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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전향’ 귀착은 국가주의

일제로 거슬러 올라가는 변절의 뿌리… 전선 불확실한 요즘은 도덕적 편가르기 위험
등록 2009-05-29 16:37 수정 2020-05-03 04:25

변절은 전향에 대한 비난의 언어다. 전향에 대한 경계와 공포가 한국 진보 진영에 있다. 그 뿌리는 일제 시절에 있다. 일본은 전향 공작과 함께 전향 콤플렉스까지 한반도에 심었다.
‘방향전환’의 일본식 줄임말인 전향은 원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만들어낸 단어였다. 1920년대에 등장한 이 단어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는 혁명가의 주체적 노력을 뜻했다. 전향이라는 단어의 ‘전향’은 1933년에 시작됐다. 일본 공산당 최고지도자였던 사노 마나부와 나베야마 사다치카가 천황제 폐지, 만주사변 반대 등의 기존 입장을 철회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3년 동안 수감된 일본 공산당원 74%(324명)가 같은 입장의 전향을 발표했다. 당사자들은 ‘상황에 적응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때부터 전향은 변절의 다른 이름이 됐다.

안중근 의사를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됐던 중국 뤼순 감옥의 고문실. 일제는 ‘사상전향 공작’이 치안유지법보다 더 효과적인 대응책이라고 생각했다. 사진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안중근 의사를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됐던 중국 뤼순 감옥의 고문실. 일제는 ‘사상전향 공작’이 치안유지법보다 더 효과적인 대응책이라고 생각했다. 사진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알타이연합’ 구상은 황석영의 자기 배반

당시 일제는 사상범을 다루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전향’을 적극 수용했다. ‘전향 유도술 안내서’라는 책까지 냈다. 이 방식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적용됐고, 해방 이후에도 독재정권의 민주인사 탄압책으로 활용됐다.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행형법상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는 ‘사상전향제’는 1989년 사회안전법 폐지, 2003년 준법서약제 폐지 등을 거쳐 사라졌다.

그러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국가 권력의 강제에 의하지 않는 일종의 ‘자발적 전향’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전향 문제를 깊이 연구한 일본 학자 쓰루미 슌스케는 1930년대의 전향자 대부분이 도쿄제대 법학부 출신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정치적 의견이 바뀌어도 자신은 계속 지도자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신념”이 전향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향 연구자 후지타 쇼조는 이들의 엘리트주의가 “한순간도 국민적 지도자의 지위에서 멀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게 했다”고 분석했다. “근본적인 자기비판은 불가능하고 전향했다는 자각 역시 미약한 것”이 ‘전향 엘리트’의 특성이라고 봤다.

전향 엘리트의 또 다른 특징은 자신의 변화를 전체에 강요한다는 데 있다. 사노·나베야마는 1930년대 공산당 지도부였다. 그들은 자신의 사상 변화를 나머지 공산당 전체가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전향과 당의 전향을 동일하게 여기는 ‘병리현상’”을 겪었다는 것이다.

선민의식을 갖춘 이들의 전향이 ‘국가주의’와 만난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이명원 문학평론가는 “과거 좌파적 신념을 견지했다는 대부분의 사람이 사상적 전향 이후 강력한 국가주의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황석영의 ‘알타이연합’ 구상도 비슷한 맥락이다. “중앙아시아의 가난한 몇 나라를 한국 방식으로 공업화해 남북 노동자를 투입해 남북 문제를 풀자는 주장은 제국주의를 비판했던 황 선생의 자기배반”이라는 것이다.

전향의 배경에는 국가 또는 민족의 지도자라는 강렬한 자의식 속에서 과도한 짐을 스스로 짊어지는 자세가 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국가에 대한 걱정을 조금 내려놓고 자신에 대한 과신까지 덜어놓으면, 전향이 아닌 ‘진보’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급격한 사회변동을 겪은 한국에서는 잦은 변절만큼이나 변절 콤플렉스도 깊다. ‘몰아세우기’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다. 권혁범 대전대 교수는 “과거에는 전선이 확실했기에 (변절에 대한) 사회적·집단적 반응이 나오는 게 정상이었지만 지금은 도덕적 편가르기의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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