑)이라 했다. 그러나 우리 시대 40대는 이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10대의 사춘기처럼 ‘중년의 사춘기’를 보내며 지독한 ‘나이몸살’을 앓고 있다. 직장과 가정에서 과중한 책임감에 시달리고, 육체는 병들기 시작했으며, 마음 붙일 곳을 찾기도 쉽지 않다. 40대 남성 자살률 세계 1위, 기러기 아빠, 직장 내 왕따 등 한국의 40대 직장 남성들이 겪는 현실을 사람답게 살 권리 ‘인권’의 이름으로 들여다보면 절로 측은해진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마인드프리즘 대표에게 40대 남자들의 위기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지난 6월16일,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한국 40대 직장 남성들의 생활과 인권’이란 주제로 대화마당이 열렸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마인드프리즘 대표(오른쪽)가 이 행사에 참석한 중년 남성들(왼쪽)의 고민 상담사로 나섰다.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지난 6월16일,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한국 40대 직장 남성들의 생활과 인권’이란 주제로 대화마당이 열렸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마인드프리즘 대표(오른쪽)가 이 행사에 참석한 중년 남성들(왼쪽)의 고민 상담사로 나섰다.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 각종 통계를 보면 중년 남성들의 우울증과 자살률이 높다.

= 우울증으로 보면 ‘가면(假面)우울증’이 많다. 이 경우 우울증을 부정하며 다른 형태로 표출시킨다. 자기 안의 무기력, 좌절 등을 겪을 때 “긍정적으로 전환해야지” 하면서 일이나 자격증, 운동 등에 몰입하며 자기를 통제하려고 한다. 그것이 필요한 시기에 하는 행동은 당연한데, 그걸 종료해야 할 시점에서도 계속되는 게 문제다. 이런 우울증이 잠재돼 있다 극단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 같은 40대라도 남녀는 삶의 무게를 견디는 힘이 다르다. 자살 시도율과 성공률 통계를 보면 늘 여성보다 남성이 높다.

= 남성이 여성에 비해 극단적인 상황까지 나누고 소통하며 도움을 이끌어내는 시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남성은 사회 상황에 따라 역할에 맞는 가면을 썼다 벗었다 하는 유연성이 떨어진다. 직장에선 상사, 가정에선 아버지 등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처한 사회 상황에서 적절한 역할 가면을 쓰게 마련이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보듯 재벌 회장님은 집에 와도 “다녀오셨어요, 회장님” 하며 깍듯이 대우받기를 바란다. ‘페르소나(가면)와의 과도한 동일시’다. 이것이 자기성찰과 객관화를 막아 건강을 해치는 만큼 가면을 쓰고 벗는 일에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아버지를 닮아간다고 괴로워하는 중년도 많다.

= 아버지한테 맞으며 자란 아들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살아온 환경은 공기처럼 주입되는 것이라, 아버지와 비슷한 상황을 만들고 합리화할 확률이 높다.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아버지의 모습을 내면화하게 된다. 반면 아버지와 정반대로 살아가는 이들도 편치 않다. 아버지처럼 되길 두려워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다. 아버지와 다르게 사는 것 같지만 개인의 삶은 평탄치 않은 것이다. 두 경우 모두 불행한 거다.

- 40대가 되면 누구나 겪는 위기인가.

= 인간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단계에서 나뿐 아니라 모두가 겪는 시기적 위기가 있다. 10대에 사춘기라는 공통된 현상을 겪듯 중년기에도 그런 틀이나 흐름 속에서 공통의 심리적 이슈가 만들어진다. 1970~80년대 신문을 봐도 40대 중년 남성의 위기 상황이 똑같다. 다만 이 안에서 개인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40대들은 흔히 자신들을 ‘낀 세대’라고 얘기하며 세대적인 문제로 개인의 위기를 돌린다. 386세대가 마치 자신만 그런 것처럼, 자신만의 고유한 문제라고 생각하며 문제를 해석하는 것과 같다. 이는 잘못된 것으로 개인 문제로 객관화해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 정치·사회 문제에 민감한 386세대가 40대가 되면서 겪는 위기의식은 아닌가.

= 386세대는 상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40대 위기와 맞물려 풀려고 하면 안 된다. 386의 문제로 집단화하면 40대 중년 남성이 겪는 위기의 본질이 흐려진다. 중년이 되면 누구나 자기가 누구인지를 다시 한번 들여다봐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삶의 방향을 잃고 공황 상태를 겪게 된다. 개인의 경험에 따라 여러 형태로 문제가 나타나는데, 386의 경우도 그중 하나는 될 수 있다.

- 직장과 가정 등에서 40대 남자들이 위기 상황을 헤쳐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 40대의 위기는 환영해야 한다. 남자들이 자신의 삶에서 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다. 나만 겪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홀가분해질 것이다. 자기성찰이 중요하다. 문제 해결 방법을 빨리 찾으려 하지 말고 문제를 발견했을 때 멈칫하고 주춤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쓸모없는 시간낭비라고 생각하겠지만, 본질을 찾아헤매는 시간이 많을수록 해결 방법은 더 쉽게 나올 수 있다. 인문학 서적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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